바늘의 무렵 / 김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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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640회 작성일 16-12-15 22:24본문
바늘의 무렵 / 김경주
바늘을 삼킨 자는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흘러 다니는 바늘을 느끼면서 죽는다고 하는데
한밤에 가지고 놀다가 이불솜으로 들어가 버린 얇은 바늘의 근황 같은 것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끝내 이불 속으로 흘러간 바늘을 찾지 못한 채 가족은 그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그 이불을 하나씩 떠나면서 다른 이불 안에 흘러 있는 무렵이 되었다
이불 안으로 꼬옥 들어간 바늘처럼 누워 있다고, 가족에게 근황 같은 것도 이야기하고 싶은 때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그 바늘을 아무도 찾지 못했다 생각하면 입이 안 떨어지는 가혹이 있다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알게 되면, 사인(死因)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궁녀들은 바늘을 삼키고 죽어야 했다는 옛 서적을 뒤적거리며
한 개의 문(門)에서 바늘로 흘러와 이불만 옮기고 살고 있는 생을, 한 개의 문(文)에서 나온 사인과 혼동하지 않기로 한다
이불 속에서 누군가 손을 꼭 쥐어 줄 때는 그게 누구의 손이라도 눈물이 난다 하나의 이불로만 일생을 살고 있는 삶으로 기꺼이 범람하는 바늘들의 곡선을 예우한다
鵲巢感想文
木
식목일 행사처럼 나는 매일 나무를 심었다 어두운 산 그림자 밑에 햇볕도 보지 못할 그런 나무를 어두운 땅에다가 옮겼다 날씨 꽤 흐린 날 나는 숲에 갔는데 정말 나무와 같은 나무를 보았다 아니 나무였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도 있었다 내가 우울할 때 구름 핀셋으로 숲에서 나무를 뽑기도 했다 정말 나는 나무를 뽑았다고 생각했다 나무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그 날카로운 사자의 발톱과 들소의 발굽과 곰 갈퀴 받으며 그렇게 있었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사족이 길었다. 여기서 바늘은 어떤 무엇을 제유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러니까 바늘과 같은 고통이나 어떤 비평, 또는 논설과 같은 것이다. 호! 여기서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안다. 무렵이라는 단어도 심오하다. 어떤 한 사건이 터질 시점이나 그즈음이다. 여기서 시, 한 행마다 해석하는 것보다는 그냥 크게 보아 넘기고자 한다.
시인이 쓴 시어를 보면 첫째 바늘이 있고 둘째 이불도 있다. 시 후반부에 들어서면 궁녀와 곡선 같은 것도 있다. 이러한 시어는 이 시를 읽는데 실마리다. 실을 푸는 데 있어 어떤 감은 있어도 그 무엇은 정확히 어떤 것이라고 얘기하면 웃기는 일이다.
나는 예전에 다산의 글을 읽은 적 있다. 다산은 당대에 석학이었다. 나보다는 정확히 200년 앞서 사신 선생이었다. 선생의 호가 ‘여유당’이었는데 선생은 우리가 익히 아는 다산이라 불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여유당이라는 호는 선생께서 직접 지은 거로 안다. 왜 여유당으로 지었을까?
뭐 이 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얘기 같아도 나는 횡설수설한다. 이불은 우리가 잠잘 때 덮는 어떤 피륙이다. 우리는 사회를 살면서 이 피륙 같은 것으로 스스로 보호하기도 하고 또 이 속에 함께 사는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심지어 이불 같은 이 비슷한 것에 의존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생각해 보라! 바늘이 이불에 들어갔다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로 발설하지도 못하고 또 함께 덮고 잘 수도 없는 그런 입장이라면, 심지어 이 바늘을 바늘이라 끔뻑 잊어버리고 내가 우리가 함께 덮고 잘 이불에 넣었다면, 나는 오늘도 이불을 덮고 잔다. 나의 손을 꼭 잡아주는 내 가족의 손은 무엇인가? 아직 삶이 남았다면 바늘의 곡선은 기꺼이 예우해야겠지!
바늘을 삼킨 자는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흘러 다니는 바늘을 느끼면서 죽는다고 하는데
한밤에 가지고 놀다가 이불솜으로 들어가 버린 얇은 바늘의 근황 같은 것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끝내 이불 속으로 흘러간 바늘을 찾지 못한 채 가족은 그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그 이불을 하나씩 떠나면서 다른 이불 안에 흘러 있는 무렵이 되었다
이불 안으로 꼬옥 들어간 바늘처럼 누워 있다고, 가족에게 근황 같은 것도 이야기하고 싶은 때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그 바늘을 아무도 찾지 못했다 생각하면 입이 안 떨어지는 가혹이 있다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알게 되면, 사인(死因)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궁녀들은 바늘을 삼키고 죽어야 했다는 옛 서적을 뒤적거리며
한 개의 문(門)에서 바늘로 흘러와 이불만 옮기고 살고 있는 생을, 한 개의 문(文)에서 나온 사인과 혼동하지 않기로 한다
이불 속에서 누군가 손을 꼭 쥐어 줄 때는 그게 누구의 손이라도 눈물이 난다 하나의 이불로만 일생을 살고 있는 삶으로 기꺼이 범람하는 바늘들의 곡선을 예우한다
鵲巢感想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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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목일 행사처럼 나는 매일 나무를 심었다 어두운 산 그림자 밑에 햇볕도 보지 못할 그런 나무를 어두운 땅에다가 옮겼다 날씨 꽤 흐린 날 나는 숲에 갔는데 정말 나무와 같은 나무를 보았다 아니 나무였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도 있었다 내가 우울할 때 구름 핀셋으로 숲에서 나무를 뽑기도 했다 정말 나는 나무를 뽑았다고 생각했다 나무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그 날카로운 사자의 발톱과 들소의 발굽과 곰 갈퀴 받으며 그렇게 있었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사족이 길었다. 여기서 바늘은 어떤 무엇을 제유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러니까 바늘과 같은 고통이나 어떤 비평, 또는 논설과 같은 것이다. 호! 여기서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안다. 무렵이라는 단어도 심오하다. 어떤 한 사건이 터질 시점이나 그즈음이다. 여기서 시, 한 행마다 해석하는 것보다는 그냥 크게 보아 넘기고자 한다.
시인이 쓴 시어를 보면 첫째 바늘이 있고 둘째 이불도 있다. 시 후반부에 들어서면 궁녀와 곡선 같은 것도 있다. 이러한 시어는 이 시를 읽는데 실마리다. 실을 푸는 데 있어 어떤 감은 있어도 그 무엇은 정확히 어떤 것이라고 얘기하면 웃기는 일이다.
나는 예전에 다산의 글을 읽은 적 있다. 다산은 당대에 석학이었다. 나보다는 정확히 200년 앞서 사신 선생이었다. 선생의 호가 ‘여유당’이었는데 선생은 우리가 익히 아는 다산이라 불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여유당이라는 호는 선생께서 직접 지은 거로 안다. 왜 여유당으로 지었을까?
뭐 이 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얘기 같아도 나는 횡설수설한다. 이불은 우리가 잠잘 때 덮는 어떤 피륙이다. 우리는 사회를 살면서 이 피륙 같은 것으로 스스로 보호하기도 하고 또 이 속에 함께 사는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심지어 이불 같은 이 비슷한 것에 의존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생각해 보라! 바늘이 이불에 들어갔다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로 발설하지도 못하고 또 함께 덮고 잘 수도 없는 그런 입장이라면, 심지어 이 바늘을 바늘이라 끔뻑 잊어버리고 내가 우리가 함께 덮고 잘 이불에 넣었다면, 나는 오늘도 이불을 덮고 잔다. 나의 손을 꼭 잡아주는 내 가족의 손은 무엇인가? 아직 삶이 남았다면 바늘의 곡선은 기꺼이 예우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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