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생 / 이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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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663회 작성일 17-01-27 00:05본문
묘생 / 이용한
고양이는 깊다, 라고 써야 하는 밤은 온다
짐승에겐 연민이 없으므로 때때로 서쪽에서 부는 한 마리의 방랑을 약하게 읽어 본다 언제나 옳다는 노랑둥이의 진리는 이미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나에게 남은 건 등이 휜 저녁과 길게 우는 일요일이다 골목에 적힌 소변금지가 대변하는 것은 갸륵한 분별력이다 이를테면 너의 심층을 걸어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짧은 꼬리를 덧붙이는 것 모든 고양이의 세습이 고독한 영역을 관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을 묘생이라 불러도 좋다 지붕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배경은 배후로써만 최후다 어떤 역할은 파랗게 녹슬어서 늙은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린다 단지 잊기 위해 너는 꼬리를 쓰다듬는다 거참 묘한 일이다 상처가 깊을수록 아프지 않다는 건, 바퀴에 뭉개진 묘생을 바람에 부쳐본들 기억은 점점 창과 구름 사이에서 쓸모없어질 것이다 문득
고양이별에는 분노가 없다고 믿어보는 겨울이다
鵲巢感想文
시는 냄비 받침대다. 라면 한 젓가락은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뜨거운 라면을 먹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침에 쓰레기가 내리고, 차는 하얀 눈 밭길 달리고, 방금 따랐던 커피는 식어가는 마당, 나는 입술이 데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한달음에 이 커피를 마셨다. 오늘은 묘생을 본다. 전에는 미생을 보았다만,
첫 문장을 보면, 고양이는 깊다고 써야 하는 밤은 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묘생卯生은 묘생이 아니라 묘생猫生이다. 고양이는 깊다는 문장에서 어찌 고양이는 깊겠는가마는 동사의 깊다를 보았을 때 고양이는 제유한 시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문장이다. 고양이 같은 문장은 깊다고 표현한 것이다. 고양이와 문장과의 중첩이다.
짐승에겐 연민이 없으므로 때때로 서쪽에서 부는 한 마리의 방랑을 약하게 읽어 본다. 글은 연민으로 보는 것이 아니므로 이미 문턱을 넘은 개미가 된다. 서쪽에서 부는 한 마리의 방랑은, 해는 항상 동쪽에서 솟아오르니 글 읽는 화자는 동쪽이 된다. 화자의 마음과 이미 등단한 시인의 글과 여기서 고양이와의 이미지 중첩을 노린 글쓰기다.
언제나 옳다는 노랑둥이의 진리는 이미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여기서 노랑둥이는 고양이에서 짐승으로 짐승에서 노랑둥이로 화자의 시에 대한 친근감이다. 화자가 읽는 시는 인쇄가 되었으니까 비문이다. 그러니 무지개다리를 건넨 셈이다. 나에게 남은 건 등이 휜 저녁과 길게 우는 일요일이다. 책은 고양이로 제유하였으니 펼치면 등이 휘어진 것이고 때는 저녁이다. 길게 우는 일요일이라 일요일에 아주 오랫동안 고양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골목에 적힌 소변 금지가 대변하는 것은 갸륵한 분별이다. 갸륵하다는 말은 착하고 장하다, 딱하고 가련하다는 뜻이 있다. 책을 보는 행위는 이 두 가지 뜻을 모두 지녔다. 책을 보는 행위는 소변 금지가 되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시인은 더는 말은 안 했지만, 대변 금지도 되는 것이므로 읽기 몰입을 은유한다.
이를테면 너의 심층을 걸어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짧은 꼬리를 덧붙이는 것 모든 고양이의 세습이 고독한 영역을 관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을 묘생이라 불러도 좋다. 계단과 관장이라는 시어가 보인다. 고양이와 묘한 이미지 중첩을 노린 시적 장치로, 독서의 진보와 시의 보수다. 다만 그것을 묘생이라 불러도 좋다. 다만 그것을 시라고 불러도 좋다.
지붕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배경은 배후로써만 최후다 어떤 역할은 파랗게 녹슬어서 늙은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린다 단지 잊기 위해 너는 꼬리를 쓰다듬는다. 이는 화자의 소변적 행위를 묘사한다. 좀 시원히 내뱉을 수 있는 오줌발 같은 것은 아직 못됨으로 녹슬었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고, 꼬리를 쓰다듬는 행위는 부드러운 길을 찾기 위한 화자의 심적 묘사다.
거참 묘한 일이다 상처가 깊을수록 아프지 않다는 건, 바퀴에 뭉개진 묘생을 바람에 부쳐본들 기억은 점점 창과 구름 사이에서 쓸모없어질 것이다. 시 독해의 몰입과 그 결과로 인한 시 탄생을 묘사한다. 이 과정에 바퀴에 뭉개진 묘생(시)은 자연히 쓸모가 없어진다. 어쩌면, 내가 적는 이 감상문 또한 시 ‘묘생’을 나의 바퀴에 뭉개고 지나는 행위다.
문득, 고양이별에는 분노가 없다고 믿어보는 겨울이다. 문득, 등단의 세계에서는 분노가 없다. 이미 천 개의 눈을 가졌으므로 독자의 눈은 별의 이전移轉으로 갈망하므로 오늘도 이 밤은 고양이를 끌어안으며 고독한 영역을 관장하는지도 모른다. 이 시 문장에서는 겨울이라 했지만, 거울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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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이용한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실천문학> 등단
고양이는 깊다, 라고 써야 하는 밤은 온다
짐승에겐 연민이 없으므로 때때로 서쪽에서 부는 한 마리의 방랑을 약하게 읽어 본다 언제나 옳다는 노랑둥이의 진리는 이미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나에게 남은 건 등이 휜 저녁과 길게 우는 일요일이다 골목에 적힌 소변금지가 대변하는 것은 갸륵한 분별력이다 이를테면 너의 심층을 걸어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짧은 꼬리를 덧붙이는 것 모든 고양이의 세습이 고독한 영역을 관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을 묘생이라 불러도 좋다 지붕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배경은 배후로써만 최후다 어떤 역할은 파랗게 녹슬어서 늙은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린다 단지 잊기 위해 너는 꼬리를 쓰다듬는다 거참 묘한 일이다 상처가 깊을수록 아프지 않다는 건, 바퀴에 뭉개진 묘생을 바람에 부쳐본들 기억은 점점 창과 구름 사이에서 쓸모없어질 것이다 문득
고양이별에는 분노가 없다고 믿어보는 겨울이다
鵲巢感想文
시는 냄비 받침대다. 라면 한 젓가락은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뜨거운 라면을 먹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침에 쓰레기가 내리고, 차는 하얀 눈 밭길 달리고, 방금 따랐던 커피는 식어가는 마당, 나는 입술이 데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한달음에 이 커피를 마셨다. 오늘은 묘생을 본다. 전에는 미생을 보았다만,
첫 문장을 보면, 고양이는 깊다고 써야 하는 밤은 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묘생卯生은 묘생이 아니라 묘생猫生이다. 고양이는 깊다는 문장에서 어찌 고양이는 깊겠는가마는 동사의 깊다를 보았을 때 고양이는 제유한 시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문장이다. 고양이 같은 문장은 깊다고 표현한 것이다. 고양이와 문장과의 중첩이다.
짐승에겐 연민이 없으므로 때때로 서쪽에서 부는 한 마리의 방랑을 약하게 읽어 본다. 글은 연민으로 보는 것이 아니므로 이미 문턱을 넘은 개미가 된다. 서쪽에서 부는 한 마리의 방랑은, 해는 항상 동쪽에서 솟아오르니 글 읽는 화자는 동쪽이 된다. 화자의 마음과 이미 등단한 시인의 글과 여기서 고양이와의 이미지 중첩을 노린 글쓰기다.
언제나 옳다는 노랑둥이의 진리는 이미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여기서 노랑둥이는 고양이에서 짐승으로 짐승에서 노랑둥이로 화자의 시에 대한 친근감이다. 화자가 읽는 시는 인쇄가 되었으니까 비문이다. 그러니 무지개다리를 건넨 셈이다. 나에게 남은 건 등이 휜 저녁과 길게 우는 일요일이다. 책은 고양이로 제유하였으니 펼치면 등이 휘어진 것이고 때는 저녁이다. 길게 우는 일요일이라 일요일에 아주 오랫동안 고양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골목에 적힌 소변 금지가 대변하는 것은 갸륵한 분별이다. 갸륵하다는 말은 착하고 장하다, 딱하고 가련하다는 뜻이 있다. 책을 보는 행위는 이 두 가지 뜻을 모두 지녔다. 책을 보는 행위는 소변 금지가 되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시인은 더는 말은 안 했지만, 대변 금지도 되는 것이므로 읽기 몰입을 은유한다.
이를테면 너의 심층을 걸어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짧은 꼬리를 덧붙이는 것 모든 고양이의 세습이 고독한 영역을 관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을 묘생이라 불러도 좋다. 계단과 관장이라는 시어가 보인다. 고양이와 묘한 이미지 중첩을 노린 시적 장치로, 독서의 진보와 시의 보수다. 다만 그것을 묘생이라 불러도 좋다. 다만 그것을 시라고 불러도 좋다.
지붕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배경은 배후로써만 최후다 어떤 역할은 파랗게 녹슬어서 늙은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린다 단지 잊기 위해 너는 꼬리를 쓰다듬는다. 이는 화자의 소변적 행위를 묘사한다. 좀 시원히 내뱉을 수 있는 오줌발 같은 것은 아직 못됨으로 녹슬었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고, 꼬리를 쓰다듬는 행위는 부드러운 길을 찾기 위한 화자의 심적 묘사다.
거참 묘한 일이다 상처가 깊을수록 아프지 않다는 건, 바퀴에 뭉개진 묘생을 바람에 부쳐본들 기억은 점점 창과 구름 사이에서 쓸모없어질 것이다. 시 독해의 몰입과 그 결과로 인한 시 탄생을 묘사한다. 이 과정에 바퀴에 뭉개진 묘생(시)은 자연히 쓸모가 없어진다. 어쩌면, 내가 적는 이 감상문 또한 시 ‘묘생’을 나의 바퀴에 뭉개고 지나는 행위다.
문득, 고양이별에는 분노가 없다고 믿어보는 겨울이다. 문득, 등단의 세계에서는 분노가 없다. 이미 천 개의 눈을 가졌으므로 독자의 눈은 별의 이전移轉으로 갈망하므로 오늘도 이 밤은 고양이를 끌어안으며 고독한 영역을 관장하는지도 모른다. 이 시 문장에서는 겨울이라 했지만, 거울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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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이용한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실천문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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