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그늘 / 최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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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734회 작성일 17-02-02 00:11본문
이상한 그늘 / 최호일
양산을 쓴 여자가 그늘을 끌고 간다 발로 배를 걷어 차버린 강아지처럼 따라 간다
그늘은 말이 없고 성실하다
양산을 썼기 때문에 태양에 가장 가깝게 걸어간 그늘 같다 뜨겁고 무덥고 무겁고 다리가 있어 오래된 뼈와 살로 만들어진 그늘 같다
천변에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침을 뱉듯 꽃이 피었다 꽃은 참을성이 없고 당신은 태연하다 나무 계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 변두리 자장면을 먹으러 오르는 사람은 무겁다
저녁이 오는 쪽으로 사람들은 죽고
여우가 여러 번 울어서 밤이 오면, 아무도 그것이 어둠을 열고 사라진 검고 이상한 사람인 줄 모른다 그늘이 조금씩 먹어치우고 있다는 것을
鵲巢感想文
시를 읽을 때는 늘 아득한 시간이 흐른다. 어쩌면 자아를 부정할 때, 시는 점점 밝아 오르기도 한다. 시제가 ‘이상한 그늘’이다. 그늘은 이 시에서 중요한 시어다. 그늘의 처지로 이 시를 본다면 거울에 비친 여러 사람의 모습과 자아를 담지만, 이는 또 다른 세계로 가는 열쇠가 된다.
양산을 쓴 여자가 그늘을 끌고 간다. 그늘은 어떤 무형의 형질을 갖고 있으나 굳이 나타내고자 하면 굳은 형질로 인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그늘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산을 쓴 여자가 그늘을 끌고 간다고 표현했지만, 실은 그늘에 푹 빠져 있는 여자나 다름없다. 그늘은 말이 없고 무표정하며 어떤 색깔도 지니지 않았다. 그저 성실하다. 이 성실하다는 표현도 그늘을 알고 접근한 사람을 묘사한다. 그늘은 늘 그 자리에 있는 존재기 때문이다. 이때 그늘은 타인의 그늘이다.
그러면 나르시시즘의 그늘로 보자. 양산을 쓴 여자는 태양을 가린 존재다. 양산은 태양을 전도 받는 어떤 도구다. 자아를 그린 그늘은 태양을 바라본다. 이쪽을 보나 저쪽을 보나 그늘은 그늘이다.
시인은 발로 배를 걷어 차버린 강아지처럼 따라간다고 했다. 발로 배를 걷어 차버릴 정도로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그늘이며 그렇다 하더라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처럼 하나쯤 가지고 싶은 것이 그늘이다.
시인은 가정을 내세웠다. 양산을 썼기 때문에 태양에 가장 가깝게 걸어간 그늘 같다며, 그러니까 그늘과 양산의 대립구도다. 하지만 양산은 그늘에 못 미친다. 조족지혈이다. 이들 모두는 태양을 그리워하는 존재다. 그러니까 아직 양산은 그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늘 같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양산은 태양을 향한 열정만큼은 높다. 뜨겁고 무덥고 무겁고 다리가 있어 오래된 뼈와 살로 만들어 간다.
천변에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침을 뱉듯 꽃이 피었다. 천변은 천변川邊인 것 같아도 천변千變이다. 여러 가지로 변하는 존재자이자 그 천변天邊이다. 지나가는 사람은 태양이 변이한 시어로 보면 좋겠다. 침을 뱉듯 꽃이 핀 것은 어쩌면 성급한 성사成事를 묘사한다. 너무 이른 개화는 참을성이 없다. 누구나 보란 듯이 핀 것이지만 꽃이라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당신은 태연하다. 여기서 당신은 시인이다. 시인은 양산 쓴 여자를 바라보며 이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양산 쓴 여자는 그럴싸한 어떤 인품을 지녔다. 어떤 적정선에 못 미치는 인격자라 보면 좋겠다.
나무 계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 변두리 자장면을 먹으러 오르는 사람은 무겁다. 이 문장의 주어부는 자장면을 먹으러 오르는 사람이다. 자장면의 형태를 보자. 까맣다. 시를 제유한 시어임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늘의 일종이며 그늘에 가까운 것이다. 사람은 나무 계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시적 단계로 미완성의 길을 애써 오르는 심적 묘사다. 그러니 무겁다.
저녁이 오는 쪽으로 사람들은 죽었다. 저녁이 가는 쪽이 아니라 저녁이 오는 쪽임을 주목하자. 저녁이라는 시간과 저녁의 성질을 중첩적으로 그렸다. 저녁은 그늘보다 더 넓은 세계다. 저녁을 단지 저녁으로 보면 좋지 않다. 저녁은 하나의 세계다. 사람들은 죽었다고 표현했지만, 저녁을 좋아하는 즉 그늘을 이상향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여우가 여러 번 울어서 밤이 오면, 아무도 그것이 어둠을 열고 사라진 검고 이상한 사람인 줄 모른다. 여우가 여러 번 울었다는 것은 시 해체를 말한다. 어둠을 열고 사라진 검고 이상한 사람인 줄 모른다는 말은 시적 교감과 이해다. 이로써 시의 전이다. 그늘이 조금씩 먹어치우고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하면 시에 매료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직접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문자나 말로 전해 듣는 것보다 실물을 한 번 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시의 이론서를 수십 권 읽는 다고 하여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기본적인 바탕은 이루어야 하지만, 평상시 詩眼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시제 ‘이상한 그늘’을 보자. 첫 문장은 양산을 쓴 여자가 그늘을 끌고 간다. 물론 시인은 양산을 쓴 여자를 보았다. 이 여자와 어떤 우여곡절이 있어도 좋고 아니어도 괜찮다. 시적인 착상과 글쓰기는 거울을 들여다보듯 거울의 눈 같은 어떤 맵시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양산을 쓴 여자와 그늘은 대치되는 점이 있고 음과 양의 극을 이루니 시 쓰기의 좋은 출발점을 이루었다.
어떤 이론을 알고 나서 실천에 옮기려는 사람은 때로는 좋은 기회를 놓치거나, 빠른 방법을 버리고 많은 시간을 소모하기도 한다. 한비자韓非子는 이런 사람은 신발 가게 앞에서 자기 발 크기를 재, 그 본을 가지러 집으로 되돌아가는 사람과 같다고 했다. 자기 발을 직접 재면 그보다 정확한 치수가 없는데도 발을 그린 본을 가지러 가는 것은 현실現實보다 이론理論이나 문자文字에 의존하는 습관에 푹 젖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한 실학자는 ‘그림같이 아름답다’는 말은 잘못된 비유라고 지적하였다. 그림은 실물을 본뜬 것인데, 실물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실제와 실리를 중시한 실학자들의 생각이 사물을 보는 데도 철저히 나타난 사례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내 옆에는 까만 암코양이 한 마리와 하얀 수고양이 한 마리 함께 누웠다. 광목 같은 천, 위에 누웠다. 두 발을 움켜쥐고 두 눈을 부릅뜨고 얼음장 같은 물이 지날 때면 때 묻은 털이 씻겨 나갔다.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일이었다. 두 발과 두 손을 핥고 또 핥았다. 무지갯빛 다리에 나비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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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최호일 충남 서천 출생 2009년 <현대시학> 등단
양산을 쓴 여자가 그늘을 끌고 간다 발로 배를 걷어 차버린 강아지처럼 따라 간다
그늘은 말이 없고 성실하다
양산을 썼기 때문에 태양에 가장 가깝게 걸어간 그늘 같다 뜨겁고 무덥고 무겁고 다리가 있어 오래된 뼈와 살로 만들어진 그늘 같다
천변에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침을 뱉듯 꽃이 피었다 꽃은 참을성이 없고 당신은 태연하다 나무 계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 변두리 자장면을 먹으러 오르는 사람은 무겁다
저녁이 오는 쪽으로 사람들은 죽고
여우가 여러 번 울어서 밤이 오면, 아무도 그것이 어둠을 열고 사라진 검고 이상한 사람인 줄 모른다 그늘이 조금씩 먹어치우고 있다는 것을
鵲巢感想文
시를 읽을 때는 늘 아득한 시간이 흐른다. 어쩌면 자아를 부정할 때, 시는 점점 밝아 오르기도 한다. 시제가 ‘이상한 그늘’이다. 그늘은 이 시에서 중요한 시어다. 그늘의 처지로 이 시를 본다면 거울에 비친 여러 사람의 모습과 자아를 담지만, 이는 또 다른 세계로 가는 열쇠가 된다.
양산을 쓴 여자가 그늘을 끌고 간다. 그늘은 어떤 무형의 형질을 갖고 있으나 굳이 나타내고자 하면 굳은 형질로 인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그늘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산을 쓴 여자가 그늘을 끌고 간다고 표현했지만, 실은 그늘에 푹 빠져 있는 여자나 다름없다. 그늘은 말이 없고 무표정하며 어떤 색깔도 지니지 않았다. 그저 성실하다. 이 성실하다는 표현도 그늘을 알고 접근한 사람을 묘사한다. 그늘은 늘 그 자리에 있는 존재기 때문이다. 이때 그늘은 타인의 그늘이다.
그러면 나르시시즘의 그늘로 보자. 양산을 쓴 여자는 태양을 가린 존재다. 양산은 태양을 전도 받는 어떤 도구다. 자아를 그린 그늘은 태양을 바라본다. 이쪽을 보나 저쪽을 보나 그늘은 그늘이다.
시인은 발로 배를 걷어 차버린 강아지처럼 따라간다고 했다. 발로 배를 걷어 차버릴 정도로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그늘이며 그렇다 하더라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처럼 하나쯤 가지고 싶은 것이 그늘이다.
시인은 가정을 내세웠다. 양산을 썼기 때문에 태양에 가장 가깝게 걸어간 그늘 같다며, 그러니까 그늘과 양산의 대립구도다. 하지만 양산은 그늘에 못 미친다. 조족지혈이다. 이들 모두는 태양을 그리워하는 존재다. 그러니까 아직 양산은 그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늘 같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양산은 태양을 향한 열정만큼은 높다. 뜨겁고 무덥고 무겁고 다리가 있어 오래된 뼈와 살로 만들어 간다.
천변에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침을 뱉듯 꽃이 피었다. 천변은 천변川邊인 것 같아도 천변千變이다. 여러 가지로 변하는 존재자이자 그 천변天邊이다. 지나가는 사람은 태양이 변이한 시어로 보면 좋겠다. 침을 뱉듯 꽃이 핀 것은 어쩌면 성급한 성사成事를 묘사한다. 너무 이른 개화는 참을성이 없다. 누구나 보란 듯이 핀 것이지만 꽃이라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당신은 태연하다. 여기서 당신은 시인이다. 시인은 양산 쓴 여자를 바라보며 이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양산 쓴 여자는 그럴싸한 어떤 인품을 지녔다. 어떤 적정선에 못 미치는 인격자라 보면 좋겠다.
나무 계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 변두리 자장면을 먹으러 오르는 사람은 무겁다. 이 문장의 주어부는 자장면을 먹으러 오르는 사람이다. 자장면의 형태를 보자. 까맣다. 시를 제유한 시어임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늘의 일종이며 그늘에 가까운 것이다. 사람은 나무 계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시적 단계로 미완성의 길을 애써 오르는 심적 묘사다. 그러니 무겁다.
저녁이 오는 쪽으로 사람들은 죽었다. 저녁이 가는 쪽이 아니라 저녁이 오는 쪽임을 주목하자. 저녁이라는 시간과 저녁의 성질을 중첩적으로 그렸다. 저녁은 그늘보다 더 넓은 세계다. 저녁을 단지 저녁으로 보면 좋지 않다. 저녁은 하나의 세계다. 사람들은 죽었다고 표현했지만, 저녁을 좋아하는 즉 그늘을 이상향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여우가 여러 번 울어서 밤이 오면, 아무도 그것이 어둠을 열고 사라진 검고 이상한 사람인 줄 모른다. 여우가 여러 번 울었다는 것은 시 해체를 말한다. 어둠을 열고 사라진 검고 이상한 사람인 줄 모른다는 말은 시적 교감과 이해다. 이로써 시의 전이다. 그늘이 조금씩 먹어치우고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하면 시에 매료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직접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문자나 말로 전해 듣는 것보다 실물을 한 번 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시의 이론서를 수십 권 읽는 다고 하여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기본적인 바탕은 이루어야 하지만, 평상시 詩眼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시제 ‘이상한 그늘’을 보자. 첫 문장은 양산을 쓴 여자가 그늘을 끌고 간다. 물론 시인은 양산을 쓴 여자를 보았다. 이 여자와 어떤 우여곡절이 있어도 좋고 아니어도 괜찮다. 시적인 착상과 글쓰기는 거울을 들여다보듯 거울의 눈 같은 어떤 맵시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양산을 쓴 여자와 그늘은 대치되는 점이 있고 음과 양의 극을 이루니 시 쓰기의 좋은 출발점을 이루었다.
어떤 이론을 알고 나서 실천에 옮기려는 사람은 때로는 좋은 기회를 놓치거나, 빠른 방법을 버리고 많은 시간을 소모하기도 한다. 한비자韓非子는 이런 사람은 신발 가게 앞에서 자기 발 크기를 재, 그 본을 가지러 집으로 되돌아가는 사람과 같다고 했다. 자기 발을 직접 재면 그보다 정확한 치수가 없는데도 발을 그린 본을 가지러 가는 것은 현실現實보다 이론理論이나 문자文字에 의존하는 습관에 푹 젖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한 실학자는 ‘그림같이 아름답다’는 말은 잘못된 비유라고 지적하였다. 그림은 실물을 본뜬 것인데, 실물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실제와 실리를 중시한 실학자들의 생각이 사물을 보는 데도 철저히 나타난 사례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내 옆에는 까만 암코양이 한 마리와 하얀 수고양이 한 마리 함께 누웠다. 광목 같은 천, 위에 누웠다. 두 발을 움켜쥐고 두 눈을 부릅뜨고 얼음장 같은 물이 지날 때면 때 묻은 털이 씻겨 나갔다.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일이었다. 두 발과 두 손을 핥고 또 핥았다. 무지갯빛 다리에 나비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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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최호일 충남 서천 출생 2009년 <현대시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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