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 송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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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087회 작성일 17-02-18 00:08본문
만년필 / 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 본다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鵲巢感想文
필자와 시인과는 반 세대쯤 차이가 난다. 어릴 때였다. 만년필은 아버지 시대였다. 만년필 하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를 선물하는 것은 아주 귀한 값어치로 여겼다. 물론 필자는 만년필이 귀하다는 것만 알지, 실지 써 보지는 못했다. 하루는 모 기획사 사장으로부터 만년필 하나 선물 받은 적 있었다. 그리고 그 만년필은 어디로 갔는지 흐지부지 없어졌는데 하루는 대형 문구점에 들러, 진열장에 전시된 만년필을 보고 그 가격에 놀랐던 적이 있었다. 싼 것도 몇만 원이었고 비싼 거는 20만 원 가까이 하는 것도 보았기 때문이다. 요즘 만년필로 무엇을 쓰기에는 시대가 너무 진보하였다. 필기구의 혁명 아닌 혁명을 맞았다. 더구나 이제 무엇을 갖고 쓰는 것도 후진 시대가 되었다. 휴대전화기에 석석 그려서 날리는 시대다. 하지만, 가끔은 현대인도 백지에 무언가 쓰고 싶은 충동은 있으리라! 그럴 때면 만년필도 한 번 생각이 난다.
시인 송찬호 선생께서 쓰신 이 시는 만년필에 관한 기억 한 소절과 시를 낚고 싶은 욕망을 중첩적으로 그린 시다. 시 2연을 보면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는 말은 글쓰기를 표현한 묘사다. 광두정(대갈못)이라 함은 못대가리가 둥글넓적한 장식용 못이다. 술 취한 넥타이는 자아를 그린 시구다. 못처럼 앉아 이것저것 생각을 그렸다는 말이다.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것도 만년필에 얽힌 추억 한 소절이다. 시 4연을 보면,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라는 표현도 탁월하다. 실지,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도 해바라기 씨와 같은 까만 글을 보았으니까, 호! 보는 걸 너머 익혔으니 말이다. 시의 묘사는 이처럼 시인의 행위와 의지를 한꺼번에 담는다. 시 종연을 보면, 이 시의 핵심을 볼 수 있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독자를 꽉 물을 수 있는 그런 시,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시, 늘 푸르게 태양(독자)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시 하나쯤은 시인이면 바라는 상일 게다.
만년필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 ‘2016 올해의 영화’로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 선정됐다는 신문을 읽은 적 있다. 영화 ‘밀정’의 송강호와 ‘덕혜옹주’의 손예진은 각각 올해의 남녀 주연상을 받았다. 영화 ‘밀정’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로 나선 신분과 정체성 혼돈에 따른 캐릭터를 묘사한다. 주연배우를 맡은 송강호다. 중요한 것은 ‘올해의 영화상’ 시상식에 모든 수상자는 파카 만년필을 부상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파카 만년필 가격은 싼 거는 몇만 원에서 비싼 거는 5백만 원 가까이 한 것도 있다. 좀 괜찮다 싶은 것은 4, 5십만 원 호가한다. 괜히 만년필 한 자루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볼펜 한 자루만 있어도 감지덕지다. 하루 커피 판매에 매진하는 필자다. 만년필은 대학교수나 식자에게 어울리는 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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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송찬호 1959년 충북 보은 출생 1987년 <우리시대의 문학>6호로 등단,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 본다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鵲巢感想文
필자와 시인과는 반 세대쯤 차이가 난다. 어릴 때였다. 만년필은 아버지 시대였다. 만년필 하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를 선물하는 것은 아주 귀한 값어치로 여겼다. 물론 필자는 만년필이 귀하다는 것만 알지, 실지 써 보지는 못했다. 하루는 모 기획사 사장으로부터 만년필 하나 선물 받은 적 있었다. 그리고 그 만년필은 어디로 갔는지 흐지부지 없어졌는데 하루는 대형 문구점에 들러, 진열장에 전시된 만년필을 보고 그 가격에 놀랐던 적이 있었다. 싼 것도 몇만 원이었고 비싼 거는 20만 원 가까이 하는 것도 보았기 때문이다. 요즘 만년필로 무엇을 쓰기에는 시대가 너무 진보하였다. 필기구의 혁명 아닌 혁명을 맞았다. 더구나 이제 무엇을 갖고 쓰는 것도 후진 시대가 되었다. 휴대전화기에 석석 그려서 날리는 시대다. 하지만, 가끔은 현대인도 백지에 무언가 쓰고 싶은 충동은 있으리라! 그럴 때면 만년필도 한 번 생각이 난다.
시인 송찬호 선생께서 쓰신 이 시는 만년필에 관한 기억 한 소절과 시를 낚고 싶은 욕망을 중첩적으로 그린 시다. 시 2연을 보면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는 말은 글쓰기를 표현한 묘사다. 광두정(대갈못)이라 함은 못대가리가 둥글넓적한 장식용 못이다. 술 취한 넥타이는 자아를 그린 시구다. 못처럼 앉아 이것저것 생각을 그렸다는 말이다.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것도 만년필에 얽힌 추억 한 소절이다. 시 4연을 보면,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라는 표현도 탁월하다. 실지,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도 해바라기 씨와 같은 까만 글을 보았으니까, 호! 보는 걸 너머 익혔으니 말이다. 시의 묘사는 이처럼 시인의 행위와 의지를 한꺼번에 담는다. 시 종연을 보면, 이 시의 핵심을 볼 수 있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독자를 꽉 물을 수 있는 그런 시,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시, 늘 푸르게 태양(독자)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시 하나쯤은 시인이면 바라는 상일 게다.
만년필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 ‘2016 올해의 영화’로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 선정됐다는 신문을 읽은 적 있다. 영화 ‘밀정’의 송강호와 ‘덕혜옹주’의 손예진은 각각 올해의 남녀 주연상을 받았다. 영화 ‘밀정’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로 나선 신분과 정체성 혼돈에 따른 캐릭터를 묘사한다. 주연배우를 맡은 송강호다. 중요한 것은 ‘올해의 영화상’ 시상식에 모든 수상자는 파카 만년필을 부상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파카 만년필 가격은 싼 거는 몇만 원에서 비싼 거는 5백만 원 가까이 한 것도 있다. 좀 괜찮다 싶은 것은 4, 5십만 원 호가한다. 괜히 만년필 한 자루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볼펜 한 자루만 있어도 감지덕지다. 하루 커피 판매에 매진하는 필자다. 만년필은 대학교수나 식자에게 어울리는 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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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송찬호 1959년 충북 보은 출생 1987년 <우리시대의 문학>6호로 등단,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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