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자 / 윤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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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980회 작성일 17-06-13 03:46본문
거꾸로 가자
윤재철
짧게 가자
빠르게 가자
무의미하게 가자
그녀는 잊기 위해 드라마로 간다
그녀는 알레고리에 익숙하다
판타지에 익숙하다
리얼리즘은 천박해
부담스러워
상징적으로 가자
모자 쓰고 가자
가리마도 가리고
바로 클라이맥스로 간다
한일강제합병은 모른다
진주가 어디 붙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익숙하고
온갖 암호와 예측에 충분히 익숙하다
나는 거꾸로 가자
예측 불가능하게 가자
벌거벗은 몸뚱이로 가자
저 강변 항하사 같은 금모래밭
남풍에 반짝이며 팔랑이는 미루나무 이파리
그 오르가슴을 나는 잊지 못한다
『거꾸로 가자』(제6회 오장환 문학상) 수상 시집에서.
윤재철
1953년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2년 ‘오월시’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5년 성동고 재직 시절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소설가 송기원, 시인 김진경 등과 함께 투옥, 해직되었다. 교직을 잃어버린 시인은 그때부터 전교조 창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던 중 복직되어 다시 교단에 섰다.
1987년 첫시집 〈아메리카 들소〉를 펴냈다.
1996년 제14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다.
2015년 2월 정년으로 교직에서 물러났다.
시집
1987년 〈아메리카들소〉(청사)
1992년 〈그래 우리가 만난다면〉 (창비)
1995년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실천문학사)
2000년 〈오래된집〉 (내일을여는책)
2004년 〈세상에 새로 온 꽃〉 (창비)
2007년 〈능소화〉 (솔)
♧ 노트.
윤재철 시인은 고교 은사다. 삼학년 땐 고전을 가르쳤다. 솔직히 수업은 섬세했으나 너무 과묵했으므로 좀 지루해서 고전했다. 그때 선생님이 삼십 대였는데, 연필로 쓴 시 등 참 부드러운 시를 썼다. 시를 마치 물붓으로 적은 듯했는데 모습 또한 정적이어서 시인은 저런 모습일 것이다 생각했다. 문예반 담당이셨지만, 이렇고 저렇고 말씀이 없으시고 그냥 알아서 놀아라, 그런 식이었다. 성격이 식물성이라서 목소리 또한 높은음자리가 없었다. 젊은 선생이었으나 인자하셨다. 내가 졸업 후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해직되었다. 졸업생 중심으로 복권운동도 시도했지만, 전두환 정권 때여서 달걀로 바위 치기였는데, 공항동 밀실에 모여 남미의 이념서적이나 페다고지 등을 읽으며 토론하고 피도 쓰고 했었다. 참교육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으나, 국가의 보답은 남영동 지하실로 끌고 가 고문한 게 고작이었다. 고문을 당했으나 가장 부드러운 민중시를 쓴 분은 아닌가도 싶다. 행동하는 지성이고 시인이었으나 한없이 소박하고 인자한 그야말로 참 선생이었다. 선생의 시는 한 문장도 어려운 게 없다. 그러나 시를 읽으면 참 오붓하고 달다. 몸은 혁명가였으나, 시는 가장 낮은 데로 향한 눈빛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은사 중 한 분이시다.
나는 시 쓰는 기술자가 될까 두렵다. - 활.
윤재철
짧게 가자
빠르게 가자
무의미하게 가자
그녀는 잊기 위해 드라마로 간다
그녀는 알레고리에 익숙하다
판타지에 익숙하다
리얼리즘은 천박해
부담스러워
상징적으로 가자
모자 쓰고 가자
가리마도 가리고
바로 클라이맥스로 간다
한일강제합병은 모른다
진주가 어디 붙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익숙하고
온갖 암호와 예측에 충분히 익숙하다
나는 거꾸로 가자
예측 불가능하게 가자
벌거벗은 몸뚱이로 가자
저 강변 항하사 같은 금모래밭
남풍에 반짝이며 팔랑이는 미루나무 이파리
그 오르가슴을 나는 잊지 못한다
『거꾸로 가자』(제6회 오장환 문학상) 수상 시집에서.
윤재철
1953년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2년 ‘오월시’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5년 성동고 재직 시절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소설가 송기원, 시인 김진경 등과 함께 투옥, 해직되었다. 교직을 잃어버린 시인은 그때부터 전교조 창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던 중 복직되어 다시 교단에 섰다.
1987년 첫시집 〈아메리카 들소〉를 펴냈다.
1996년 제14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다.
2015년 2월 정년으로 교직에서 물러났다.
시집
1987년 〈아메리카들소〉(청사)
1992년 〈그래 우리가 만난다면〉 (창비)
1995년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실천문학사)
2000년 〈오래된집〉 (내일을여는책)
2004년 〈세상에 새로 온 꽃〉 (창비)
2007년 〈능소화〉 (솔)
♧ 노트.
윤재철 시인은 고교 은사다. 삼학년 땐 고전을 가르쳤다. 솔직히 수업은 섬세했으나 너무 과묵했으므로 좀 지루해서 고전했다. 그때 선생님이 삼십 대였는데, 연필로 쓴 시 등 참 부드러운 시를 썼다. 시를 마치 물붓으로 적은 듯했는데 모습 또한 정적이어서 시인은 저런 모습일 것이다 생각했다. 문예반 담당이셨지만, 이렇고 저렇고 말씀이 없으시고 그냥 알아서 놀아라, 그런 식이었다. 성격이 식물성이라서 목소리 또한 높은음자리가 없었다. 젊은 선생이었으나 인자하셨다. 내가 졸업 후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해직되었다. 졸업생 중심으로 복권운동도 시도했지만, 전두환 정권 때여서 달걀로 바위 치기였는데, 공항동 밀실에 모여 남미의 이념서적이나 페다고지 등을 읽으며 토론하고 피도 쓰고 했었다. 참교육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으나, 국가의 보답은 남영동 지하실로 끌고 가 고문한 게 고작이었다. 고문을 당했으나 가장 부드러운 민중시를 쓴 분은 아닌가도 싶다. 행동하는 지성이고 시인이었으나 한없이 소박하고 인자한 그야말로 참 선생이었다. 선생의 시는 한 문장도 어려운 게 없다. 그러나 시를 읽으면 참 오붓하고 달다. 몸은 혁명가였으나, 시는 가장 낮은 데로 향한 눈빛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은사 중 한 분이시다.
나는 시 쓰는 기술자가 될까 두렵다. -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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