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찜은 허기였다 / 박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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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721회 작성일 17-06-27 22:03본문
아구찜은 허기였다 / 박형권
마산의 아구찜 집은 모두 초가집이었다 초가집, 옛날 초가집, 원조 초가집, 원조옛날 초가집 등등 기와지붕을 올려놓고도 초가집이었다 아구가 흔하던 시절에는 어시장 공판장에 나가면 없는 사람도 돈 생각하지 않고 한 궤짝씩 샀다 아구 한 마리 사서 배를 열면 아구가 삼키고 소화 시키지 못한 물고기가 두세 마리는 들어 있었다 작은 물고기를 아구가 먹고 아구를 사람이 먹는 먹이사슬의 증거물이었다 친구 성호는 초가집의 막내아들 아구찜 얻어먹으러 자주 놀러 갔지만 친구 어머니는 아구찜은 안 주시고 웬 생선구이만 주셨다 아구 뱃속에 든 생선을 먹었으니 나도 저 심해의 한 마리 아구였었다 항상 어디가 비었다고 생각하는 심해의 허기였었다 초가삼간의 마루에 앉아 배가 아픈 것인지 배가 고픈 것인지, 내 몸이 이해되지 않는 몽롱한 허기였었다 지금은 세상과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쉰 여섯, 허기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鵲巢感想文
시인 박형권 선생은 1961년생이다. 필자보다 10년 앞선 인생의 선배다. 마산의 아귀찜 집이 모인 곳은 한때는 초가집이 많았다. 이름도 초가집 무엇무엇 하지만, 기와집이 대부분이라 시인은 진술한다. 6, 70년대는 초가집도 간혹 볼 수 있었다. 소싯적이었다. 동네는 초가집이 몇 채 있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초가집 지붕 개량하는 모습도 본 적 있었다. 지금은 이러한 모습도 없거니와 이런 얘기는 아득한 옛날이야기쯤으로 들린다.
시인은 바닷가가 고향이다. 아귀찜을 먹고 자랐으며 아귀가 먹은 생선을 구이 해서 먹고 자랐다. 이건 먹이사슬로 사회로 확장하여 확대 재해석해놓고 있다. 심해에 사는 아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아귀 같은 사회에 거칠고 힘들었던 세상을 이겨냈다. 장년기에 접어든 시인은 이 아귀 같은 세상은 졸업했음을 얘기한다.
그전에는 아귀가 먹은 고기를 먹어야 했다. 초가삼간 같은 삶에 주린 배는 몽롱한 허기만 있을 뿐이었다. 그 허기가 어쩌면 삶에 절박한 힘이었다.
먹이사슬 같은 세상사를 보면 현기증만 일어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그 어느 곳도 먹이사슬 같은 구조다. 얼마 전에 영화 ‘미스 슬로운’을 본 적 있다. 미국 총기규제 법안을 두고 그린 영화다. 모두 포기한 싸움에 자신의 신념을 갖고 거대 권력에 맞서 싸우는 미스 슬로운, 그녀는 세련되고 우아한 외모와 담대한 성격, 상대를 제압하는 언어 기술까지 갖춘 매력적인 로비스트다. 승리를 향한 강한 욕망과 집착,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집요함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승리욕에 주변 사람의 위험에 내 몰리게 되지만, 국가는 무엇인지, 먹이사슬과 같은 이해관계에 진정 국민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영화다. 물론 정치 얘기다.
서민이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속에 한 개인은 감정 따위는 무참히 묵살되기도 하며 어떤 이해관계의 틀에 짜 맞춰 가는 인간사 부품처럼 삶을 이룬다. 이러한 삶을 바탕으로 이룬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며, 안정된 상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민주정권을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민주정권 하에서도 먹이사슬의 이해관계는 우리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단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모든 일은 가치를 추구하되 공정하며 도덕적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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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권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2006년 ‘현대시학’에 시 ‘봄,봄’ 2013년 ‘한국안데르센상’에 장편동화 ‘메타세쿼이아 숲으로’가 당선되면서 글쓰기에만 전념한다.
시집 ‘가덕도 탕수구미 시거리 상향’
마산의 아구찜 집은 모두 초가집이었다 초가집, 옛날 초가집, 원조 초가집, 원조옛날 초가집 등등 기와지붕을 올려놓고도 초가집이었다 아구가 흔하던 시절에는 어시장 공판장에 나가면 없는 사람도 돈 생각하지 않고 한 궤짝씩 샀다 아구 한 마리 사서 배를 열면 아구가 삼키고 소화 시키지 못한 물고기가 두세 마리는 들어 있었다 작은 물고기를 아구가 먹고 아구를 사람이 먹는 먹이사슬의 증거물이었다 친구 성호는 초가집의 막내아들 아구찜 얻어먹으러 자주 놀러 갔지만 친구 어머니는 아구찜은 안 주시고 웬 생선구이만 주셨다 아구 뱃속에 든 생선을 먹었으니 나도 저 심해의 한 마리 아구였었다 항상 어디가 비었다고 생각하는 심해의 허기였었다 초가삼간의 마루에 앉아 배가 아픈 것인지 배가 고픈 것인지, 내 몸이 이해되지 않는 몽롱한 허기였었다 지금은 세상과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쉰 여섯, 허기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鵲巢感想文
시인 박형권 선생은 1961년생이다. 필자보다 10년 앞선 인생의 선배다. 마산의 아귀찜 집이 모인 곳은 한때는 초가집이 많았다. 이름도 초가집 무엇무엇 하지만, 기와집이 대부분이라 시인은 진술한다. 6, 70년대는 초가집도 간혹 볼 수 있었다. 소싯적이었다. 동네는 초가집이 몇 채 있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초가집 지붕 개량하는 모습도 본 적 있었다. 지금은 이러한 모습도 없거니와 이런 얘기는 아득한 옛날이야기쯤으로 들린다.
시인은 바닷가가 고향이다. 아귀찜을 먹고 자랐으며 아귀가 먹은 생선을 구이 해서 먹고 자랐다. 이건 먹이사슬로 사회로 확장하여 확대 재해석해놓고 있다. 심해에 사는 아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아귀 같은 사회에 거칠고 힘들었던 세상을 이겨냈다. 장년기에 접어든 시인은 이 아귀 같은 세상은 졸업했음을 얘기한다.
그전에는 아귀가 먹은 고기를 먹어야 했다. 초가삼간 같은 삶에 주린 배는 몽롱한 허기만 있을 뿐이었다. 그 허기가 어쩌면 삶에 절박한 힘이었다.
먹이사슬 같은 세상사를 보면 현기증만 일어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그 어느 곳도 먹이사슬 같은 구조다. 얼마 전에 영화 ‘미스 슬로운’을 본 적 있다. 미국 총기규제 법안을 두고 그린 영화다. 모두 포기한 싸움에 자신의 신념을 갖고 거대 권력에 맞서 싸우는 미스 슬로운, 그녀는 세련되고 우아한 외모와 담대한 성격, 상대를 제압하는 언어 기술까지 갖춘 매력적인 로비스트다. 승리를 향한 강한 욕망과 집착,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집요함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승리욕에 주변 사람의 위험에 내 몰리게 되지만, 국가는 무엇인지, 먹이사슬과 같은 이해관계에 진정 국민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영화다. 물론 정치 얘기다.
서민이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속에 한 개인은 감정 따위는 무참히 묵살되기도 하며 어떤 이해관계의 틀에 짜 맞춰 가는 인간사 부품처럼 삶을 이룬다. 이러한 삶을 바탕으로 이룬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며, 안정된 상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민주정권을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민주정권 하에서도 먹이사슬의 이해관계는 우리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단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모든 일은 가치를 추구하되 공정하며 도덕적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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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권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2006년 ‘현대시학’에 시 ‘봄,봄’ 2013년 ‘한국안데르센상’에 장편동화 ‘메타세쿼이아 숲으로’가 당선되면서 글쓰기에만 전념한다.
시집 ‘가덕도 탕수구미 시거리 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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