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화 / 진창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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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30회 작성일 18-08-19 04:29본문
목판화 / 진창윤
목판 위에 칼을 대면
마을에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골목 안쪽으로 흘러들어 고이는 풍경들은 늘 배경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의
문 따는 소리를 들으려면 손목에 힘을 빼야 한다
칼은 골목을 따라 가로등을 세우고 지붕 위에 기와를 덮고
용마루 위의 길고양이 걸음을 붙들고
담장에 막혀 크는 감나무의 가지를 펼쳐준다
나는 여자의 발소리와 아이의
소리 없는 울음을 나무에 새겨 넣기 위해
밤이 골목 끝에서 떼쓰며 우는 것도 잊어야 한다
불 꺼진 문 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여백은 언제나 적어서
칼이 지나간 움푹 팬 자리는 서럽고 아프다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드디어 깜깜한 하늘에 귀가 없는 별이 뜬다
여자는 퉁퉁 불은 이불을 아이의 턱밑까지 덮어주었다
내 칼이 닿지 않는 곳마다 눈이 내리고 있다
# 감상
이 詩는 "시마을, 문학과산책, 공모전 당선작" 싸이트에서 골랐다
201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서 독자의 마음을 참 즐겁게 한다
목판화를 조각하는 행위와 인간의 일상 생활이 어우러져서 한 편의
판화 속에 한 生의 삶이 녹아들고 있다
칼 끝을 따라 눈 내리는 마을 풍경이 사박사박 공감각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칼 끝은 골목 안쪽으로 스며들어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의 문 따는 소리를 만들고, 용마루 위의 길고양이 걸음을 붙들고,
담장에 막혀 크는 감나무 가지를 펼쳐준다는 기발한 발상과 참신한
이미지는 다른 쟝르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유의 아우라와 포에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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