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줄 /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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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23회 작성일 18-09-07 02:36본문
밧줄 / 정호승
깊은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에 고요히 매달려 있고 싶었으나
밤새도록 수평선 너머로
집어등을 밝히고 돌아온 고단한 오징어잡이 배를
선착장에 다정히 묶어 두고 싶었으나
시골 성당의 종탑에 매달려
새벽이 올 때까지 정성껏 종을 치고 싶었으나
나는 그만 서울구치소 사형집행장 밧줄이 되어
허공중에 천천히 고를 맨 채 내려간다
두 팔을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새벽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이라도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는 그의 목에 걸린다
결코 걸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쳐도
용수가 얼굴을 덮자 그의 목에 걸린다
잘 가세요
집행관이 귀에 대고 속삭이는 순간
마룻장이 탕 꺼지고
그의 인생이 대롱대롱 나에게 매달린다
* 정호승 : 1950년 경남 하동 출생, 1973년 <대한일보> 시, 1982년
<조선일보> 단편소설 등단, 시집 <서울의 예수> 외 다수
# 감상
누구나 한 평생을 잘먹고, 편하게, 즐겁게, 아름답게, 살고 싶은 데로
살기를 원하지만, 어디 인생이 그렇게 마음데로 되는 것인가!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생각하기도 싶지 않은, 남은 생에 대해 애타게
집착하는 사형수의 목에 걸려야 하는 이 밧줄과 같은 짓굿은 운명은
우리 인생사에서 흔히 있는 일인데,
이야기 하듯 술술 진행되는 내러티브 속에 눈 앞에서 일어나는듯 생생한
현장감은 화자의 필력 깊은 내공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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