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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잉크로 쓴 분홍문장 / 강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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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4회 작성일 18-11-26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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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잉크로 쓴 분홍문장 / 강미정

​부피를 가지지 않고도 묵직한 것들은 온다

해가 지고 저녁이 올 때,

병 깊은 여자가 옥상 난간에 앉아 석양을 바라볼 때

역광으로 빛나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옥상 계단을 오르던 남자가 멈추고 서서 지켜볼 때

둘 다 눈물 괸 눈빛일 때,

빛이 사라지면 윤곽이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당신이 사라지면 나는 나의 무엇이 사라지는가

가장 가까운 곳부터 모두 지우고 마지막 하나

검은 잉크로 쓴 분홍 문장을 당신이 보여줄 때

그 분홍 문장으로 반짝거렸던 내 말과

흥얼거리던 내 노래를 잃고 입술을 닫은 나에게도

뭔가를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 오고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시간이 다 지나가서

먼 곳이 지워지고 점점 가까운 곳도 지워져

검은 잉크로 썼던 분홍 문장에 엎지러진 먹물,

당신은 몇 겹의 무늬로 오는가

이 밤은 또 몇 겹의 무늬로 깊어지는가

지우고 싶지 않은 분홍 문장만 무한대로 열려

먹물을 먹인 붓을 들고 달빛이 분홍 문장을 탁본한다

* 강미정 : 1962년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타오르는 생>등 다수

< 감 상 >

​부피 없이도 묵직한 것은 해가 지고 저녁이 오므로 어둠일 것이고,

병 깊여자가 옥상 난간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난간을 오르던 남자가

역광의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어둠 같은 슬픔일 것이다

빛이 사라지면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처럼 당신이 죽으면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렸다​

당신과 다복 했던 지난날들이 하나 하나 지워지고 마지막 하나 검은 잉

쓴 분홍 문장만을 보여준다는 뜻은,

당신은 나에게서 나는 당신에게서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강한 情念의

불길이 몇 겹의 무늬로 활, 활, 타오르고 있다는 뜻 같기도 한데?

화자의 속내를  좀처럼 가름하기는  어려우나, 네러티브의 흐름이 황금 잉어

유영하는 모습처럼 웅깊고 화려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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