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시대 / 김경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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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79회 작성일 18-12-19 00:05본문
⋁.
사냥이 시작된다, 바람 한 점 없는 밤, 발자국 하나 없는 백지, 사냥이 시작된다, 검은 화살 꽂히는 곳, 이미 썩은 짐승, 이미 추락한 새, 창이 박힌 곳, 지난밤의 폐허, 그러나 눈먼 사냥꾼, 숨을 멎고 백지 위, 내달린다, 붉은 먼지 속 검은 말 발굽들, 내가 젖은 갈기를 잡았지, 혹은, 불끈 솟은 목덜미 정맥, 그 울부짖음을 잡았어, 그런 말들, 잡고 싶을수록 허옇게 부서져버리는 말들, 고함지를수록 텅 비어가는 백지, 사냥이 시작된다, 칼을 휘두르며 달리고 또 달린다, 눈먼 사냥꾼, 백지는, 달리지 않는 모든 것을 한다, 눈 표범처럼, 포식자의 높고 깊은 눈빛으로, 달리지 않는 모든 것을 한다, 납빛의, 눈먼 사냥이 시작된다, 보이지도 않던 말들, 목을 물린 채 끌려가는, 숨소리, 이미 뿌옇게 잿 가루 뒤덮인 사냥터, 그러나, 다시, 바람 한 점 없는 백지 위, 눈먼 사냥이 시작된다,
-수렵시대, 김경후 詩 全文-
鵲巢感想文
대학 1학년 때였지 싶다. 이문열의 소설 ‘들소’를 그때 읽었다. 소설의 배경은 구석기 시대쯤으로 보였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특이했고 배경이 결코 낯설지 말아야 할 자연이었다. 산나리였든가, 그리고 뱀눈도 기억이 나고 큰 목소리, 날렵한 손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들소를 잡아야 했던, 그때는 하나의 목표물이었다. 가장 우람하고 높고 큰 덩어리는 부족의 영웅이 되는 지름길이었다. 세월이 흘러 스페인 어느 고장 모 사냥꾼이 발견한 동굴이 있었다. 알타미라. 그 동굴 천장에는 들소가 그려져 있었다.
몇 천 년 아니 몇 만 년이 흐른 지금, 현대인은 무엇이 들소인가? 우리는 무엇을 쫓으며 오늘을 보내고 있는 것인가?
시인의 시 수렵시대를 읽고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밤에 발자국 하나 없는 설원 위를 스스로 걷는 시인, 검은 화살에 웃고 우는 폐허 더미에 자폐의 붉은 먼지는 끈 없는 목덜미를 잡고 아예 없는 공간을 무엇을 위해 얼마나 사냥하는 것인가?
누구는 고함을 지르고 누구는 텅 비어 있고 누구는 칼을 휘두르고 있지만, 누구는 등을 보이며 내빼고 있다. 눈먼 사냥꾼의 납덩어리는 과연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 높고 깊은 눈빛의 치타 더는 달릴 수 없는 그 숨을 끊어놓기 위해 얼마나 달려야 했든가! 결국 목덜미는 그 치타의 이빨에 물린 채 또 얼마나 피를 흘려야 했든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이 설원 위를 달려가는 시인을 보라! 세상은 언제나 넓다는 것을 손수 방아쇠를 당기며 서 있는 저 사냥꾼을
더 달려 나가는 것은 언어폭력임을,
언어가 폭력이라는 것을 알 때 치타는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눈 내리는 벌판 한 가운데를 걸을 때라도 어지럽게 걷지 말자. 오늘 걸어간 이 발자국들이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니까 김구 선생께서 널리 쓰셨던 한시였다.
이 한시가 왜 자꾸 생각이 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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