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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가 아닌 감독이 되어야 한다. / 부재에 대한 소고/김순호 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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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996회 작성일 18-12-2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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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가 아닌 감독이 되어야 한다

 

-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부재에 대한 소고溯考/ 김순호

짝퉁과 명품의 차이/ 박종인

세포 전쟁시대/ 지시연

 

 

몇 편의 글을 연재하다 보니 벌써 한 해가 갔고 새로운 한 해가 왔다. 올 해는 기해년 돼지띠 해다. 그것도 일반 돼지가 아닌 황금돼지의 해라고 한다. 새해 첫 연재의 글은 당연히 독자 여러분에게 작년 한 해에 대한 감사 인사와 더불어 올 한 해 어떤 때 보다 더 다복하시기를 바란다는 소박한 인사를 드린다. 기해년(己亥年)은 육십 간지의 서른여섯 번째 해로 ‘기’는 황을 의미하는 바, 노란 돼지의 해 또는 황금돼지의 해라는 말은 제법 좋은 소식을 기대하게 하는 것 같다. 모쪼록 올 한 해 마음과 마음의 번민이나, 삶의 애환에서 한 걸음 벗어나 글과 문학을 더 많이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독자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드린다.

 

한 해의 첫 글제를 생각하다 문득 어쩌면 우린 모두 스폿 라이트를 의식하며 글을 짓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목받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삶에 좀 더 자존감이 들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천천히 생각해 보면 스폿 라이트라는 것이 글에 목적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이 활자로 변해 독자에게 전달될 때쯤, 연말마다 홍역을 앓던 신춘문예의 계절이 종료되고

누군가는 희열에, 누군가는 내년을 기약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신춘문예, 문예지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등단제도는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물론, 순기능과 역기능이 공존하는 것이 세상의 모든 제도와 시스템이라고 볼 때 그런 제도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제도의 순기능을 먼저 생각해 보면, 글의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막연하게 자신의 매너리즘이나 세계관에 몰입해 객관적인 잣대의 기준이 없는 글을 쓴다는 것도 사실, 대단히 힘 빠지는 일이다. 글, 통칭하여 문학이라는 것은 쓴다고 다 글이 아니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소설에는 소설 나름의 플롯과 형태가 존재하며, 시에는 시 나름의 형태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기에 당해 장르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맞춰야 정당한 글의 당위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춘문예, 문예지 등을 통한 등단은 글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정당성을 얻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경쟁적인 일종의 경연을 통해 더 좋은 글을 잉태하게 하는 산실이 되는 것도 주지할 사실이다. 반면, 역기능을 생각해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글에 대한 등위를 과연, 누가 매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시는 시인 또는 시를 쓴 사람 모두의 경험과 관찰과 깊은 사유에 의해 기록되는 문학이다. 그러한 이유로 사유의 깊이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으며 숫자로 계량화 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두 번째 이유는 필자 역시 전철을 밟은 것이지만, 신춘문예 혹은 문예지 신인상에 응모하게 되면 가장 먼저 기 당선된 분의 글을 읽고 그 글에 가능한 비슷한 류의 글을 쓰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비슷한 ‘류'라는 점이다. 글을 쓰다 보면 일정 부분 의도하지 않은 이른바 ’남의 글을 내 글처럼‘에 해당될 때가 있다. (의도한 것은 엄격히 제외한다.)이러한 것은 기 당선된 글을 수 없이 읽다 보면 무의식 중 내 글 속에 다른 글의 입김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모든 글은 달라야 한다. 하지만 그 다르다는 것의 기준은 또렷하지 않다. 때론 단어 하나, 문장 한 구절, 시적 사유의 전개 방식 등등에 있어 어쩔 수 없는 비슷함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이유들이 시를 붕어빵과 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더 깊이 들어가면 신춘문예 또는 문예지의 당선이 일회성 행사에 불과하여 장기적인 안목의 문학도를 키우기 적합하지 않다는 문제, 더 나아가 거대 자본 앞에 문학의 굴욕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며 언론에 대한 문학의 종속화를 의미한다는 것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해마다 신춘문예의 심사평을 보면 실험적이거나 참신하거나 창의적인 것을 기준으로 글을 선정한다고 하는데, 과연 이 부분에서 정확한 실험, 창의, 참신의 잣대가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는지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는 바이다.

 

필자는 이러한 외부적인 부분보다는 내부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적 사유는 어떤 한 틀에 넣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대부분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은 매우 탁월한 시적 감각과 시적 미학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문학적 성취도 역시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모두가 비슷하게 글을 쓴다면 글의 진정성과 글의 개아(個我)적 성취는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필자 주변에 있는 많은 분들이 신춘문예 혹은 문예지 당선, 문학상 당선에 명운을 거는 분들이 많다. 필자 역시 그러한 현상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글이라는 것은 최종 목가 당선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글의 최종 목표는 자기완성이라는 생각이다. 지나 온 삶에 대한 반성과 살아갈 생에 대한 성찰과 준비, 세상을 좀 더 따듯하게 보는 심미안의 발달, 독자와 더불어 ‘평생’이라는 것을 공감하고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이 글의 최종 기착점이라는 생각을 한다. 최종 목표가 당선이라면 당선 이후는?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여타의 당선자 들의 좋은 글을 읽다 보면 이후의 문단 활동이 전무한 경우가 태반이다. 이는 외부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간과한 내부적인 요인도 분명히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글은 즐겨야 한다.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며 살면서 부수되는 많은 삶의 이야기들을 공유하고 나누고 고백하고 반성하는 것은 글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순기능이다. 가장 아름다운 작가는 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거나 중앙의 유명한 일간지에 당선된 분도 당연히 포함되지만 그 이전에 글을 사랑하고 즐기며 읽고 쓰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작가라고 생각한다. 일전에 김경주 시인은 ‘지금 시를 쓰고 있는 사람이 시인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쓰고 있는에 주목해보자. 그것이 좋은 시를 쓰는 가장 큰 밑거름이다. 글은 삶이고 영혼이며 평생을 동반하는 친구와 같은 것이다. 당선이나 문학상에 연연하다 보면 초심을 잃게 된다. 그 부분을 경계하자는 말로 황금돼지해에 독자 여러분에게 진언을 드리고 싶다.

 

이번 달의 글제는 선수가 아닌 감독이 되자는 것으로 정했다. 축구 경기와 비교해 보고 싶다. 멋진 드리블 돌파를 하고, 강력한 슛 한 방으로 골을 넣으면 피가 끓는다. 그 장면에서 애국심도 배양되고 어느 때는 마치 내가 선수인 듯 희열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선수는 그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차고 또 차고 연습을 하였을지 생각하면 참 대단한 일이고 뿌듯하다. 글과 비교해 보면 한 편의 좋은 작품(시인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한 편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애태우며 쓰고 지우고, 응모하고 떨어지고를 반복했을지?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응분의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고통의 흔적이 보이는 글은 몇 번을 읽어도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하지만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어쩌면 골을 넣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골을 넣기 위해 수 없이 달리고, 센터링을 연습하고, 드리블을 수련하고, 숨이 턱 차오르도록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골을 넣었다고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 역시 나와 같은 시련을 겪고 그 경기에 나섰기에 승리는 내 편이 될 수도 있고 상대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감독을 생각해보자. 감독은 어떤 선수가 골을 넣을지? 어떤 선수가 당일 경기에 컨디션이 좋은지? 경기장 잔디 상태는 어떤지? 어떤 전략으로 상대방을 이겨야 할지 모든 것은 종합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감독의 몫이다. 정리하면 선수는 골을 넣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고 감독은 경기를 지배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시를 쓰다 보면 은유, 비유, 진술, 관찰, 묘사 등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독자에게 돌진하게 된다. 마침내 독자에게 골을 넣으면 상당한 희열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 방향성으로 인하여 어쩌면 많은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좀 더 웅숭깊은 시를 쓰려면 상대방의 전술을 포함하여 여러 부분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거나 분석하여 정확한 선수(단어, 문장, 문맥, 구성)를 선택하여 경기를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비유만 잘한다고, 은유에 탁월하다고, 혹은 묘사에 탁월하다고 하여 좋은 시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좀 더 글을 글의 태생적 본성에 기초하여 생각하면 더 많은 부분을 보고 더 많은 상황을 생각하고 더 많은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글을 쓴다면 매우 좋은 글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선수도 좋고 감독도 좋다. 하지만 선수 입장에서 글을 쓰는 것 보다 감독 입장에서 글을 쓴다면 글의 깊이는 더 깊어질 것이며, 공감의 영역은 더욱 확장될 것이다. 글의 깊이는 깊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된장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감독의 입장에서 시를 쓰는 방법에 대하여 박재삼 시인의 시 창작 방법 중 일부를 인용해 본다.

 

 

시 창작의 비법


 박 재 삼


1.문학체험을 많이 해라


 좋은 글을 쓰기 위하여 구양수가 말한 삼다(三多)가 필요하다. 그 중의 첫째가 다독인데 풍부한 독서가 시 창작에서도 예외가 될 리 없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한 기초로서 독서체험을 풍부하게 가져야 하는 것은 시 창작의 필수조건이다. 독서체험은 실제의 체험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글쓴이의 체험, 사고, 감정, 인격, 사상 등의 총체적인 것과의 만남이 되며 새로운 세계를 접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우리들이 부딪치는 세계의 폭은 좁고 한정되어 있다. 당연히 경험도 거기에 비례해서 비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흔히 독서를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특히 문학경험은 시 창작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소설이나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았을 때 자신도 그와 같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이러한 충동이 창작의 씨앗을 만들기도 한다. 또 작품을 읽는 동안 자기의 내면 안에 감추어져 있거나 잊힌 무수한 생각과 감정들이 이끌려 나와서 해후하게 되고 거기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나도 글을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그만 손을 떼고 다른 사람의 시나 소설, 수필 등을 읽는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글을 모방해서가 아니라 글을 읽는 동안 잠재해 있던 그 무엇들은 글을 낳고, 좋은 시가 좋은 시를 낳는다는 말처럼 문학경험은 창작의 훌륭한 활력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무를 다루는 목수는 그 나무의 재질을 알아야 하고, 돌을 다루는 석공은 그 돌의 성질을 잘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시를 쓰려는 사람은 우리말에 능통해야 한다. 시는 극도의 예술이며, 언어의 정수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어떠한 문학보다도 언어에 대한 감각과 언어를 다루는 솜씨를 필요로 한다. 


2. 사고를 깊고 풍부하게 하라 


"사고"는 창작의 바탕이며 밑천이다. 텅 비어 있는 돼지 저금통에서 돈을 꺼낼 쓸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이 들어있지 않고서는 시를 쓸 수가 없다. 시 창작은 어떠한 것보다도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며, 개성과 독창성을 발휘하는 창조적인 예술이다. 그런데 이 창조성과 개성의 근원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사고"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이 똑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각자가 보는 것이 틀리며, 느끼는 것이 다른 까닭은 품고 있는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이 한 인간의 개성을 만들어 내고 창조적인 글쓰기의 핵심을 형성해 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글은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한다."라든지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을 주위에서 듣곤 한다. 이 말은 글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글쓴이의 "사고"가 그 사람의 정신과 인격 등의 총체적인 모습을 드러나게 해준다는 뜻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 창작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의 차이는 "사고"의 차이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통찰이 달라지고 시의 성패가 좌우된다. 시 창작에서 사고란 어떤 심오하고 거창한 사상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 창작에서 요구하는 "사고"는 한 사물의 개념을 파악하는 수박 겉핥기식의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마다 지닌 진실과 그 속에 갖고 있는 아름다음과 가치를 찾아내어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우리들의 삶에 새로운 충격과 깨달음을 주도록 하는 "사고"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틀에 박힌 생각, 사물의 거죽만을 보는 피상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사물을 넓고 깊게 보는 것이 시 창작에서 중요한 것이다. 


3. 쓰고 또 써라 


쓰는 일은 시 창작의 처음이자 끝이다. 시 창작의 실제는 쓰는 일에서 시작되고 쓰는 일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딘 가에서는 수많은 시 지망생들이 습작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치열한 습작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좋은 시가 창작될 리가 없다. 시 창작은 철저한 연습을 필요로 하고 문장과의 싸움을 원한다. 워즈워드의 말대로 "최상의 언어를 최상의 순서로 늘어놓은 것이 시"이기에 어떠한 문학보다도 준엄하고 치열한 언어의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써 보는 일에 부단한 노력 없이는 제대로 된 문장, 제대로 된 표현을 거쳐 제대로 된 시가 태어날 수가 없다. 지금 시를 써 보려고 하고 거기에 뜻을 둔 지망생들은 분명 시에 대한 재능을 갖고 있다. 시에 관심이 있고, 또 그것을 좋아하고 자기 스스로 써 보려고 한다는 것은 재능의 싹을 갖고 있다는 표시이다. 그러나 자기 안에 무궁무진한 능력이 잠재되어 있더라도 각고의 노력 없이는 그것들은 스스로 솟아나지 않는다. 그냥 묻혀 버리기 십상이다. 거듭 써 보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런 수련과정에서 자기만의 개성과 독창성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 관찰하는 눈을 가져라 


조지훈 시인은 글을 잘 쓰려면 눈은 과학자를 닮으라고 했다. 이 말은 사물을 관찰하는데 치밀하고 날카로운 눈을 가지라는 뜻이다. 우리는 평범하고 예사롭기만 한 사물이나 현상도 예리한 관찰을 통해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뜻밖의 사실이나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에 새로움과 기쁨이란 우리들의 삶의 얼마나 큰 활력소가 되는지 그것을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실상 우리들은 주변의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고 낮이 익어서 별반 새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을 봐도 무덤덤하고 저것을 봐도 시큰둥하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타성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고정적인 생각일 뿐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느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화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아침에 본 꽃의 모양과 빛깔이 다르고 점심때와 저녁때도 각각 다르다. 또 빛의 각도, 세기, 밝기, 등에 따라서 꽃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들의 섬세한 변화를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것이다. 적어도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물 하나를, 그리고 자기 주변의 현상들을 주의 깊게 볼 줄 아는 섬세한 눈을 갖고 있어야한다. 여느 사람들 모양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무덤덤하고 무신경해서는 절대 좋은 시를 창작할 수가 없다. 정확하고 예리한 관찰을 통하여 자기의 눈으로 본 사물들의 의미를 붙잡을 수 있어야만 시가 우러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가가 플로베르다. 그는 한 개의 모래알도 똑같지 않을 정도로 묘사하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만큼 사물을 정확하게 관찰하라는 이야기다. 이런 플로베르를 스승으로 모시고 글쓰기를 배운 사람이 바로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자 모파상이다. 그는 자신의 표현력이 시원치 못함을 느끼고 플로베르에게 표현의 비법을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날마다 자네 집 앞을 지나가는 마차를 관찰하고 그것을 기록하게나. 글쓰기의 가장 좋은 연습이라네.중국의 저명한 서예가 왕희지 또한 그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필체가 그의 관찰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거위를 무척 좋아하여 그것들을 기르며 관찰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특히 연못에서 헤엄칠 때 물을 힘차게 가르는 거위의 발동작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여기에서 새로운 운필법을 창안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관찰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개성과 독창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새로움을 창조해 내는 것을 생명으로 하는 시 창작에서는 아무리 이것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 기계적인 관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관찰은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관습적인 시각의 연장일 뿐이며 피상적인 모습만을 보게 만든다. 따라서 사물을 정확하게 보아내기는 고사하고 그것이 지닌 새로운 의미도 결코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5.따뜻한 가슴으로 사물을 보라 


"시인은 꾀꼬리처럼 어둠 속에서 그 고독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부르며 사람들을 위로 해준다."라고 영국의 시인 셸리는 말했다. 우리는 셸리의 이 말 속에서 시인의 가슴이 어떠해야 하며, 시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위로로써 우리들의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지는 자리에 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한다. 나는 시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랑을 모성적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성적 사랑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다. 아무런 조건과 이해타산 없이 순수하게 자신이 지닌 것들을 내어 주며 한없이 베풀어 주는 사랑이다. 생명이 지닌 상처들을 기꺼이 감싸 안고 포용하는 그 융숭한 사랑이야말로 사랑이 지닌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며, 이런 사랑의 실체가 곧 우리들 어머니이다. 그래서 모성적 사랑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지표요. 신앙이요. 구원이다. 결코 어떤 무엇으로도 훼손될 수 없는 사랑의 원형이다. 우리가 어머니를 회귀하고 싶은 영원한 고향으로 여기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시 속에서도 이러한 모성적 사랑이 근원적으로 흐르고 있다. 왜냐하면 시는 뭇 생명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안타까움의 노래이자, 생명을 위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성이 모든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원천이며, 그것들을 품고 기르는 위대한 창조성의 본(本)인 것처럼 시 역시 온갖 사물들을 품으면서 그것들이 지닌 의미와 아름다움을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이므로 모성과 시는 그 본질에서 서로 통한다. 그러므로 시를 창작하려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가슴이 되어 세상과 사물을 넉넉하고 깊게 포용할 줄 알아야 하고, 여기에 인간으로서 지닌 지순한 사랑도 담아야 하는 것이다. 따뜻한 가슴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라. 그리고 안아 보라. 시는 영원한 모성인 것이다.


6. 고치고 또 고쳐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작을 남긴 위대한 작가들에게는 퇴고에 의한 이야기가 무수하게 많다. 이러한 사실은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는 비법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퇴고에 열정을 쏟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작가들은 단숨에 써 내려간 글이 자신의 천재도 실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는 것이므로 거듭 다듬고 고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히려 작품의 천의무봉()함은 수백 번 고치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답게 문장을 썼다는 투르게네프도 어떤 문장이든지 쓴 뒤에 바로 발표 하는 일 없이 원고를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두고 석 달에 한 번씩 꺼내보면 다시 고쳤다고 하고, 글자 한 자마다 완벽함을 기했던 구양수도 초고를 벽에 붙여 놓고 방을 드나들 때마다 그것을 고쳤다고 한다. 심지어는 체홉과 톨스토이한테서 문장이 거칠다는 말을 들은 고리키가 퇴고를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옆에서 보던 친구가 "그렇게 자꾸 고치고 줄이다간 어떤 사람이 태어났다. 사랑했다. 결혼했다. 죽었다. 이 네 마디밖에 안 남아 나겠군."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리키에게 문장이 거칠다고 했던 톨스토이 자신도 이 글을 다듬기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지 여기에 대한 유명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한 젊은 작가가 톨스토이에게 창작에 관한 배움을 얻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톨스토이는 외출 중이었다. 집에 있던 사람은 그 젊은 작가를 서재로 정중하게 안내한 후 톨스토이가 곧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혼자서 서재 안을 서성이던 그는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원고 더미들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것들을 펼쳐 보았다. 그런데 그것들은 소설 <부활>의 제1차 미정고(未定稿)에서부터 제10차 미정고 까지 쌓아 둔 것들이다. 이것을 본 청년 작가는 너무 놀라고 감동스러워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꼼짝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이때 마침 외출에서 돌아온 톨스토이가 살그머니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어깨를 툭툭 치며 "이상스러운가?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네."하고 말한 후 서류 궤 안에 들어있던 다른 원고들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전쟁과 평화>의 90여종이나 되는 미정고들이었다. 그는 이 미정고들을 보면서 창작의 방법들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톨스토이에게 묻지 않았다. 다른 어떠한 말이나 가르침보다도 톨스토이의 미정고들이야말로 창작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도<노인과 바다>를 쓸 때에 400번 이상을 고쳐 썼다고 하니 작품이 탄생되기까지는 수백 번을 다듬고 고치는 지극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을 수가 있다. 더구나 시는 어떠한 문학보다도 엄격한 창작태도를 요구한다. 언어 하나의 정확함에서부터 문장부호 하나까지도 시의 전체적으로 흐르는 분위기, 호흡, 리듬, 질서에 관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서로 유기적인 조직들을 이루어야 하는데, 퇴고를 하지 않고서는 이런 극도의 치밀함이 생겨날 수는 없다. 아울러 제대로 된 시도 탄생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붓놀림이 신선 같다던 두보조차도 "시언(詩言)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시 다듬는 일을 쉬지 않는다."고 하며 자신의 시를 퇴고하는데 참담할 정도의 노력을 쏟았던 것이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알곡 한 톨을 얻기까지 수백 번의 손길이 못지않게 거듭 매만지고 다듬는 퇴고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시다. 이규보가 "시에 적합하지 못한 9가지 체"를 이야기하면서 "글이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 은 잡초가 가득 찬 밭"이라고 말할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고치고 다듬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며, 가벼이 여기지 말라. 죽어서도 시 다듬는 일을 쉬지 않겠다던 두보의 각오로써 자신의 시를 끊임없이 다듬는 노력과 정성이 좋은 시를 창작케 하는 지름길이며 비법인 것이다. 

 

「박재삼-시 창작의 비법 중」일부 인용

 

모던 포엠 2019년도 1월의 첫 해에 소개해 드릴 작품 세 편은 한 해의 시작인 바, 좀 더 웅숭깊고 좀 더 다양한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작품에 기준을 두고 선별하여 소개해 드린다. 첫 작품은 김순호 시인의 [부재에 대한 소고]라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부재]는 여타의 시에서 많이 다룬 작품이며 부재라는 제목에서 암시할 수 있듯이 개인적인 반성 내지는 개인적인 의식의 전이와 변화를 소재로 택하는 경우가 많다. 김순호 시인의 작품 역시 부재에 대한 의식의 전이를 시의 전반에 담고 있다.

 

부재에 대한 소고溯考

 

김순호

 

첫울음을 가두어 두었던 방,

완벽한 성형을 꿈꾸던 방,

나가려는 발길질에도 기꺼이 우주가 되어 준

따듯한 방이 사라진 빈 집이 있다

 

내 잘못을 몽땅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심장

내 허물을 다 덮어주는 가슴을 읽었다

 

헌신만 무럭무럭 키우며 평생을 살아온 길

깎기도 전에 다 뭉그러진 손톱을,

 

어둠이 더 단단해진

첫 행을 사루는 자시

고봉의 밥그릇이 무덤처럼 슬프다

 

어제와 내일이

혹은 이쪽과 저쪽

흑과 백의 경계선에서

모든 것들이 분리되는 찰나를 목격한 오늘

 

수 없이 피고 지던 기록되지 않은 가르침들

나는 유산처럼 받아 적는다

 

뉘우침으로 가득한 봄날

 

나와 나, 진정한 나와 또 다른 나를 기준으로 볼 때, ‘나’라는 존재는 두 가지 존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헤르만 헷세의 작품 ‘데미안’에서 주인공 씽클레르와 데미안의 관계가 그런 인격적 이중성을 잘 표현한 작품일 것이다. 시에서 이야기하는 나와 나의 개념은 내 방이면서 내 방이 아닌 곳, 나 이면서 내가 아닌 존재가 있는 곳, 내가 위로해 줄 내가 있는 곳 등의 다의적인 개념의 나를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나와 나의 관계가 아닌 전혀 다른 의미의 타인 내지는 대상을 말하고 있다.

 

첫울음을 가두어 두었던 방,

완벽한 성형을 꿈꾸던 방,

나가려는 발길질에도 기꺼이 우주가 되어 준

따듯한 방이 사라진 빈 집이 있다

 

따듯한 방이 사라진 빈 집에서 따듯한 방과 빈 집은 나와 또 다른 나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듯한 방이 사라진 부재는 어둠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고봉의 밥그릇을 무덤처럼 보이게도 한다. 부재는 어떠한 형태를 ‘무엇’이라는 존재의 부재는 지금 이곳을 지금 이곳이 아니게 하는 것이다.

 

어제와 내일이

혹은 이쪽과 저쪽

흑과 백의 경계선에서

모든 것들이 분리되는 찰나를 목격한 오늘

 

나로부터의 부재, 나의 부재, 당신의 부재, 누군가의 부재, 삶으로 부터의 부재, 사유로 부터의 부재, 모든 부재는 모든 것에서 모든 것들이 분리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어쩌면 그것은 시쳇말로 슬픔의 이유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뉘우침으로 가득한 봄날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뉘우침으로 가득하다고 한다. 봄날이라고 한다. 시를 읽으며 부재를 부재로 느끼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시인과 같이 찾고 싶다. 결국은 나 역시 누구에겐가 부재로 인식되고 부재될 수밖에 없는 나로부터 종속된 인과관계를 갖고 있는 보통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뉘우침이라는 단어가 귀를 맴돈다.

 

두 번째 작품은 박종인 시인의 [짝퉁과 명품의 차이]라는 작품이다. 일상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에피소드를 어른과 아이의 두 가지 관점에서 재밌게 구성한 작품이다. 시제에서 알 수 있듯 소위 명품이라는 것의 실상은 무엇인지? 어쩌면 명품이라는 것에 현혹돼서 세상을 명품과 짝퉁으로 구분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좀 더 생각해 보면 명품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세상의 구분법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하고 성찰해 보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짝퉁과 명품의 차이

 

박종인

 

종이 백에 적힌 JONGRO BOKTTOKBANG

아이가 묻는다.

엄마, 복덕방은 소개소와 같은 말이지?

그럼, 그 말이 그 말이지

종이가방을 요모조모 살펴보던 아이

종이 백 뒷면을 내 앞에 내민다

 

종로(福) 떡 방

그러면 그렇지

한참을 웃다 말고 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복덕방에서 파는 복떡은 어떤 맛일까

자고 나면 키가 훌쩍 큰다는 복,

한때 복을 사간 복부인들이 빌딩을 올리고

한 번도 덕을 세운 일도 없는 누구는

자다가 떡을 얻어먹었다는데,

 

복덕방에서 파는 떡이

정말 복떡이지, 그런데

복떡을 파는 복덕방은 어디에 있는 거니?

 

누구나 살다 보면 겪었을 이야기를 시로 구성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야기 속에 사유를 담아야 하고 이야기 속에 시적 요소(비유, 함축, 은유)를 담아야 하고 문장의 전개가 자연스러워야 공감의 영역이 크기 때문이다. 박종인의 시는

간결하고, 의미 있고,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사회의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르는 촌철의 날이 반듯하게 서있다.

 

종로(福) 떡 방

그러면 그렇지

한참을 웃다 말고 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복덕방에서 파는 복떡은 어떤 맛일까

자고 나면 키가 훌쩍 큰다는 복,

한때 복을 사간 복부인들이 빌딩을 올리고

한 번도 덕을 세운 일도 없는 누구는

자다가 떡을 얻어먹었다는데,

 

필자 역시 공감하고 궁금해진다. 복을 사간 복부인의 빌딩은 어디서, 어느 복덕방에서 또다시 복을 양산하거나 재창조하고 있는지? 종로가 강남으로 바뀌고 강남이 전국으로 무대로 바뀌는 재투자 열풍 속 복덕방은 전국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다가 떡을 얻어먹으면 떡 맛이 어떨까? 혹시 체하는 것은 아닐지? 그 떡이 상한 떡을 잘 못 먹어 몸이 상한 것은 아닌지? 능청스럽게 묻고 싶다. 인구분포 중 대다수는 복떡방에서 떡을 사거나 복을 사거나, 혹은 자다가 떡을 먹은 적은 분명히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복덕방에서 파는 떡이

정말 복떡이지, 그런데

복떡을 파는 복덕방은 어디에 있는 거니?

 

시의 결구를 의뭉스러우면서도 공감이 갈 수 있게 잘 매듭지었다. 시는 철학은 아니지만 철학이 내포되어야 한다. 사회를 보면서도 동시에 사회를 고발할 수 있어야 한다. 현상을 보면서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경계 너머의 것을 시사해야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화려한 수사체의 문장이나 과도하게 억지스러운 비유를 남발하는 작품보다는 이런 류의 작품이 더 좋다. 쉽게 이해하고 쉽게 공감하고 아프게 인식할 수 있는 세태가 독자를 자극하는 법이다. 강렬하게.

 

마지막 작품은 지시연 시인의 [세포 전쟁시대]라는 작품이다.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걸어 나온 분의 이야기 인 듯하다. 요즘은 암의 발병률이 이전보다 증가했다고 한다. 서구식 식습관의 문제, 운동 부족, 스트레스의 증가, 알 수 없는 여러 현대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암과 싸우는 현대인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따듯하다. 그 따듯한 시선이 첫 해 첫 달의 마지막 작품으로 선하게 된 이유다.



세포 전쟁시대

 

지시연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 할까

사느냐 죽느냐 덜컥,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줄 수 있을까

 

카메라가 되기를 바라지 않은 사람에게

어느 날 던져진 운명의 과제, 발등에 불이다

3개월이란 시한부의 삶에서 걸어 나온 사람을 보니

매일의 하루하루가 기적을 먹고사는 일이다

 

정상세포를 지키기 위해 진지한 안부를 다하고

가장 슬픈 이별을 만들어 내는 암세포에게 시한을 준다

표적의 대상은 인간의 몸속에서 인간을 죽이는 게 아닌 것이다

 

아주 가끔은, 못나빠진 내 구석진 마음

누추한 자리를 정화하고

생기 넘치는 세포 조합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전쟁에서 싸우는 사람 앞에는 헛된 욕심이다

 

시는 여타의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간결하고 진중하고 촘촘하게 빚었다. 시한부 암 판정을 받은 사람, 혹은 지인에게, 혹은 가족에게 주변인으로서 참 어려운 일이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 할지에 대한 문제이다. 환자 본인에게도 지인인 나에게도, 하지만 가장 좋은 손 내밀기는 진심을 담은 말과 눈빛 아닐까 싶다. 진심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까? 문제는 환자 본인에게 진심으로 느껴져야 진심이 된다는 것이며, 눈빛을 건네는 사람도 진심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상세포를 지키기 위해 진지한 안부를 다하고

가장 슬픈 이별을 만들어 내는 암세포에게 시한을 준다

표적의 대상은 인간의 몸속에서 인간을 죽이는 게 아닌 것이다

 

환자가 아닌, 암세포에게 시한을 준다는 시인의 시선이 좋다. 표적의 대상은 인간의 몸속에서 인간을 죽이는 게 아니라는 시의 본문이 시적으로 볼 때 상당한 완성도를 느끼게 만든다. 단순하게 암과 암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암을 내 삶과 결속하여 삶에 대한 성찰로 승화한 점이 지시연의 시를 세련되게 만든다. 대상에서 ‘나’로 나에게서 ‘삶’으로 ‘삶’에서 다시 암환자에게로 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치환하는 시적 완성도가 매우 탁월한 작품으로 보인다.

 

전쟁에서 싸우는 사람 앞에는 헛된 욕심이다

 

결구가 아릿한 아픔을 준다, 필자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겪은 경험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전쟁 같은 사랑, 전쟁 같은 투병, 전쟁 같은 삶, 전쟁 같은 글쓰기, 전쟁에서 싸우는 사람 앞에서는 헛된 욕심이라는 결구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기해년(己亥年) 돼지해가 밝는다. 새해 벽두가 장엄하고 은근하게 동살을 펼친다. 올 한 해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 평화와 안정이 공존하는 해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드린다. 아울러 제 어눌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글이 조금이라도 독자 여러분의 글쓰기에 도움이 되면 그것보다 좋은 복은 없을 것 같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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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붉은선님의 댓글

profile_image 붉은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들여다 볼 생각을 않고 둘레만 서성입니다~~
끌어다 앉히고 싶은 마음 간절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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