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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볼 것인가/내비게이션(박진형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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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53회 작성일 19-01-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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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무엇으로 볼 것인가

 

-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내비게이션 / 박진형

노을의 악보/ 김건희

비의 이유 / 도복희


 

한 해가 시작되고 몇 주가 지났다. 예전보다 덜 추운 듯한 겨울이다. 다시 한번 독자 여러분의 2019년이 우렁찬 빛으로 가득하길 기원 하며 글을 시작한다. 필자가 모던포엠의 평론 코너에 3년여 넘게 기고하면서 강조한 말은 시를 씀에 있어 낯설게 하기라는 말을 가장 강조한 것 같다. 시는 창조적 글이며 시에서 말하는 창조라는 것은 곧 글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흔히들 주식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을 일컬어 주식은 생명체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어느 각도에서 보면 시, 넓게 보면 '글‘이라고 통징하는 것과 주식 혹은 주권이라고 하는 것은 유형물이면서 무형물이기도 하다. 그것에 생명을 갖게 하기 위하여 주식은 거래가 되어야 하며, 시는 읽히고 공감을 받아야 하는 매개체가 필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글이라 하나의 생명이 되기까지 과정은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는 글의 씨앗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화자가 사유하고 고민하는 영역을 시라는 형태적 요소를 갖춰 글로 만들어 세상에 내보이는 행위를 산고의 고통을 겪고 태어난 새 생명과 같다고 가정할 때, 산모가 씨앗을 잉태하여 아홉 달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태어날 아이의 정서적 순화를 위하여 태교음악을 듣는 행위는 이번 달의 글제에 해당하는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적합한 행위일 것이다. 독자에게 무엇을 보여주기 위하여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으로 볼 것인가라는 점이다. ’무엇을과 무엇으로‘의 차이는 매우 크다. 무엇을 보는 행위는 시에서 말하는 묘사와 관찰에 해당되는 말이다. 무엇으로라는 행위는 관찰한 현상에 대하여 작가적 상상과 시적 창조성을 부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을‘ 은 현상이고 ’ 무엇으로‘ 는 사유다. 해석이라는 말이며 시를 빚는 가장 큰 시의 발화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꽃을 보는 행위가 무엇을 보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때, 꽃이라는 현상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어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결과는 꽃에 대한 작가적 영혼의 이입이며 ‘무엇으로’에 해당되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아침은 아침이다. 새벽에 펼쳐지는 동살은 누구에게나 동살이다. 하지만 그 동살에 대한 해석이나 느낌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말 그대로 여명이라는 희망으로 치환될 수 있거나, 어제와 같은 이라는 말로 지친 하루의 일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시를 쓰거나 읽는 것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자연의 섭리지만 스물다섯 시간으로 만들거나 열 시간으로 만드는 것은 나름의 몫이라는 것이다. 시적 알고리즘 (algorism) 은 정해진 일련의 절차나 방법을 요구하지 않는다. 적어도 시에 있어서만큼 시의 알고리즘은 개별적 알고리즘이 될 때 비로소 시는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혹은 보편타당한 알고리즘은 시를 단순하거나 수사적 능청이 풍만한 글로 만들기 쉽다. 11월호에서 언급한 기승전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필자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른바 정형화된 사고 내지는 정형화된 시적 표현 수단은 또 다른 의미를 시를 구현하지 못한다. 아주 쉽게 표현하면 붕어빵 틀에 밀가루 반죽을 붓고 슈크림을 넣어나 팥을 넣거나 하는 일반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붕어빵이라는 원형은 같은데 들어가는 소만 다르다면 그것은 붕어빵과 잉어빵의 단어적 희화라는 것이다. 현대시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 종종 언급되는 말이다. 기역의 시나 니은의 시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이번 2019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서 비슷한 개념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물론 표절이라는 결론을 얻어 신춘 당선이 취소되는 초유의 사건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더 동일 사건에 대하여 확장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잠시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서 비켜서(정확히 다른 말은 아니다. 좀 더 확장해 생각해 보자는 개념이다.) 표절에 대한 사전적 개념을 인용해 본다.

 

표절(剽竊)이란 다른 사람이 쓴 문학작품이나 학술논문, 또는 기타 각종 글의 일부 또는 전부를 직접 베끼거나 아니면 관념을 모방하면서, 마치 자신의 독창적인 산물인 것처럼 공표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표절은 흔히 저작권 침해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지만, 양자는 맥락과 지향이 서로 다르다. 저작권이 소멸된 타인의 저작물을 출처 표시를 하지 않고 이용하는 경우는 표절에 해당하지만 저작권 침해는 아니다. 표절은 주로 학술이나 예술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윤리와 관련되는 반면에 저작권 침해는 다른 사람의 재산권을 침해한 법률적 문제이다. 


표절은 다른 사람의 저작으로부터 전거를 충분히 밝히지 않고 내용을 인용하거나 차용하는 행위이다. 반면에 저작권 침해는 다른 사람의 저술로부터 상당한 부분을 저자의 동의 없이 임의로 자신의 저술에서 사용한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지식의 확산을 위해 공정하게 사용될 수 있는 정도를 넘는 경우라면 설사 전거를 밝혔더라도 저자의 동의가 없었다면 저작권 침해가 발생할 수 있다. 물론 표절도 출전을 밝히기만 하는 것으로 전부 방지되는 일은 아니다. 자기 이름으로 내는 보고서나 논문에서 핵심내용이나 분량의 대부분이 남의 글에서 따온 것이라면 출전을 밝히더라도 표절이 될 수 있다. 남의 글이나 생각을 베끼거나 짜깁기해서 마치 자신의 업적인 것처럼 공표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저작권 보호가 엄격하게 유지되는 사회일수록 표절에 대한 사회적 규제도 엄격하며, 저작권 보호가 느슨한 사회에서 표절에 대한 규제도 느슨하다는 점에서 바라보면 양자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 행정학회에서는 '표절을 고의적으로나 또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출처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채, 타인의 지적재산을 임의로 사용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라고 정의했다.(출처 : 포털 다음의 블로그)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의 글이나 생각을 베끼거나 짜깁기해서 마치 자신의 업적인양 공표, 발표한다는 점이다. 글은 어느 지점의 어느 표현이 충분히 같을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은 좀 더 다른 차원이다. 생각의 지점은 같아도 생각의 결과는 달라야 한다. 비슷하더라도 분명히 다른 결과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보는 것은 같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으로 볼 것인가는 달라야 한다는 말이다. 퇴고하면서 이 부분을 다시 한번 분석하고 검토해야 한다. 일부러라도 다르게 만들어야 한다. 누구나 글을 쓰면서 과거의 경험이나 학습 효과에 의하여 무의식 중에 다른 저자에게 받은 영향이 글에 묻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부분까지 세밀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란성이든, 이란성이든 쌍둥이는 쌍둥이기 때문이다. 무엇으로가 중요한 이유는 개성을 창조하는 가장 큰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것은 기존, 기성, 기시감, 등등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행위이다. 물론 누구나 생각이 다를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글은 자신의 생각을 신념 있게 말하고 소신 있게 표현하는 언술 행위이다. 그렇기에 아주 사소하고 작은 부분 하나라고 타인과 다른 무엇이 존재하지 않으면 세련미가 떨어지는 모방 작품 처분을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두가 과거가 같을 수 없고, 누구나 기억이나 일상이 같을 수 없다. 무기력하게 사는 몇몇을 제외하곤. 공개적인 글에서 시인의 실명이나 작품을 언급할 수 없기에 다소 갑갑하다. 하지만 현대시를 표방하는 지금, 각종 문예지나 시집을 펼쳐 읽다 보면 분명 기시감에서 자유로운 시들이 별로 없다. 유명 출판사의 이름을 빌어 유명한 시인의 작품집을 사서 읽다가 내던진 적도 많다. 도대체 유명이라는 기준은 뭔가? 유명 시인은 또 뭔가? 이 작품은 기역의 작품과 정확히 어디가 비슷하고, 저 작품은 니은의 작품과 구성이 똑같고, 어떤 작품은 시도 아닌 작품을 시라고, 혹은 시집이라고 떡하니 세상에 내놓은 파렴치한 행위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간혹 들 때가 있다. 동 부분, 표절에 대하여는 적절한 시기에 정확한 내용을 바탕으로 모던포엠의 필자에 대한 이 코너에서 다시 언급할 것을 약속드린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무엇을 보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현상에 생명의 옷을 입히는 행위이며 시를 시답게 쓰는 행위이며, 시를 철학에 근접하게 만드는 행위의 가장 기본은 ‘무엇으로’라는 접근법이다. 아무 생각 없이 시처럼 보이는 글을 시라고 내놓지 말자. 그건 쇼 윈도의 마네킹이다. 최소한 시인이 무엇으로 현상을 본 것인지, 그것만큼은 독자에게 소통이 될 때 비로소 시는 시답게 읽히는 것이다. 모든 시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가 무엇을 볼 것인가에 머물러 있다. 꽃, 나무, 석양, 노을, 새벽, 노동, 일상, 어머니, 책상, 의자, 환절기, 계절, 낙엽, 눈, 말, 언어, 시간, 시계, 방, 집, 괴롭다, 외롭다, 힘들다. 다 좋다. 하지만 소재적 의미를 제재화 시키지 않는다면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소재적 시로만 만들어 낸다면 시는 시의 본래의 의미를 과감하게 잃는 것이다. 소재와 제재는 다른 말이다. 제재(題材)의 사전적 의미를 문학에서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선택되는 이야기의 재료라는 말이다. 된장찌개의 재재는 된장이다. 모든 된장찌개의 맛은 다르다. 재료가 되는 된장의 순도, 묵힌 시간, 등등의 이유에 따라 맛은 다르다. 그것이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답이다.

 

모던포엠 2019.02월호에서는 위 글제 부합하는 세 편의 작품을 선별하여 소개하기로 했다. 첫 번째 작품은 박진형 시인의 [내비게이션]이라는 작품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 기억에 의지한 현재 상태의 아버지, 아버지와 나, 아버지가 살아오신 방향성, 내 기억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팩트와 팩트가 아닌 부분에 대한 혼란한 정체성 등을 생활시의 관점에서 잘 표현한 작품이다. 근래에 읽은 박진형의 작품과는 사뭇 전개 방식이나 시적 사유의 표현이 다르다. 하지만 가장 인간적이며 가장 가슴에 와 닿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고문을 쓰는 와중에 박진형 시인의 2019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페디큐어]라는 작품으로 시조 부문에 당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면을 빌어 뒤늦은 축하를 드린다.

 

내비게이션

 

박진형

 

기척도 없이 아침에 집 나간 아버지

해 질 무렵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골목은 서로에게 닿는 평생의 발걸음

지도 한 장 없이 편지를 척척 배달하던 아버지

자꾸만 길을 잃어버린다

이제는 내비게이션이 필요할 때가 되었을까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길

지피에스에 연결되었으니 목적지를 말하라는

자동차 내비게이션의 독촉

아버지 걱정에 속울음을 쏟던 나는

공연히 내비게이션을 꺼버린다

 

밤늦게 경찰관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

길은 걸어가고 있을 때 길이 되는 걸까

어디서 구했는지 우편배낭 하나 매고 있다

내 마음속 나침반 바늘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삼십 년 전 은퇴한 아버지의 무너진 발자국이 빼곡하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할 뿐

아무리 걸어도 되돌아오는 별자리처럼

한참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가방의 무게만큼 지워지고 있는지도

흩어지는 길 위로 반송되어 쌓인다

 

아버지 머릿속에 지도가 뒤죽박죽으로 자라고 있다

매일 주름지고 앙상한 기억을 켠다

 

예전보다 많아진 사회병리적인 현상 중 하나가 치매라는 병증이 확산되어 간다는 점이다. 정확하게 시인의 아버님이 치매인지는 모른다. 다만, 글에 표현된 것으로 그렇게 유추해 본다. 시인의 아버님은 우체부였던 것 같다. 지금은 그나마 낫지만 옛날 우체부 아저씨들은 정말 많이 힘들었다. 지도 한 장 없이 종일 걸어야 하는 생활. 하지만 보람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달하거나, 합격 통지서를 전달해 주는 일(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필자 역시 청춘의 한 때,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그 반대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우체부의 자유는 없었다. 전 날 진탕 마신 술이나 학비 걱정에 밤을 꼬박 지새운 것도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다는 듯 가방에 우편물을 넣고 척척 배달해야 하는 마음이 이제야 시를 통해 내게 전달이 된다. 다만, 나는 기다리거나 늦게 오면 짜증 나거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우편물을 전달받으면 우체부와 나와의 관계를 마무 관계가 아닌 것이 되었다. 시인의 아버님은 우체부 였다. 우체부 가족이었다. 그 차이가 시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내 것일 경우와 내 것이 아닌 경우의 차이, 내가 우체부 가족이 아니더라도 우체부 가족이 되는 행위는 제행에 대한 물아적 개념이 될 것이다.

 

/기척도 없이 아침에 집 나간 아버지

해 질 무렵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골목은 서로에게 닿는 평생의 발걸음

지도 한 장 없이 편지를 척척 배달하던 아버지

자꾸만 길을 잃어버린다

이제는 내비게이션이 필요할 때가 되었을까/

 

치매를 치매로 보지 않고 내비게이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시인의 시선이 곱다. 긴 병에 장사 없다는 속담이 있다. 치매를 다만, 치매로 보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는 자기변명을 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박진형의 시는 긴 병에 장사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버지의 긴 우체부 생활은 어쩌면 가족에게는 삶이라는 낯선 길에서 내비게이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바꿔 말하면 시인 자신이 아버지의 내비게이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서로의 내비게이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필자의 졸시 [빈칸]을 잠시 소개한다.

 

빈칸

 

김부회

 

아버지가 입원했다

평생 내 빈 칸을 채워주다

빈칸이 된 아버지

그 자리에 내 이름을 썼다

이제 내가 보호자다

 

생활 시의 매력은 삶이 여과 없이 전달된 다는 점이다. 여과 없다는 말은 포장이나 과도한 수사가 없이 진중하고 솔직하기에 독자에게 쉽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는 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부분에서 시적 포장이 없으면 다소 밋밋한 경우가 많다. (여기서 포장이라는 말은 시의 옷이라는 말로 정의한다.) 박진형의 시가 좋은 점은 이 지점에 있다. 적절한 부분에서 적절한 옷을 입힐 줄 안다는 점이다.

 

골목은 서로에게 닿는 평생의 발걸음/

공연히 내비게이션을 꺼버린다/

길은 걸어가고 있을 때 길이 되는 걸까/

아무리 걸어도 되돌아오는 별자리처럼/

 

위 네 개의 행은 자칫 생활 시에서 오독 할 수 있는 지루함을 벗어나게 해 준다. 마치 잘 끓여놓은 김치찌개의 맛과 같이 어느 것 하나 빼거나 더하지 않는 그 자체의 맛으로 진국인 그런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시인의 아버님은 지금은 소천하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들, 박진형 시인의 시를 통해 여전히 가족 곁에 존재하고, 필자의 기억 어딘가 에도 소중하게 존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가방의 무게만큼 지워지고 있는지도

흩어지는 길 위로 반송되어 쌓인다/

 

 

 

두 번째 작품은 김건희 시인의 [노을의 악보]라는 작품이다. 김건희 시인은 노을을 악보라는 것으로 보았다. 이 역시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적합한 작품으로 생각된다. 노을 자체가 하나의 악보라고 읽고. 그 속에 존재하는 강물, 모래와 자갈, 물고기들, 물결에 삶의 현상을 대입한 빼어난 수작이다. 특유의 섬세한 필력과 조밀한 사유의 단계적 접근이 시를 준수하게 만들었다.

 

노을의 악보

 

김건희

 

사문진 나루의 노을은 철새의 건반이다

물비늘 털며 날아오른다

 

어금니로 문 물고기들 비늘로 음계를 토해낸다

 

어제를 건너와 내일로 가는 강물은 애정의 꽃으로 벙글고 싶어

달포에 한 번씩 하얗게 씻기는 모래와 자갈

칸칸의 건반에 물결을 가둔다

와글와글 생리혈 쏟아낸다

 

눈발도 반나절 이상을 맨발로 서성이다

하늘로 간 뒤

강물에 던진 건 아픈 돌 하나

 

강물은 이제야 집에 이르렀다는 전화 벨소리

나를 떠난 당신이 건넜을 여러 개의 별자리가

신호를 보내왔다

 

나른하던 강의 하복부는 물새가 차고 날아오르는 수면에서

찌르릉찌르릉 별빛 건너 밟는 통화음

 

노을 비친 강물에서 악보를 읽던 새는

힘 좋은 물고기를 들어 올려

완성되는 흑백의 연주

 

노을 앞에 서면 노을의 서사에 감동하게 마련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노을은 저녁노을만 있지 않다. 새벽에도 노을이 있다. 노을을 보며 감동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노을을 삶으로 본 시인의 해석이 매우 타당한 접근으로 보인다. 노을에 대한 알레고리는 일견 정형성을 어긋나지 않게 진술한 것으로 보이면서도 기존의 정형성에 대한 비틀기가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어 부담스럽지 않은 알레고리로 느껴진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사문진 나루의 노을은 철새의 건반이다

물비늘 털며 날아오른다/

 

철새의 건반으로 재해석된 본문으로 독자를 강하게 이끄는 시작이 참신하다. 노을과 강, 모래와 자갈에 비유되는 일상의 표현들도 시의 전반에 걸쳐 조미료와 같은 역할을 하며 감칠맛을 주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진중한 문장에 대한 포석으로서의 제자릴 잘 잡고 있는 듯 읽힌다.

 

달포에 한 번씩 하얗게 씻기는 모래와 자갈

칸칸의 건반에 물결을 가둔다

와글와글 생리혈

 

모래와 자갈 속에 담긴 일상의 애환과 모순, 감정의 변이 등을 의미하는 표현이 가볍게 터치하는 건반 위의 손가락과 같아 긍정의 시그널로 읽히는 것도 매력적이다.

 

강물에 던진 건 아픈 돌 하나/

나를 떠난 당신이 건넜을 여러 개의 별자리가/

완성되는 흑백의 연주/

 

김건희 시인의 노을의 악보는 슬픈 음악을 슬프지 않게, 때론 가스펠적이면서도 대중적인 비유가 선뜻하다.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행간에 적절하게 배치하여 독자로 하여금 스타카토가 가미된 다소 가벼운 클래식을 들은 듯한 미묘한 느낌을 주게 하는 멋진 작품이다. 결구로 마무리 지은 완성되는 흑백의 연주/에서 건반의 흑백, 노을의 흑백, 삶의 흑백, 여정의 흑과 백. 다의적인 여운을 느끼게 하는 점이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강물에 던진 아픈 돌 하나가 자꾸 시를 여러 번 읽게 만든다. 필자 역시 강물에 던진 아픈 돌 하나가 여적 내 필자의 삶을 지탱하고 있기에 짙은 공감의 노을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 근친의 자연스러운 비유들이 유쾌하고 해석이 자유로워서 감히 수작이라는 말을 놓아두게 만든다.

 

마지막 작품은 도복희 시인의 [비의 이유]라는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은 이번 달 글의 가장 서두에 놓을까 많이 고민한 작품이다. 비를 보면서 비에 대한 해석을 매우 신선하게 다루고, 비와 나, 나와 상처, 나와 하나님이라는 동질성이 독특하게 서술된 작품이다. 근래 좋은 작품을 자주 접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의 이유

 

도복희

 

새벽에 비가 내리는 건

하나님이 나에게 말 거는 방법입니다

 

나는 깨어 성경책 대신 빗소리를 읽습니다

 

시편이거나 아가서이거나 고린도후서의

내용이 아닌 빗소리는 또 다른 신의 목소리입니다

 

상처로 신음하는 어린 짐승의 눈빛들이

사방을 떠다닙니다

 

동그랗게 웅크린 모양입니다

 

새벽길이 젖어 있는 건 하나님이 사색하는 이유일 테고

그가 슬퍼하는 건

둥글게 말린 당신의 상처 때문입니다

 

새벽에 비가 내리는 건

지상의 상처가 무거워진 까닭이고요

 

먹구름을 밀어 올린 불면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허공중 떠다니는 눈알 하나를 렌즈처럼 끼웁니다

 

세상이 제법 선명합니다

 

비가 내리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한 비에 관한 시가 무척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이유를 시인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말 거는 방법이라고 해석한 것은 필자가 기억하는 한 처음이다. 잘은 모르지만 종교적 관점에서 기도는 내가 하나님에게 말 거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말 거는 방법이라는 시인의 말은 약간 당혹스럽기도 했다. 주체가 ‘나’라는 점에서, 객체가 ‘하나님/말거는’이라는 점에서 시에 눈길이 많이 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첫 연을 지나 2연의 초입에서 ‘ 하나님이 나에게 말 거는 방법’에 대한 개연성이 쉽게 와 닿았다.

 

나는 깨어 성경책 대신 빗소리를 읽습니다

 

빗소리/ 성경책의 동질성을 발견한다. 시인이 본 동질성은 어쩌면 ‘어디에나 존재하는’이라는 다소 종교적 해석의 반어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3연의 또 다른 신의 목소리/에서 시인의 해석이 대단히 훌륭한 시적 관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시편이거나 아가서이거나 고린도후서의

내용이 아닌 빗소리는 또 다른 신의 목소리입니다

 

또 다른 신의 목소리가 내포하는 것은 또 다른 모든 현상이나 행위들이 모두 신의 목소리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읽어도 될 듯하다. 이것은 시인이 의도했든, 안 했든 매우 깊은 철학적 사유가 진중하게 묻어 있다고 판단하게 만든다. 다만, 빗소리에 국한된 것이 아닌(아마 그런 의도를 갖고 있기에 시편, 아가서, 고린도 후서를 언급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도복희 시인의 비의 이유 속에는 군데군데 시적 장치들이 잘 배치되어있다.

 

동그랗게 웅크린 모양입니다/

그가 슬퍼하는 건

둥글게 말린 당신의 상처 때문입니다/

먹구름을 밀어 올린 불면 때문입니다/

허공중 떠다니는 눈알 하나를 렌즈처럼 끼웁니다/

 

이런 표현들은 감탄이 나오게 만든다. 얼마나 많은 사유를 거쳐 그 사유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시인은 불면의 시간을 지새웠을까? 하는 의문부터 마치 모자이크의 그림 조각 하나하나를 정밀하고 조밀하게 맞춰가는 듯한 시인의 구도의 자세와 같은 글 솜씨가 부럽게 느껴진다고 하면 부합될까?

 

세상이 제법 선명합니다/

 

결구다. 비의 이유에 대한 결구가 밝고 긍정적이며 시인이 던진 메시지가 깔끔하다. 비만하거나 포화된 수사로 인해 지친 어느 날 도복희 시인의 비의 이유를 읽는다면 심장이 깨끗하고 맑아질 것 같다.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잠언의 한 구절을 읽는 듯하다. 시인이 만들어 놓은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몰입하게 만든다. 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는 것에 대한 정답이다.

 

이 글이 독자에게 전달될 때쯤이면 한 해의 1/12가 지난 시점이다. 과연 우리는 올 한 해 계획한 모든 것들, 우리가 스스로 무엇으로 만들거나 볼 것들에 대해 얼마나 노력하고 쏟아붓고 있는지 작성할 주관식 답안지를 세밀하게 다듬어 볼 때가 된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세상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혹은 만들 것인가에 대한 가장 최소한의 노력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맺는다.


2019.02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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