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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 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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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14회 작성일 19-01-25 20:11

본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허 연



보리밭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보릿대가 쓰러졌고 수백만 년이 흘렀다.

알에서 먼저 나온 형은 보수주의자가 된다. 동생은 기회를 노린다. 평등을 외치는 것이다. 하긴 동생으로 태어난 새가 둥우리에서 할 수 있는 건 혁명밖에 없다. 확률은 낮아서 대부분 실패하고 둥우리는 유지된다. 형은 눈물을 흘리며 동생을 밖으로 밀어낸다. 어수선해진 둥지를 추스르며. 바람이 없었다면, 중력이 없었다면, 알이 하나밖에 없었다면…… 형은 이유를 만든다. 수백만 년 동안

별 일 아니라는 듯 새들이 하늘을 난다.


시집『내가 원하는 천사』(2012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허 연


형제는 같은 둥우리 안에서 어미 새의 사랑을 놓고 싸운다. 먼저 태어난 형은 큰 덩치로 둥우리를 장악한다. 엄마의 사랑을 가진 형에게 둥우리는 세계다.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동생은 할 수 없이 진보주의자가 된다. 먼저 태어나 덩치가 큰 형에게 이기려면 녀석은 둥우리를 부정해야 한다. 둥우리를 긍정하는 건 죽음이다. 그래서 동생은 평등을 외친다. 진보는 늘 성공 아니면 죽음이다. 동생으로 태어난 새가 할 수 있는 건 혁명밖에 없다. 새로운 둥우리를 만들지 않는 이상 그에게 미래는 없다. 그런데 혁명의 성공 확률은 낮아서 대부분 실패하고 모든 것은 유지된다. 둥우리 안에서 형은 눈물을 흘리며 동생을 밖으로 밀어낸다. 역사다.

보리밭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보릿대가 쓰러졌고 시간은 흘렀다.
새들이 하늘을 난다.


* 켄 로치 감독의 영화

계간 《시인시각》 2009년 여름호


허연
1966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세계》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불온한 검은 피』『나쁜 소년이 서 있다』『내가 원하는 천사』



【감상】

「프루스트의 입장을 요약하면, 예술가의 결정적인 능력은 '꿈', 즉 실재를 넘어서는 상상력에 있다. 시가 은유를 사용하듯이, 회화는 '변형'의 수단에 의해 객관적인 대상들을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형상체들로 바꾸어버린다.」
『현대시의 구조』(후고 프리드리히)

위 시의 발상은 탁란(托卵)이다. 탁(托)은 밀다, 맡긴다는 뜻이 있다. 오목눈이 둥지에 뻐꾸기가 알을 맡기면, 살육의 시간이 시작된다. 어미는 피아(彼我)를 모르고 먹이를 물어와 적을 키운다. 둥지 안에서는 삶과 죽음이 대치한다. 확률적으로 혁명은 둥지에서 떨어져 죽을 개연성이 크다. 시간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처럼 아이러니다.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1920년대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자신이 죽으면 무덤 비석에 자신은 사회주의자였음을 명기하라고 사전 유언을 남겨놓은 강골 좌파 감독답게, 가난한 이들, 약자의 관점이 이 영화의 지배적 시선이다. 독립전쟁에서 드러나는 형제의 갈등, 인간의 실존 문제 등등. (개인적으론 볼만한 영화였다.)

시인은 퇴고 과정에서, 시간을 경유하면서, 이 발화점들을 다 버렸다.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들도 다 제거했다. 그리고 육탈하고 남은 뼈들만 수거해 다시, 시의 육체를 만들었다. 초안부터 탈고까지 시인은 이따금 이 시를 어루만지며 집안에 둘 것인가, 물가에 놓아 흘려보낼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시를 오래도록 입안에서 굴려보며 구개를 열어 뿜어져도 좋은가, 시가 들어 있나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아직 등뼈가 가지런하고 팔다리가 남아 머리통을 달아주어도 좋을, 될성부른 떡잎이다, 싶었겠다.

혼효(混淆:여러 가지 것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어지러이 뒤섞임.)의 기법으로 사건을 정리하고, 두 갈래의 대조를 내포하게 만들었다. 처음 시가 영화의 스토리를 각색했다면, 퇴고분은 영화적 환경을 버렸다. 착상이 몇 년을 거쳐 착지한 것으로 보인다.

인용문에 등장한 '상상력'이나 '변형'은 무엇일까. 다시 책 내용의 일부를 옮긴다.

「말라르메 시의 본성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감정 및 영감의 배제, 지적으로 통제되는 상상력, 현실성의 멸절 및 논리와 열정에 있어서의 규범적 질서의 파괴, 언어의 충동력 조절, 이해 가능성 대신에 암시, 문화의 종말기에 속한다는 의식, 현대성에 대한 두 갈래 입장, 인문주의 및 기독교 전통과의 단절, 탁월성의 표지로서의 고독, 시의 창작과 시에 대한 성찰을 동격화함(물론 후자에서는 부정의 범주들이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

「말라르메는 "시는 생각이 아니라 말로 쓰는 것입니다"라고 답변한다. 드가 평론서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발레리도 "여기에 비밀 전체가 들어 있다"라고 덧붙인다. 대부분의 현대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말라르메는 생각보다 더 많은 작용을 하는 잠재력이 말 속에 내재해 있다는 유래 깊은 신념에 차 있다.」 (위와 같은 책)

책 이곳저곳을 뒤적거리며 다시 읽었다. 백 년 동안 고민한 현대시란 무얼까를 탐색하는 일은, 덧없는(Éphémère) 짓 같게도 느껴진다. 현대성이란, 자고 나면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거나, 혁명적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혁명의 알이 둥지 밖으로 몰려 깨진다 하더라도, 오목눈이의 시간은 흐를 테지만, "별 일 아니라는 듯 새들이 하늘을 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새싹과 이파리를 흔드는 바람이다. 묵은 때와 더께를 벗기고 생명의 공전 절후를 옮기는 바람이다.

오목눈이 둥지에 무엇을 탁란할까, 묻는다. 뻐꾸기가 시간을 타종할 때마다.

ㅡ 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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