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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 이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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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835회 작성일 19-02-13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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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이윤학


둥근 소나무 도마 위에 꽂혀 있는 칼
두툼한 도마에게도 입이 있었다.
악을 쓰며 조용히 다물고 있는 입
빈틈없는 입의 힘이 칼을 물고 있었다.

생선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고 오는 칼.
목을 치고 몸을 토막 내고
꼬리를 치고,
지느러미를 다듬고 오는 칼.

그 순간마다 소나무 몸통은
날이 상하지 않도록
칼을 받아주는 것이었다.

토막 난 생선들에게
접시나 쟁반 역할을 하는 도마.
둥글게 파여 품이 되는 도마.
칼에게 모든 걸 맞추려는 도마.
나이테를 잘라 끊어버리는 도마.

일을 마친 생선가게 여자는
세제를 풀어 도마 위를
문질러 닦고 있었다.

칼은 엎어놓은 도마 위에
툭 튀어나온 배를 내놓고
차갑고 빳빳하게 누워 있었다.


【해설】

생선가게에서는 통나무를 도마로 쓴다. 주인 여자는 생선을 토막 내고 다듬고 나서 식칼을 그 도마에 찍어두었다. 이 풍경에 붙은 제목이 '짝사랑'인데, 이로써 식칼과 도마가 사랑하는 이들과 연관된 중심 은유라는 게 드러난다. 이 은유는 단순히 하나의 사물로 다른 사물을 대치하는 차원의 은유가 아니다. 이 은유는 온갖 장삼이사들의 삶을 요령 있게 형상화한다. 이 관계에서 어떤 이는 가재도구를 때려 부수고 아내를 두들겨 패는 술 취한 남편을 떠올릴 수 있고, 어떤 이는 애인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무정한 애인을 연상할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이는 사랑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반적인 폭력과 수탈의 현장을 그려볼 수도 있다.
이 풍경은 여러 세부를 품고 있다. 먼저 1연: "악을 쓰며 조용히 다물고 있는 입/ 빈틈없는 입의 힘이 칼을 물고 있었다." 도마가 악을 쓴다는 것은 도마가 그저 고분고분히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도마가 쓰는 "악"은 있는 힘을 다해 모질게 쓰는 기운이라는 의미의 악이 아니라, '이를 악물고 참다'라고 말할 때의 그 악이다. 칼이 도마를 찍어댈 때 그 찍힌 상처로 칼을 물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사랑은 원래 상대적이다. 심지어 짝사랑에서도 그렇다.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맞는데, 그게 그들의 사랑법이다. 다음 2~3연: 칼은 "생선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고" "목을 치고 몸을 토막 내고/ 꼬리를 치고, /지느러미를" 다듬는 데 쓴다. 도마는 그걸 다 받아주면서 "날이 상하지 않도록" 제 몸통을 내준다. 칼은 생선과 도마 둘 다에게 해를 입힌다. 도마는 생선과 같은 자리에서 나란히 누워 피해를 입는다. 그런데 칼이 토막 내려는 것은 사실 생선이다. 도마는 이 살육의 현장에 칼날이 상하지 않도록 칼을 돕는다. 그러니까 도마는 다치는 생선이며 해치는 칼이다. 사랑은 그 사람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그에게 해를 입고서도 나는 그의 편에서 생각한다. 나를 때리는 그의 손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 다음 4연: 이번에는 도마의 이야기이다. 도마는 "토막 난 생선"을 담는 "접시나 쟁반"이며, "둥글게 파여 품"을 이루고 있으며, 제 "나이테를 잘게 끊어"버린다. 사실은 이 모두가 사랑하는 이의 형상이다. 생선을 떠받치는 사랑, 상처로 넉넉한 품을 만드는 사랑, 세월의 침식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사랑 말이다. 마지막으로 6연: 칼과 도마는 마침내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엎어져 있거나 누워 있다. 이 역시 잠자리를 같이한 사랑하는 이들의 형상이다.
도마는 칼이 하는 모든 행동을 제 몸으로 받아냈다. 이 체계적인 은유는 짝사랑의 속성을 정확히 복사하고 있다. 짝사랑은 일방통행이라는 점에서는 불구의 사랑이지만, 상대의 행동에 따라 영향을 받는 사랑이 아니라는 점에서는(짝사랑에 빠진 이는 밀고 당기는 법을 모른다) 이상적인 사랑이기도 하다. -권혁웅, 시론에서.

tip: 은유가 체계 전체에 걸치지 않고 단어나 특정 문구에만 영향을 미칠 때가 있다. 이 경우 은유는 수사적인 차원에 한정되게 된다. 묘출의 방법론으로 부분적인 은유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때에는 은유의 영향력이 제한적이어서 하나의 구나 절, 행을 거느닐 뿐 시 전체의 차원으로 확산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은유의 범위는 제한적인 은유와 전면적인 은유로 나뉠 수 있다.

【추신】
시를 필사하는 것도 공부의 방법이지만, 시론에서 마음에 드는 지점을 골라 필사하는 것도 공부라 믿는다. 우리는 언표를 절묘하게 꾸미는 것으로 시가 깊거나 멋들어지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시의 내면이 풍부할 때 우리는 그 시가 좋다, 아름답다, 깊다 라는 찬사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윤학의 시를 읽을 때처럼, 기표를 해석해서 일차적으로 의미를 판독하고 문장의 표면적인 뜻을 읽어내기는 쉽다. 그러나, 시 내면까지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전문가의 몫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읽어내는 사람들의 몫으로 시를 깊게도 건성으로도 읽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시의 표면만 훑다 갈 것인가, 시 속으로 들어가 다양한 함의를 조금씩 꺼내 읽을 것인가는 독자의 시선과 의지에 달렸다.
공부는 뼈저린 각성과 지루한 시간과의 투쟁이라 믿는다. 그냥저냥 시를 알고 대충 잘 쓰는 것이 시라면, 그것은 무당이 쌀알을 던져 점을 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기성은 이미, 많은 시의 지점을 확장해 놓았다. 그 틈새를 찾아 새롭고 낯설게 돋아난 신생이 있다면 그는 별이 될 것이다.
우리는 표피에 반해서 몇몇 시인을 내가 좋아하는 시인 바구니에 담는 것도 좋을 것이나, 미든 추미든, 다양한 시의 향기와 맛과 멋을 즐기는 것이 시를 읽는 이유이고 즐거움일 것이다. 내가 알고 인지하는 세계만을 확인하기 위해 시를 읽는다면 그것은 우물 안에서 우주를 보려는 나른한 생각일지 모른다.

한밤에 시를 읽고, 전문가의 눈으로 시를 해석하고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확장해 밝힌 것을 참고하며, 시를 어떻게 읽고 또 시가 어떻게 연구되는가를 보고자 하는 뜻일 뿐이다.
공부는 텍스트에 밑줄을 긋는 것처럼 심금(心琴)의 한 줄에도 밑줄을 긋는 일일지 모른다. - 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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