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속(通俗)에 대한 짧은 고찰/(안개감옥,문현숙외 2)-김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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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919회 작성일 19-02-26 08:36본문
*통속(通俗)에 대한 짧은 고찰
-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안개감옥/ 문현숙
문득, 여기/ 피진철
밤의 중독/ 홍철기
새해가 시작된 지 한 달이 훌쩍 넘어 이 책을 받을 때쯤이면 벌써 3월이 시작한다. 세월의 빠르기는 사람마다 느끼는 것과 환경, 살아가는 효용성 등등을 고려하면 그 부피는 다를 수 있겠지만 속도만큼은 아우토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3월은 봄의 전령이 도착하는 시간이다. 봄은 누구에게나 봄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다. 지난겨울의 차가운 기억들이 해동되는 그 지점에서 매화가 피고 목련이 움을 틔우는 계절. 뭔가 새로운 것을 하기에 적당한 날씨와 적당한 훈풍이 불어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펜을 다시 들기도 하고 길어진 자신의 그림자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3월호 글제를 생각하며 이런저런 작년에 출간된 평론집을 뒤적거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어쩌면 모두 획일적인 평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감각보다는 이전 서정시의 개념에서 일부 확장된 문학적 단어와 문법적 얼개를 엮어 내놓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익숙함에서 벗어나야 사고의 확장이 유연할 텐데, 배우고 익힌 것이 모두 하나의 틀 속에서 가지가 뻗어나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뭔가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와 자유로운 성찰 속에서 얻어지는 예지 같은 것들이 필요한 시대인데 평론의 예문으로 예시한 시들이 몇 권의 책을 읽어도 비슷하다. 또한 예시의 시들을 분석하는 기법 역시 대동소이하게 구성되어있다. 차이라고 하면 어려운 단어의 혼용과 단어적 가치에만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시인의 관점에서 시를 판단하고 분석하고 시의 배경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옳은 평론의 길이라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다. 문자적, 혹은 성문적 관점에서 시를 보는 것은 문학을 문학이라는 개념으로 인식하는 가장 큰 ‘글’의 오류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속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세상이 널리 통하는 일반적인 풍속이나 습속을 말한다. 통속이라는 단어를 거론하면 필자는 가장 먼저 박인환의 시가 생각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박인환 시인이 말하는 통속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통속에 대한 입장이나 인식은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통속의 반대는 어쩌면 고급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고급은 대체로 가격이 비싸고 정도나 품질, 수준 따위의 등급이 높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고급을 지향하는지? 아니면 통속을 지향하는지? 하고 묻는다면 모두가 고급을 지향한다고 답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통속이라는 것은 글의 품질이나 수준 따위의 등급이 저렴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생각은 반대 입장이다. 고급의 시보다는 통속적인 시가 더 필자에게 와 닿는다. 합리적인 변명이 아닐 수 있겠지만 통속이라는 말속엔 ‘꾸미기’라는 단어가 없을 것 같다.
자신의 작품을 쓰는 이유가 보여주기에 국한된 것이라면 고급의 시가 좀 더 보기 좋겠지만 보여주기 위한 밑그림에 현란한 색을 입혀야 한다. 물감을 선택해야 하고 눈에 보였던 현상에 각색을 해야 하고 수 없이 많은 덧칠을 해야 한다. 어쩌면 시를 쓰는 가장 큰 목적은 보여주기 위한 작품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이 대화를 나누는 것에 그 목적이 있지 않을까?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스님들의 동안거, 하안거가 그렇고 새벽 예불이 그렇다. 그 모든 행위는 자신과의 대화를 나누기 위해 좀 더 긴 침묵을 나누고 좀 더 근원의 것은 생각하는 ‘수도’의 자세라는 생각이다. 필자는 이전에 어느 시 창작 강의 첫날, 수강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질문을 했다. 시를 쓰는 목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표면적 답의 대부분은 필자의 통속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둔 답이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보여주기’라는 결론이 들었다. 더 나아가 신춘에 당선되고 문학상에 당선되는 것이 최종 목표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필자와 수강생들의 통속에 대한 차이점이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분명 다른 의미로 통속을 말하는 것이다.
통속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일반적이거나 자기감정에 너무 치우쳐 마치 문학적 가치가 고급에 비해 덜한 것으로 인식되어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글 속엔 감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진술에 의한 감정이 아닌 일정한 시에서 요구하는 함축이나 상징, 비유 등의 방법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적당한 그런 감정을 말한다. 물론 고급 속에 감정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고급으로 갈수록 포장기술이 발달하고 그 발달된 포장기술로 인하여 알맹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잘 차려진 뷔페 음식은 한두 번은 맛있는 식사가 된다. 뷔페를 매일 먹는 것은 음식에 대한 환상을 깨는 일이 된다. 반면에 어머니의 된장찌개는 별다른 재료도 없이 투박하고 매일 그 맛이 그 맛 같지만 여전히 우린 오랜 세월 그 맛을 기억하고 선호한다. 1980년대의 대학생들은 읽지도 않는 원서를 보란 듯이 가슴 앞에 들고 다녔다. 그 시절의 통속적 잡지인 선데이 서울을 들고 다니는 학생은 보질 못했다. 원서는 안 읽혀도 선데이 서울은 세상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베스트셀러였다. 중요한 것은 통속이라는 범주에 글을 두고 매도하지 말자는 것이다. 시를 쓰면서 중요한 여러 가지 중 단어 채집이라는 말이 있다. 시어 채집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채집이라는 말이 다소 거슬린다. 물론 가장 필요한 말이기도 하지만 그 반대편에 꾸미기라는 것이 속해 있을 것 같다.
시를 쓸 때 가장 먼저 통속적이면 어떨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즉물적이며 현상적이며 감성적 상태의 나를 보고 느끼고 대화하며 나를 서술하거나 묘사하거나 진술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부러 미화하거나 좀 더 다른 시선으로 현상을 본다는 명목 하에 전혀 엉뚱한 것을 보게 되는 실수를 되풀이한다면 시는 이미 그 순간 방향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가끔 시가 풀리지 않을 경우 시를 쓰게 된 목적을 생각해 본다. 어딘가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와 고급의 시를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나를 위로하고 내가 어떤 생각으로 지금 이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지를 고민해 본다. 필자는 고급 시를 쓸 필력이 없다. 광대무변한 우주의 진리는커녕 밤하늘에 무수히 빛나는 별자리 이름조차 모른다. 지구와 금성의 거리가 얼마인지 태양의 공전 주기가 며칠인지 모른다. 지구의 나이조차 배운 적 없다. 다만, 밤하늘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나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부끄럽고 안쓰럽다. 단 오 분 만 생각하라고 해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데 하물며 화두 하나를 붙들고 몇 달, 몇 년을 생각하는 도인의 그림자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태양의 공전 주기를 표현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고, 화두를 생각해내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 모든 것은 ‘삶’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것에 포함된 일종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딛고 있는 땅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 중력이고 저 먼 별빛이 지금 내 눈에 보여도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현상일 것이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고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물리적인 상대성 이론의 증명일 것이다.
통속의 개념은 고급으로 가는 과정이 아니다. 통속은 고급을 아우르는 본질적인 개념이다.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어디나 아무 데나 여기나 그곳이나 등의 ~~ 나에 국한되는 단어가 아니다. 통속은 세상과 더불어 사는 사람과 사람의 언어이며 땀과 땀의 대화이며 고통과 애증의 결합상품인 것이다. 시는 쉽고 어렵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는 안도현 시인의 작품이 있다. 시인의 작품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통속! 함부로 통속이라고 매도하지 말자. 그 속에 당신의 눈물이 있고 그 속에 잘 난 척하지 못하는 소시민이 있다. 모든 시는(생활시, 서정시 등등을 포함한) 모두 빼어난 수작이며 빼어난 좋은 시다. 시의 고급화를 외치기 이전에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통속적인지 생각해 보면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모던포엠 3월호에서 소개하는 세편의 시는 소재의 측면을 고려하였다. 누구나 히 만날 수 있는 상황과 장소와 이야기가 있는 시를 소개한다.
첫 번째 작품은 [안개감옥]이라는 문현숙 시인의 작품이다. 요즘 사회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흡연과 금연에 대하여, 어떻게 보면 흡연에 대한 흡연자의 심리를 상당히 밀도 있게 분석하고 감성적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다.
안개감옥
문현숙
그들은 뭉쳐야 사는 종족들
산 자와 죽은 자도 반드시 들어서야 하는,
생의 정거장 같은 곳
선택받거나 버려진 자도 숨죽인 채,
주위를 곁눈질하다 슬쩍 스며들 수 있다
공중전화 부스를 닮았다거나 골방의 눅눅한 공기 같은,
어쩌면 아우슈비츠 가스실 같은 곳
안개에 묶인 유대인들이 칸칸이 빼곡하다
안개를 닮은 사람들
흩어지지 않으려 서로 등을 기대고 있다
마주 보면 불편한 먼 바다처럼 혼자 출렁이고 싶은,
그래도 그곳에선 외롭지 않겠다
실컷, 자유라는 안개를 뿜어 낼 수 있으니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한 개비 돛대를 귀에 꽂고
안개 감옥으로 들어선 사람들
만국 공통어를 내뱉고 있다
흡연 공화국엔 수인번호가 없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뭉치기 위해 혼자라도 먼저 들어서야 하는
안개 감옥 한 칸,
부옇다
첫 행이 매우 눈길을 끈다. 뭉쳐야 하는 종족과 안개감옥이라는 시제가 주는 안개의 불투명성, 감옥과 종족이라는 집합적 어감 사이 어느 지점에 시가 존재하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아마도 시인은 이 시를 구상하면서 흡연부스를 보며 머리에 연상되는 모든 것들을 촘촘하게 머리에 각인했을 것이다. 시인이 흡연자인지 비 흡연자인지는 필자도 모른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필자는 흡연자가 바라보는 흡연부스와 비 흡연자가 보는 흡연부스는 시적 발화점이 매우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화점이 다르다는 것은 시에서 매주 중요하다. 긍정의 관점과 부정의 관점, 그 차이 같은 관점이 소재와 언어의 결합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을 설정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문현숙 시인의 관점은 아마도 중간 지점일 것이다. 흡연을 부정하면서도 흡연자에 대한 일종의 연민 같은 부분도 뒤섞여 읽히기 때문일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도 반드시 들어서야 하는,
생의 정거장 같은 곳/
어쩌면 아우슈비츠 가스실 같은 곳
안개에 묶인 유대인들이 칸칸이 빼곡하다/
위 두 개의 관점은 사뭇 비슷하면서도 다른 공간과 이유를 내포하고 있다. 산자/ 죽은 자/ 생의 정거장이 가리키는 방향과, 안개에 묶인 유대인의 방향은 분명 시사하는 지향점이 다를 것이다. 결구로 끄는 힘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결구로 이끄는 힘은 한 가지 소재와 주제로 연결되어 끌고 가는 힘도 있고, 관점과 관점의 차이를 치밀하게 엮어 논리학에서 말하는 정/반/ 합의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도 존재할 것이다. 어느 방법이 옳다고 볼 수 없다. 온전히 시를 꾸려가는 시인의 선택의 몫인 것이다. 다만,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은 문현숙 시인의 시를 조밀하게 끌고 가는 방법을 선호하는 편이다. 너무 쉽게 결구 혹은 결론, 메시지가 드러나는 것보다는 결론에 가서 긍정하게 되는 것이 어쩌면 좀 더 세련되고 감각적인 시 쓰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안개를 닮은 사람들
흩어지지 않으려 서로 등을 기대고 있다
마주 보면 불편한 먼 바다처럼 혼자 출렁이고 싶은,
그래도 그곳에선 외롭지 않겠다
실컷, 자유라는 안개를 뿜어 낼 수 있으니/
여기서 안개는 시제로 나타낸 감옥이라는 배경을 떠올리게 한다. 안개를 닮은 사람은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다. 감옥 속의 배경은 서로 등을 기대고/마주 보면 불편한/그런 관계를 가진 무엇과 무엇들이다. 다시 한번 긍정과 부정을 인식하는 방법으로 그래도 그곳에서~/이라는 말로 관점을 비틀고, 실컷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부사를 사용했다. 시의 본문이 모두 이런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시적 표현은 의도적인 시선 유도와 정확한 계산에 의한 메시지 던지기 방식이라는 점이다.
흡연 공화국엔 수인번호가 없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뭉치기 위해 혼자라도 먼저 들어서야 하는
안개 감옥 한 칸,
흡연을 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읽히는 아우슈비츠/수인번호/ 감옥 한 칸/의 상징성은 매우 크다.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계몽적이다. 수인번호가 없다는 말은 포괄적이다. 모두가 해당되거나 모두가 해당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좀 더 확장하면 흡연을 할 때는 수인번호가 부여될 것이며 비 흡연 시에는 번호가 없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감옥에 들어서는 것은 선택의 몫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 작품의 보이지 않는 주제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 감옥 한 칸의 모습은 결구 한 단어에 귀결되고 있다.
부옇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거대한 흡연부스라고 가정하면 그 속의 우리는 안개에 묶인 유대인이며, 마지막 한 개비 돛대를 귀에 꽂은 수형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그런 삶의 배경은 늘 부옇다. 피든 안 피우든 결국 한 사람의 흡연자라도 있다면 모두 피우는 것과 같은 삶의 한 단면. 그 지점에 선 우리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선택받거나 버려진 자가 의미라는 종교적 의미의 인간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모두에게 울리는 삶의 경종을 시인이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나의 성긴 것 없이 잘 엮은 좋은 작품이다.
두 번째 작품은 피진철 시인의 [문득, 여기]라는 작품이다. 문득이라는 말은 시에서 많이 사용된다. 문득이라는 말은 전혀 생가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무의식에서 유의식으로 전환하는 전환점이다. 하지만 그 문득은 전혀 나와 상관없는 [갑자기]가 아니다. 나를 지배하고 있던 생각이나 화두, 혹은 매듭짓지 못한 무엇이 의식으로 도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문득은 전혀 문득이 아니다. 내 의식이 그것을 문득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며 동시에 문득이라는 말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전부터 나를 지배하고 있던 생각이 나를 불러낸 것이며 그 급작스런 부름에 당황한 내가 문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여기
피진철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명백한 단위가 없다. 지울수록 많아지고 잠길수록 얕게 거닐게 되는 곳, 어느 날 눈 감고 수평선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때 당신은 거기가 당신이 서있을 곳이라 일러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손가락 끝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세상의 중심을 향해 간다고 가지만 도착해 보면 항상 의도치 않은 곳에 서있다. 지금 여기는 당신이 버린 곳, 빈 방 허기같이 버릴수록 쌓이는 것이 있다. 매일 조금씩 천정을 들어 올리고 벽을 밀어내는 연습을 한다. 그럴수록 쌓여만 가는 당신의 이름, 이름들,
세상 끝은 온통 결말로 둘러싸여 있다고 당신이 일러주었다. 나는 세상은 꿈을 점치는 일의 연속이라서 결말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떠났다. 결국 시작과 도착이 같을 것이라는 대답을 손에 쥔 채 당신이 처음 일러준 곳으로 왔지만 당신도 결말도 이제는 없다.
생은 한 방향이란 것을 깨우치면서 모두는 앞이 아니라 온 길을 뒤돌아보며 길을 익힌다는 것을 알았다. 길은 길 스스로도 걷는 중이어서 내 보폭만을 고집하지 않게 되어서야 당신에게 당도할 수 있었다.
비로소 당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첫 번 째 소개한 문현숙 시인의 시, 긍정과 부정의 연결이 아닌, 하나의 소재와 주제를 결구까지 끌어간 점이 이채롭다. 또한 문득이라는 단어에 가장 적합한 상황을 연과 연 사이에 적절하게 배치하여 시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장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문득과 여기, 지금 내가 존재하고 생각하는 시점에 하필 당신이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비로소 당신이 보이는 이유를 세밀한 터치로 그려내고 있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문장의 곳곳에 문득과 여기에 대한 당위성과 개연성이 숨어 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명백한 단위가 없다/
어느 날 눈 감고 수평선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때 /
그날 이후 나는 손가락 끝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첫 연의 문장들이다. 명백한 단위가 의미하는 것은 혼돈이거나 혹은 실존과 부재의 차이 같은 모호한 경계를 이야기한다. 부재이면서 실존, 실존이면서 동시에 부재가 갖고 있는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다음 연에 그에 대한 주석 같은 문장이 도래한다.
세상의 중심을 향해 간다고 가지만 도착해 보면 항상 의도치 않은 곳에 서있다./
의도치 않은 곳, 여기, 문득 이렇게 정리하면 쉽게 이해할 것 같다. 그 의도치 않는 방향의 어느 귀결점에는 당신이 없다. 아니 당신이 버린 곳이다. 그 지점이 [여기]다. 여기에 대한, 여기가 문득이 된 것에 대한 당위성을 절묘하게 문장에 섞어놓았다.
지금 여기는 당신이 버린 곳, 빈 방 허기같이 버릴수록 쌓이는 것이 있다.
허기 같이 쌓이는 것들은 당신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어쩌면 정반대, 내가 부재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서로에게서 부재를 느낀다. 그 부재의 원인이 누구인지 모른 채 오직 부재만을 생각하고 기억한다. 그러다 문득, 여기가 생각나게 된다. 그래서 문득은 문득이 아닌 것이다.
모두는 앞이 아니라 온 길을 뒤돌아보며 길을 익힌다는 것을 알았다.
이 표현은 한 수 배우고 싶다. 앞이 아니라 온 길을 되돌아보며 길을 익힌다는 말속에 담긴 시인의 토로를 좀 더 깊이 있게 해석하고 싶다. 과거의 것에서 현재의 나를 보게 된다는 말이며 동시에 모두가 실수처럼 반복하고 있는 삶의 인연과 답습에 대한 자성을 불러일으키게 하기도 한다. 어쩌면 독백 같으면서도 짙은 공감이 가는 본문의 진행방향이 시적 미학의 본질은 이렇다 하고 강론하는 듯하다.
내 보폭만을 고집하지 않게 되어서야 당신에게 당도할 수 있었다./
비로소 당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수, 반복, 화합, 양보, 이해, 인정 등등의 단어로 결구를 설명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것에 해당될 자성의 외침이다. 같은 작품을 자주, 여러 번, 아니 문득 아무 곳에서나 반복해서 읽고 싶다. 흔히 잊기 쉬운 진짜 철학이 내재된 좋은 작품이다.
마지막 세 번째 작품은 홍철기 시인의 [밤의 중독]이다. 어떤 면에서 읽으면 다소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중독]이라는 단어가 주는 음울함, 회색빛을 가진 눈, 등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밤과 중독이라는 주제를 묘하게 일치시키는 수작이다.
밤의 중독
홍철기
떠나기 위해선 먼저 만나야 해요
오늘, 내 마지막 브레이크를 밟아 줄
당신이었으면 하는 밤이 와요
도로를 달리며 불야성인 라스베이거스를 생각하죠
혈관이 부풀어 오르고 목구멍 깊숙이 술병을 처박고
내 몸에 흐르는 피는 끓어오를 수 없어
여전히 당신이 지배하는 밤이에요
잠들지 않아 떠날 수 없는 라스베이거스
이곳에선 나를 반길 간판들이 취할 수 있도록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죠.
우리는 떠나기 위해 만났지만,
지금 마시는 술병에 돌아오지 않는 시간 몇 모금
술잔을 쥔 손과 바라보는 눈빛은 아는 사이였을까요
(언제 중독되었나요)
(우린 모두 중독자야)
(당신은 사랑을 믿나요)
(넌 무엇에 중독되었는지 알 것 같아)
당신은 왜 그렇게 사나고 묻지 않았죠
중독이란 서로의 등을 볼 수 없는 걸
뒤 돌아 서는 순간 라스베이거스를 떠날 겁니다
오늘은 중독될 수 없는 밤이 길어요
이 작품은 문현숙 시인의 [안개감옥]과 피진철 시인의 [문득, 여기]의 중간 지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를 풀어내는 방식이 그렇다는 것이다. 뚜렷하게 긍정과 부정의 방식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수 없는 양태, 한 가지 소재로 끌고 가는 것은 맞지만 그 표현의 깊이와 기술적인 면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는 시적 매력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중독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과 밤이라는 단어가 주는 동질감을 섞어 생각해 보면 본문이 쉽게 들어올 듯도 한데. 막상 본문을 대하면 쉽게 풀어간 것이 아닌 중독에 대한 진술이 족자로 하여금 모호성을 키우게 되는 점이 신선하다.
(언제 중독되었나요)
(우린 모두 중독자야)
(당신은 사랑을 믿나요)
(넌 무엇에 중독되었는지 알 것 같아)/
필자는 위 괄호로 표기된 부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언제/우린/당신은/넌 무엇에/로 이어지는 점층적 중독의 의미가 시인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중독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보니 너도 나도 모두 중독 중이다. 여기서 사랑이 등장한다. 밤 = 사랑이라는 등식을 성립하게 만드는 것이다. 밤에 중독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중독된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반대로 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대상이 사랑이 아닌 밤이라는 주제에 중독이 아닐까? 어쩌면 이 시의 주제는 사랑도 밤도 아닌 [나]개아적인 [나]에 근원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에게 중독된 것을 사랑이라는 단어를 빌려와 밤에 걸친 것이라는 심증이 든다.
떠나기 위해선 먼저 만나야 해요/
우리는 떠나기 위해 만났지만,/
중독이란 서로의 등을 볼 수 없는 걸/
문득,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가 생각난다. 포스터 화면에 크게 나온 주인공의 표정, 영화는 남성의 중압감, 절망, 그리고 알코올 중독으로 죽어가는 연인에게 술병을 선물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시인이 영화를 보고 영화 이야기를 시로 풀어낸 것인지 그 의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독에 대한 경고는 이 시 한 편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마시는 술병에 돌아오지 않는 시간 몇 모금/
뒤 돌아 서는 순간 라스베이거스를 떠날 겁니다/
혈관이 부풀어 오르고 목구멍 깊숙이 술병을 처박고
내 몸에 흐르는 피는 끓어오를 수 없어
여전히 당신이 지배하는 밤이에요/
중독이 지배하는 것은 본질의 [나] 중독에게 지배당한 것은 본질이 아닌 [나]그 간격을 적절하게 넘나들며 밤과 중독과 라스베이거스와 돌아오지 않는 시간 몇 모금을 연결하고 생각해 본다. 중독의 본질은 아래 소개하는 시인의 본문 중 한 구절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넌 무엇에 중독되었는지 알 것 같아)/
중독의 매개체가 술이던, 사람이던, 사랑이던, 모두 삶의 범주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삶에 중독된 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살고 있다. 그래서 인생은 **하다. **에 대한 답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어쩌면 필자는 가장 통속적인 곳에 시의 지향점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급이라는 것에 서서히 중독된 채. 3월이다. 독자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맺는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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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선님의 댓글
붉은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닌척 고급에 환호하는 반성의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