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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主觀에서 객관客觀으로[섬에 살진 않아도/신진향 외 2] 글- 김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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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80회 작성일 19-04-3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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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관主觀에서 객관客觀으로

 

섬에 살진 않아도/신진향

풋고추를 정선하다가/김황흠

기일 즈음/ 김령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주관적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만의 견해나 관점을 생각의 기초로 출발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외부 세계나 현실 들을 인식하고 체험하며 그것에 작용을 가하는 의지적 존재를 주관이라고 한다. 현대 분석 철학자 도널드 데이비슨의 저서 ‘주관 상호주관 객관’이라는 저서에 보면 주관과 객관의 상호 공유하는 것을 우리 자신의 마음에 관한 지식, 다른 사람의 마음의 내용에 관한 지식, 공유된 환경에 관한 지식, 이 세 종류의 지식 각각의 본성과 지위, 세 가지 지식과 공유된 지식의 연결된 것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진리, 인간의 합리성, 언어, 사고, 세계 사이의 관계가 잘 조명된 것을 알 수 있다.

 

주관은 객관과 더불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기본적 심성이며 생각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쓰는 글에서 흔히 사용되는 기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 객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객관은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사건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거나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좀 더 깊게 보면 세계의 본질은 주관적 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정신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는 서양 철학에서 객관적 관념론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의지나 인식 등의 정신 작용이 향하는 대상을 객관이라 정의하면 맞을 것 같다.

 

주관과 객관에 대하여 서설이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주관적 의지로 쓰인 글인지, 객관적 관점에서 쓰인 글인지 하는 문제가 어쩌면 시적 소통이라는 것에서 가장 밀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시를 쓰다 보면 종종 소통의 부재라는 말을 많이 한다. 소통의 부재는 나의 말과 너의 말이 다르다는 말이기도 하며 내 인식의 세계관과 네 인식의 세계관이 다르다는 말과는 좀 더 깊이 있는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바꿔 말하면 세계관의 차이가 아니라 표현상의 차이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차별이 아닌 그것에 대한 언어적 기술의 방법이 다르다는 말이다. 쉬운 예로 달을 달이라 표현하는 것과 어머니라고 표현하는 것의 차이 같은 것이다. 시에서는 달을 달이라 말하는 것을 객관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달을 어머니라 표현하는 것을 주관적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칫 달을 어머니 이후의 좀 더 다른 화자의 주관적 느낌 혹은 상상에 의해 달을 ‘아가미’라는 단어로 형상화해서 시를 쓴다면 독자 입장에서는 단순하게 달 = 아가미에서는 아무것도 연상하거나 상상할 수 없게 된다. 시의 본문에 달이 아가미로 변환하는 과정의 개연성이나 당위성이 명징하게 표현되었다면 달 = 아가미의 등식에 고개를 끄덕할 수 있지만, 그조차 본문에 개연성을 좀 더 비틀어 더 많은 수식어로 알아보기 힘들게 했다면 달 = 아가미는 시쳇말로 비문에 좀 더 가까운 문장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문은 문법이나 어법에 어긋나는 문장을 말한다. 또한 의미적으로는 해독하기 어려운 문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대시 중 하이퍼 계열의 시들은 사실 해독이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도 절반도 이해 불가한 시들이 많다. 엄밀하게 말하면 시 한편 읽으면서 난수표를 옮겨 쓰듯 ‘해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그들만의 리그 에서는 그들만의 언어로 (지극히 주관적)서로 소통이 될지 모르지만 시는 보편타당한 일반 독자를 절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시는 절대적으로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대두한다. 소통이라는 말은 나의 언어를 상대방이 정확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어법이 돼야 성립되는 말이라는 기초로 놓고 생각하면 소통되지 않는 문장은 어쩌면 주관적인 문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화자의 세계관을 내가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세계관에 화자가 자칫 몰이해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주체가 화자가 아닌, 독자에게 있다고 가정할 때 주관적으로 쓰인 글을 어떻게 객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 퇴고하는 형태의 올바른 결론이라고 생각된다.

 

시는 냉정하게 볼 때, 화자의 주관적 세계며 인식이며 통찰이며 성찰이다. 물론 그것이 스스로 보내는 편지 형식의 일기라면 화자의 주관적 세계관은 화자에게 스스로 인식되기에 아무 문제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자를 표용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상상과 연상과 이미지와 문장으로 좋은 작품을 썼다 한들 읽어 줄 독자가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바로 그 간격을 줄이는 것이 주관에서 객관으로 변환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모든 글을 객관적으로 쓴다면 가장 맛없는 글이 될 것이며 모두 주관적으로 쓴다면 더더욱 맛없는 글이 될 것이기에 화자가 본 것을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화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일이며 그것이 선행되어야 글이 산다. 그렇기에 모든 시가 각자 다르고 우리는 그것을 시의 색깔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주관적인 철학이나 사유가 객관의 옷을 걸치지 않으면 한정된 세계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른바 공감이라고 하는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화자의 세계가 독자의 세계로 인입되거나 올바르게 전달될 때 비로소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자신의 것을 타인의 것으로 동화할 수 있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시의 규범이라고 보면 타당할 듯싶다.

 

시를 씀에 있어서 주관과 객관의 구별 및 혼용은 위에서 언급한 것으로 가름할 수 있으나 또 한 가지 주관과 객관의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이 시에 대한 평가라는 문제다. 시에는 정답이 없기에 어느 문학상에 혹은 신춘문예에 당선한 시가 반드시 다른 문학상 또는 신춘문예에 당선한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종종 문학상에 응모했다 좌절하는 경우 심사위원의 탓을 우선 하게 된다. 심사위원의 성향에 따라, 심사위원의 글 색 혹은 경향에 따라 내 글이 당선되지 못했다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올바른 자책이 되지 못한다. 좋은 시는 어디서든 좋은 시라고 읽히는 것이다. 다만, 문학상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더 좋은 작품, 혹은 해당 기관에서 요구하는 정체성, 해당 기관에서 요구하는 목적성에 따라 얼마든지 평가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결론은 좋은 시는 어떤 평가기관에서든 좋은 시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객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드문 경우지만 이러한 객관에 위배되는 결과를 우린 종종 볼 수 있다. 당선작에 대하여 모두가 인정하는 객관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별문제 없을 것이나,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당선작을 당선작의 품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것 자체도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자칫 해당 기관의 기준에 너무 주관적으로 적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오해가 들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평가하는 심사위원의 입장에서는 당해 작품이 가장 우수한 것이라는 결론을 맺었겠고, 나름 그 타당성도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타당성 자체에 의문점을 갖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객관과 주관의 상호 간섭 내지는 간극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점은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읽는다는 것, 시를 평가한다는 것, 시를 퇴고한다는 것, 등등의 모든 글의 완성체를 향한 기준은 절반의 주관과 절반의 객관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어야 좋은 글이 된다는 점이다. 한 편의 코미디가 사람을 웃게 만들기까지 관련된 희극 배우들은 수많은 시간 콘티를 짜며 고뇌하고 때론 울고 때론 좌절하며 한 편을 만들었을 것이다. 관객의 웃음 반대편에 배우들의 울음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떤 문학상이든 당선작은 그만한 노력과 그만한 아픔을 스스로 녹여내는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한다. 당선작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어떠하든 그것은 객관과 주관의 차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 편 씁쓸해질 때가 있다는 것은 필자 역시 그저 평범한 필부에 지나지 않기에 그럴 것이다.

 

최근 제7회 제주 4.3 문학상 당선작에 대하여 세간의 평가가 상이하게 다른 것을 자주 볼 수가 있다. 당선작에 대해 평가한 강경우 시인의 평론 원문을 저자와의 협의를 거쳐 본문 전체를 인용해본다. 인용하는 이유는 당선작에 대한 필자의 개인 견해가 아님을 밝힌다. 또한 당선작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우선 밝힌다. 다만, 주관과 객관에 대한 시선의 차이, 본 글제인 주관에서 객관으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인용임을 밝힌다.

 

[특별기고]제주4.3평화문학상, 상금 2.000만 원짜리 詩라는 글을 읽고

 

- 강경우 시인

 

/사월 볕 간잔지런한 색달리 천서동. 중문리 섯단마을로 도시락 싸고 오솔길 걷기. 늦여름 삼경에 내리던 동광 삼밧구석의 비거스렁이. 세 살 때 이른 아침 덜 깬 잠에 보았던 안덕면 상천리 비지남흘 뒤뜰의 애기 동백꽃, 동경에서 공부하고 온 옆집 오빠가 들려준 데미안이 씽클레어를 처음 만났을 때의 분위기는 남원면 한남리 빌레가름. 갓 따낸 첫물 든 옥수수의 냄새를 맡았던 신흥리의 물도왓. 친정집에서 쌔근거리면서 자는 아가의 나비잠, 던덕모루. 예쁜 누이에게 서툴게 고백하던 아홉밧 웃뜨르 삼촌. 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살았을 것 같은 가시리 새가름의 설원. 어머니가 끓여주던 된장국을 이방인인 그이가 끓여주던 한경면 조수리 근처. 매화차의 아리다는 맛을 사내의 순정이라고 가르쳐준 한경면 금악리 웃동네. 옛집에서 바라보던 남쪽 보리밭의 눈 내리는 돌담을 가졌던 성산면 고성리의 줴영밧. 명월리 빌레못으로 들어가는 순례자의 땀범벅이 된 큰아들. 해산하고 몸조리도 못 하고 물질하러 간 아내를 묻은 화북리 곤을동. 친어머니를 가슴에 묻은 아버지마저 내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애월읍 봉성, 어도리. 이른 아침 골목길의 소테우리가 어러렁~ 메아리만 남긴 애월면 어음리 동돌궤기. 지슬 껍데기 먹고 보리 볶아 먹던 누이가 탈나서 돌담 하나 못 넘던 애월면 소길리 원동. 고성리 웃가름에 있던 외가의 초가집에서 먹던 감자. 동광 무등이왓 큰 넓궤 가까이 부지갱이꽃으로 소똥 말똥 헤집으며 밥 짓던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 깨어진 쪽박이란 뜻인 함박동, 성공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던 그곳에서 태어나 삼촌들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던 소설가. 초여름 당신과 손잡고 바라보던 가파도와 마라도, 알뜨르까지의 밤배. 지금까지 “폭삭 속아수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제주 삼촌들과 조케들, 잃어버린 마을(김병심 작.「눈살 때의 일」 전문). 출처 : 영주일보(http://www.youngjuilbo.com)/

 

이글을 시로 읽어야 한다니, 참으로 곤혹스럽다. 백번 양보하고 시로 읽어보려 해도, 눈여겨 볼만한 비유나 함축도 없다. 그렇다고 리듬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관형어구절로 덧씌운 지명이나 명사 및 명사형 어구의 수평적 나열, 마치 비슷한 규격의 벽돌 쌓기와 뭐가 다른가. 소설의 서사문이나 일반 산문이라 해도 현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묘사로써 변화를 주기도 하는데, 하물며 시라고 하는 글이 한결같이 수식어를 덧씌운 설명문뿐이다.

 

/색달리 천서동. 오솔길 걷기. 동광 삼밧구석의 비거스렁이. 안덕면 상천리 비지남흘 뒤뜰의 애기 동백꽃, 남원면 한남리 빌레가름. 신흥리의 물도왓. 던덕모루. 아홉밧 웃뜨르 삼촌. 가시리 새가름의 설원. 한경면 조수리 근처. 한경면 금악리 웃동네. 성산면 고성리의 줴영밧. 화북리 곤을동. 애월읍 봉성, 어도리. 애월면 어음리 동돌궤기. 감자. 자장가. 함박동. 소설가. 밤배./

 

*필자주 : ‘한경면 금악리’가 아니라 ‘한림읍 금악리’이다.

 

이런 지명과 명사를 수식하기 위해 동원된 관형어구절들은 ‘4.3’과는 어떤 관련성도 없어 보인다. 특히 /동경에서 공부하고 온 옆집 오빠가 들려준 데미안이 씽클레어를 처음 만났을 때의 분위기는 남원면 한남리 빌레가름./ 그러니까 이 말은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의 촌스러움’과 ‘빌레가름’이 그렇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그조티시즘(exoticism)의 냄새를 풍기자고 끌어들인 것인가. 그리고 /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살았을 것 같은 가시리 새가름의 설원./ 이 또한 ‘나타샤’란 러시아식 이국명과 함께, 당시에 백석은 무척 세련된 남자로서 기생 애인에게 쥐어주었다는 시(「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정서를 ‘가시리 새가름의 설원’과 연결시킨 의도 또한, 시적 대상인 4.3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심사자들이 밝힌 ‘세 사람의 작가’란 헤르만 헤세와 백석, 그리고 /....삼촌들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던 소설가./ 곧 『순이 삼촌』의 작가 “현기영”까지 포함해서이다. 이 “현기영”은 4.3 평화문학상 운영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하다.

 

/선자들은 오랜 시간 논의 끝에 시 한편 속에 세 명의 작가가 등장하는 자칫 흠이 될 수도 있는 요소를 잘 극복하고 주제의식과 시적 완성도를 견지한 <눈 살 때의 일>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주제 의식과 시적 요소를 견지”하였다는 것인데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서는 도저히 주제가 뭔지, 생각해낼 수도 없고, 결구인가 싶은 끝의 시구 또한 /지금까지 “폭삭 속아수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제주 삼촌들과 조케들, 잃어버린 마을./ 보는 바와 같이 관형 어절로 크게 덧씌운, '그런 사람들과 마을./이므로 앞의 구절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다만 /제주 삼촌들과 조케들, 지금까지 “폭삭 속아수다”/가 사실상 결구인 셈인데, 그것마저 조케들과 삼촌들을 수식하는 관형어의 인용구로 묶여있는 것이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정조의 편안함, 제주어에 스며있는 제주서정, 그 속에 빛나는 민중적 삶의 공간과 시간의 역사가 아름다웠다. 또한 자칫 흠이 될 수도 있는 요소를 잘 극복하고 주제의식과 시적 완성도를 견지했다”/

 

이 당선작 속의 제주어는 “폭삭 속아수다”를 빼면, 모두 지명뿐이다. 지명이므로 굳이 그 뜻을 헤아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실 요즘의 제주 젊은이들은 제주어를 잘 모른다. 오죽하면 학교에 제주어 시간을 배정했을까 싶다. 이번 심사위원들도 모두 타지 사람이다. 제주어를 전혀 모를 것이다. 하니 신비하게는 보이겠지만 말뜻은 전혀 모를 것이다. 여기 인용어로 사용한 /폭삭 속아수다/가, 사실은 의미를 가진 시구이다. 이 말을 사전에서 보면 ‘많이 수고하다'의 제주 사투리라고 되어 있다. 그런가? 이 말의 뜻을, 제주 사람들도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한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알고 있을까? “폭삭 속아수다” 왜냐하면 아침 목숨이 저녁에까지 붙어있을지도 모르는 살육의 현장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폭삭 속아수다”는 어딘가 불편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폭삭 수고 해수다” 무엇을 눈치 보느라 수고했다는 것인가? 다랑쉬 굴속 사람들처럼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살았다고 약 올리는 것인가. ‘수고 해수다!’ 이래서 필자는 처음도 끝도 없는 글, 그저 잡글과 다름 아니라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옛 제주의 지식인, “김석익(金錫翼)”이 붓으로 쓴『탐라 기년』의 구절을 보자.

 

 

 

/ㅇ按宋堯讚咸炳善之前後掃蕩 吁共慘矣. 當是之時居於兩間者 何以則可乎! 旣逼於山軍之恐喝 又刼於軍警威脅 更迫於西北靑年之跋扈 生殺與奪 惟視這邊之操 縱進退殺人 如麻朱殷載路

 

살피건대 송요찬, 함병선의 전후 소탕(휩쓸어 모조리 없애 버림)은 아! 모두 참혹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양쪽 사이에 끼어 살았던 사람들은 어찌했으면 좋았을까? 이미 산군(좌익성향의 무장대)의 공갈로 핍박당했고, 또 군-경의 위협에 겁먹고 있는데, 또다시 서북 청년의 발호(제멋대로 날뛰며 행동함)로 핍박당한다. 살리고 죽이는 일과 재물을 주고 뺏는 일이, 오로지 이들의 마음 먹기에 달려있었다. 마침내 나아가고 물러서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마치 삼을 베듯 하니 붉고 검은 것(주검)들이 길 위에 널려있었다.

 

吁嗟乎! 不作山中之俘虜 合死軍警靑鋒鏑之下 乃已於是 人皆重足側目 未知 死者爲得乎 生者爲失乎. 狼顧鴙脅視息 朝不謨夕入山之多 宲由於是. 可謂有史以來 未有之慘禍矣. 及至己丑春 內務長官 申性謨之來 始停殺戮之政 然延至庚寅六二五事變發生 稍有知識 負望之人 一掃殆盡 噫嘻悲夫.

 

아아! 산중의 포로가 되지 않으면 군인, 경찰, 서청의 총칼 아래 다 죽어야만 끝이 난다는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너무 무서워서, 죽는 것이 이득이 되는지, 사는 것이 손실이 되는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무서워 이리처럼 자주 뒤돌아보고 꿩처럼 두리번거리면서 숨조차 쉬기 어려운, 아침 목숨이 저녁을 기약할 수 없어 산에 들어간 사람이 많았던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다. 가히 유사 이래 일찍이 없었던 참화라고 말할 수 있다.

 

급기야 기축(1949)년 봄에 이르자 내무장관 申星謨가 내려와서야, 비로소 살육정책이 멈췄다. 그렇지만 庚寅(1950)년 6․25 사변 발생까지 이어졌고 조금이나마 지식이 있거나 덕망이 있는 사람은 단번에 쓸어 다 죽이고 말았다. 아아! 슬프고 또 슬프다!(번역, 강경우)/

 

보는 것과 같이, 이런 때를 오로지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해, 낭고치시(狼顧鴙視), 이리처럼 뒤돌아보고 꿩처럼 두리번거리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폭삭 수고했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다른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곧 역사적으로 저 여몽(麗蒙) 시대와 조선, 그리고 왜정의 수탈과 4.3의 생사여탈을 장난처럼 자행했던 자들에게까지, 그저 속고만 살았으므로 “폭삭 속았다”는 뜻으로 쓴 말은 아닐까 해서이다. 4.3의 막바지에도 비행기 격문으로 귀순하면 살려준다고 하므로, 피난처럼 입산하였던 일반민들은 하산하였지만, 다시 죄의 경중을 가린다고 고문, 살육의 연속이었으니 “신성모”란 자에게까지도, 제주인들은 ‘속은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에 하는 말이다.

 

‘폭삭, 속아수다!’

 

문맥에 따라서, 또는 어감에 따라서 언어란 것은 얼마든지 다른 뜻을 내포하게 된다. 때문에 이 말 또한 다르게 들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이 말은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강경우]

 

*출처 : 영주일보 특별기고

*저자 강경우 시인과의 기고 협의완료

*본 의견은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모던 포엠 5월호에서는 주관에서 객관으로에 부합되는 글 세편을 선별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첫 작품은 신진향 시인의 [섬에 살진 않아도]라는 작품이다. 작품은 시제 그대로 섬에 살지 않아도 섬에 사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산다는 화자의 독백이 화자가 느낀 삶에 대한 관조 내지는 관점에 맞춰 재조명되는 좋은 작품이다.

 

 

섬에 살진 않아도

 

신진향

 

섬에는 안 가봤지만 바람은 알아요

속에 담긴 소금기는 바다로부터 와서

혀를 내밀고 하루 종일 다니면

입안에서 짭짤한 맛이 흩어져요

언젠가 당신이 핥아본 때가 있었죠

당신의 맛이 퍼지니까 당신도 섬이겠다 싶었어요

외로움을 잊고 싶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쏟아져요

날꽃이 빼곡해서 꽃무덤이에요

저마다의 빈틈에서 짭짤한 냄새가 나요

머리카락마저 엉긴 넝쿨 비비는 살은 패이기 좋아요

섬의 내연에서는 파도가 잔잔해지는데

파도는 쉬고 싶은 거라고 믿었어요

외연에서 그렇게 거칠게 파고들 거란 건 생각을 못했어요

경험해 보지 않는 것들은 흐를 뿐이란 걸

타인이 알려준 말은 순화된 욕이란 걸 늦게 알았어요

내게도 짠맛이 나요

섬에는 안 가 봤지만,

섬인 듯 바람인 듯 내가 흩어져요

 

필자는 이 작품을 읽으며 ‘섬’이라는 것을 여러 부분에 대입해 보았다. 섬 = 글/ 섬 = 삶 / 섬 = 관계/ 섬 = 철학/ 섬 = 사유

 

섬은 일반적으로 사방이 물로 둘러쌓은 육지를 의미한다. 단어적인 의미 이외에 섬은 고립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시에서 종종 소재로 사용되는 섬은 경계 너머 혹은 경계 그 자체라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섬은 나와 같으면서도 나와 다른 이미지와 심상을 가진 존재로 보인다. 내 속에 섬이 있으며 섬을 가진 나 역시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섬이 되기도 한다.

섬은 때때로 함석헌 시인의 시처럼 ‘골방’이라는 의미로 내게 인식되기도 한다. 섬은 내가 갈 수 없는 그러나 언제나 가고 싶은 일종의 방향이며 목적이며 내재된 본향 같은 상징이 되기도 한다.

 

‘섬’의 아이덴티티는 고립이다. 하지만 그 속엔 바람이 불기도 하고 날꽃도 빼곡하며 바다의 섬은 짭짤한 맛을 갖고 있기도 하다. 내 시선의 고립과 섬이 갖고 있는 섬의 본성이 반드시 ‘고립’이라는 단어의 같은 항렬로 정의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섬이라는 단어와 어감에서 공통적인 분모를 찾고자 한다. 어쩌면 그것이 섬이라는 주관에서 섬이라는 객관으로 변화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시적 모티브가 그렇다는 말이다. 어떤 관찰과 이유가 나와 동화되는 과정 그곳에서 동질의 느낌을 획득하게 되는 것. 그 획득한 동질이 독자와 교감하는 지점이 가장 좋은 시의 시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섬에는 안 가봤지만 바람은 알아요

 

시의 첫 행이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바람은 안다는 의미심장한 구절로 시작되는 섬의 이야기는 섬에 살진 않아도라는 본질의 구분(경계와 경계 너머)에서 시작하면서도 바람은 안다는 동질성을 갖는다. 객관에서 주관으로 첫 행을 다져놓은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언젠가 당신이 핥아본 때가 있었죠

당신의 맛이 퍼지니까 당신도 섬이겠다 싶었어요/

 

저마다의 빈틈에서 짭짤한 냄새가 나요/

 

경험해 보지 않는 것들은 흐를 뿐이란 걸

타인이 알려준 말은 순화된 욕이란 걸 늦게 알았어요/

 

섬은 일종의 노스탤지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화자에게는. 시인은 관계와 관계에 대하여 ‘섬’이라는 상징이 가진 일반적 느낌을 자연스럽게 글에 입혔다. 그러면서도 저마다의 빈틈, 타인이 알려준 말은 순화된 욕, 당신도 섬이겠다 싶었죠 등의 표현으로 자신의 감정을 빗대 말하고 있다. 닿을 수 없고 살진 않는 곳의 풍경은 어쩌면 시인이 현재 살고 있는 삶의 대부분 혹은 이데아의 결정과 동일한 시선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구에서 그런 심증에 대한 확증을 깊이 갖게 된다.

 

내게도 짠맛이 나요

섬에는 안 가 봤지만,

섬인 듯 바람인 듯 내가 흩어져요

 

섬에 살진 않지만 나는 섬이기도 하고, 섬이 되고 싶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섬이 되었다는 사유의 깊이가 대단히 매력적이다. 결국 우린 모두 섬이면서 동시에 섬이 되기도 하는 섬의 배후에 있는 섬의 본질을 보는 시인의 혜안이 웅숭깊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다. 시가 담고 있는 내재율이 남도

가락이 되어 섬의 허리를 휘돌고 있다는 좋은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두 번째 작품은 김황흠 시인의 [풋고추를 정선하다가]라는 작품이다.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 ‘정선’은 치밀하게 잘 가리어 뽑다라는 뜻의 한자어다. 精選, 시인의 전남에서 농사를 짓는 것으로 추정된다. 시는 어느 날의 풋고추를 선별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다 그 속에 담긴 푸른 벌레 한 마리에서 시의 모티브를 얻었다. 자루 속에 담아 둔 풋고추 속에 살아있는 벌레 한 마리, 그 벌레의 생존 법칙에서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을 발견했다.

 

풋고추를 정선하다가

 

김황흠

 

하우스 풋고추 끝물을 정리한 푸대를 가져와

깐 자리에 털어놓으니

청양고추가 와르르 쏟아진다

매운 내도 함께 쏟아져 나오는 고추를

침침한 불빛 아래서

침침해진 눈으로 정선을 하는데

푸른 벌레 한 마리

꿈틀꿈틀 거린다

오매, 저 독한 거 봐라

메운 내에 꿈쩍도 않고

살만 통통 쪘네

캄캄한 푸대 속으로 잠행하여 보낸 짧은 시간

거기가 동면하기 딱 좋은 곳이라 생각했을까

잘못 든 잠이 빚은 동면에 든 쐐기를

저보다 큰 고추 하나로 지긋이 뭉개 버리는데

그조차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혹독한 겨울, 살아남기 위해 천둥벌거숭이가

벼린 쐐기 발로 발버둥이 친다

 

본문은 전체적으로 부러 쉽게 썼다. 쉽게 썼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억지로 꾸며내거나 지어내거나 수사를 비만하게 차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썼다. 객관에서 주관으로의 전이가 다시 객관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풋고추를 담아놓은 포대를 와르르 쏟아내자 그 속에 푸른 벌레, 얼핏 안 어울리는 조합에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삶의 외경이다. 시인의 푸른 벌레에 초점을 맞췄다. 삶의 모든 희로애락이 포대에 담긴 풋고추라면 푸른 벌레는 아마도 시인 자신이 아닐까 싶다. 그 푸른 벌레의 포대 속 유영은 보기에 애처로울 정도다.

 

오매, 저 독한 거 봐라

매운 내에 꿈쩍도 않고

 

오매/ 저 독한/ 매운 내/ 삶이다. 그 독하디독한 삶의 환경 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아 있는 푸른 벌레 한 마리 그는,

 

거기가 동면하기 딱 좋은 곳이라 생각했을까

잘못 든 잠이 빚은 동면에 든 쐐기

그조차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

혹독한 겨울, 살아남기 위해 천둥벌거숭이가

벼린 쐐기 발로 발버둥이 친다

 

우린 그 푸른 벌레의 몸짓에서 무엇을 연상하는가? 시인? 나? 우리? 좀 더 크게 연상해서 내 모습이고 우리 이웃이고 작금을 사는 청년들이며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시의 참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는 먼 곳에 있지 않다. 별과 하늘과 이상과 꿈과 현란한 언어적 수사의 방만함에 있지 않다. 시는 그저 삶이다. 오늘 아침이며 내일 아침이며 모레 아침이다. 보이는 곳에서 보지만 말고 한 걸음 더 나가면 바로 그 지점에 도사리고 있는 시라는 놈을 만나게 된다. 김황흠 시인의 시는 그래서 친구 같고 고향 같고 친숙하다. 오독이나 해석의 오류라는 여지가 없다. 사전 한 줄 찾을 것도 별로 없다. 그가 삶에서 시를 찾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삶은 객관과 주관을 모두 포용하고 있는 큰 포대 자루다. 벼린 쐐기발로 발버둥이 치는 모습이 자꾸 어룽거린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매운 동면을 하고 있을까? 제 몸보다 큰 고추 하나에 짓눌려 있는 것은 아닌지, 큰 고추 하나를 짓뭉개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품에서 삶의 향기가 모락모락 솟는다. 추운 날 만두 찌는 솥에서 김이 올라온다. 포근한 구름이다.

 

마지막 소개할 작품은 김령 시인의 [기일 즈음]이다. 아마도 작품은 시인의 친구 혹은 지인이 사망하고 제를 지내는 기일 즈음에 시인이 그를 회상하며 그를 기리기 위해 쓴 작품으로 추정된다. 김령 시인의 작품 역시 자연스러움에 그 매력이 넘친다. 어떤 커다란 것에 의존하지 않고 주변의 이야기 혹은 자신의 이야기에 주목하여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더 큰 글을 쓰는 자세로 가장 적합한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시’ 결국 그것 역시 삶이라는 범주 속 삶의 이야기 아닐까 싶다. 살다 보면 부득이 관계를 맺고 산다. 그러다 어느 날 그 관계가 툭 끊어진 연처럼 나와의 관계가 더 이상 나의 관계가 아닌 타인의 관계로, 타인의 일이 되어버릴 때 요령부득하다. 산다는 기억한다는 말이다. 내가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타인을 기억하고 산다는 것이다. 그조차 없다면 나의 기억 속에 그가 없다면 그도 없고 나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기일 즈음

 

김령

 

꿈속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타임 슬립처럼 자꾸 결말을 바꾸어 꾼다

꿈의 끝마다 아프고 아프다

 

아스팔트에 몸을 뉘던 꽃잎

살짝 뒤채어 풀숲에 내려앉듯, 그날

퇴근길 찍혔던 부재중 전화를 받았다면

너는 삶 쪽에 안착했을까

 

감잎 아래서 야무진 꿈을 말하던

넌 소읍의 성공한 동창이었지

 

홀 어머니의 육 남매 중 막내

대도시로 유학 온 열일곱 살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도 했다고

 

일주일간 한마디도 않던 때가 있었다고

삼십 년이 지나서야 털어놓았지

 

아내와의 지나간 불화를 얘기할 때도

누구나 한 두 개쯤 간직한 생존의 흉터라고 믿었지

 

어떤 상처들이 영원히 아물지 못하는 걸까

사월은 바람도 아래서부터 일어

여린 감나무 잎, 하늘 향해 살짝 팔을 쳐든다

 

그곳에서 평안하니?

 

지는 꽃잎에 편지 보내기엔

참 멀구나, 너 있는 곳

 

이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별은 뜻하지 않게 찾아오거나 간헐적이기에 익숙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의외로 우린 이별에 익숙하게 된다. 아이러니하지만 시간이라는 것은 무의식중에 익숙 이라는 단어로 우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잊힌다는 것은 무서운 말이다. 세상과 세계와 나를 단절하게 하는 말이다. 누군가를 기억해 준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말이다. 살아있는 한 기억해 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기일 즈음에 그와의 추억 혹은 그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나의 실수, 그에 대한 연민의 정, 그에 대한 아쉬움을 이토록 아름답게 기억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아마, 그곳에 있는 그는 최소한 평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작품 중 한 부분이 생각난다. ‘그가 떠난 것인가? 내가 남은 것인가?’

 

남은 사람과 떠난 사람의 기준은 현실이다. 현실에 존재한다면 남은 것이고 없다면 떠난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깊게 생각하면 현실에 존재한 내가 떠난 것이고 현실에 없는 그가 남은 것이 아닐까? 너무 큰 비약일까? 눈에 보이는 것만이 현실이라는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 대사가 기억난다. 정말 그럴까? 지금 이곳이 현실일까? 라는 다소 주제와 동떨어진 생각을 하게 만드는 김령 시인의 작품이다.

 

꿈의 끝마다 아프고 아프다/..............................회한

 

퇴근길 찍혔던 부재중 전화를 받았다면

너는 삶 쪽에 안착했을까/.................................자책

 

어떤 상처들이 영원히 아물지 못하는 걸까

사월은 바람도 아래서부터 일어..........................그리움

 

그곳에서 평안하니?

 

지는 꽃잎에 편지 보내기엔

참 멀구나, 너 있는 곳/.....................................인식

 

어느 경우, 웅변보다 잔잔한 말에 더 솔깃할 때가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아플 때가 있다. 김령 시인의 시가 그렇다. 과하지 않게, 크지 않은 목소리로 그의 기일을 기억하며 그를 회상하는 독백의 어조에 필자 역시 스며들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발생하는 필연의 한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구가 오랫동안 귓속에 머물러 있을 것 같다.

 

참 멀구나, 너 있는 곳, 그곳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멀지만, 참 멀지만 늘 바로 곁에, 혹은 옆에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리움의 교집합 장소 같은 곳일 것이다. 최소한 내가 기억하고 회상하는 동안은.

 

세 작품을 감상하며 공통으로 드는 생각은 과도한 수사의 남발이 없다는 점이다. 또한 감상의 동질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린 혹시 너무 먼 곳에서 시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객관이 너의 주관이 되는 것에 현혹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때론 나의 독선적 주관이 너의 객관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지? 고민하며 시를 쓰면 좋겠다. 어쩌면 객관이든 주관이든 모든 초점의 조리개는 언제나 개방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최대한 넓은 광각으로. 바로 그 지점에서 시를 쓰면 아주 좋은 작품 하나 건질 것 같다. 이제 5월이다. 객관적 오월을 주관적 오월로 변환하여 다시 눈 크게 뜨고 보고 싶다. 삶을. 맺는다.

 

글/ 김부회 시인, 수필가,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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