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속, 암시暗示에 대한 단상/파리지옥(문현숙외 2) > 내가 읽은 시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시마을 Youtube Channel

내가 읽은 시

  • HOME
  • 문학가 산책
  • 내가 읽은 시

    (운영자 : 네오)

 

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작품명/시인)

가급적 문예지에 발표된 등단작가의 위주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자작시는 삼가바람) 

12편 이내 올려주시고, 특정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詩속, 암시暗示에 대한 단상/파리지옥(문현숙외 2)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1,073회 작성일 19-05-29 10:44

본문

  

[평론] 詩속, 암시暗示에 대한 단상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당신도 부활을 꿈꾸나요, 이 도시에서/김비주

벽을 뜯는 사람/이미영

파리지옥/문현숙

 

 

암시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고 넌지시 알리는 것을 말한다. 심리학이나 철학에서는 신념이나 행동에 있어서 사람이 무비판적으로 반응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을 말하기도 한다. 추리소설 등에서 자주 사용하는 복선이라는 말과 비슷하지만 좀 더 광의의 개념을 암시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글 속에서 글의 진행과 같이 가다 보면 결말이 대충 짐작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이러한 것을 암시라고 하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복선은 암시를 거듭하다 마지막 즈음 암시와 암시를 결합하여 결론에 도달한 것을 느낄 때, 복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암시는 일종의 ‘눈치’라는 말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글 속의 눈치는 문맥의 정황이나 상황 글의 전개 등에 비례하여 미루어 알아내는 힘이며 화자의 마음이나 생각 등을 살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말이다. 시에서 함축과 비유가 가장 기본이며 핵심이라고 할 때, 암시는 시의 외연과 내연 모두를 좀 더 문학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만드는 동력이라고 하면 맞을 듯하다. 시를 쓸 때 이미지화에 중점을 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어떤 현상이나 묘사 등을 할 때 보이는 그대로 서술한다면 그 문장은 시가 아닌 다른 형식의 글이 될 가능성이 많다.

 

이미지화한다는 말은 현상을 함축한다는 것과 비유한다는 것, 그 모두를 상징화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시 쓰기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종종 시를 어떻게 쓰면 되나요? 하는 질문을 많이 듣고 많이 한다. 가장 많은 답은 이야기하듯 쓰면 됩니다. 하는 말이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쓰는 것이 우선 선행되어야 함은 맞다. 하지만 보이는 대로 쓰는 것에 주력하게 되면 엄격하게 말해서 그 문장은 시가 아니다. 보이는 현상에 자신만의 초점으로 현상이 갖고 있는 (그 무엇)를 꺼낼 수 있는 제3의 눈이 필요할 것이다. 시를 일반화하여 정의한다거나 계량화 하여 도식화하기에는 인문학의 범위가 광대하여(혹은 개인의 생각이 천차만별 하여) 이것이 시입니다. 하기 매우 어려운 문학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시는 소설에 비해 매우 짧은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다. 그러면서도 소설 이상의 메시지를 담아야 하는 것 때문에 많은 시인이 고독하고 힘들고 참기 힘든 불면의 시간을 계수기처럼 넘기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쉬운 예로 소설책 한 권을 시 한 편에 요약한다고 하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파생하는 문제들이 도출된다. 단순하게 글자 수를 줄여 요약하는 것이 아니기에 글의 줄거리와 글에 담긴 메시지를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고민하다 보면 많은 부분에서 주관적인 요약이 담기게 마련이다. 주관적인 요약이 거듭하다 보면 시문장이 비만해지거나 비문에 가까운 문장이 되기 쉽다. ‘가’와 ‘나’를 이어 붙여 ‘다’와 ‘라’를 연상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시의 기승전결이라고 가정할 때 이 ‘연상’이라는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평이한 (가)와 독특한 (나)를 연결하여 평이 와 독특의 상징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짧은 문장 속에서 두 가지 개념의 문장을 한 문장으로 문장화하기에는 제한된 행과 연의 길이 속에서 부득이 함축을 고민하게 되고 함축을 하다 보면 문장이 비문화 되어가는 것을 자주 느끼게 되는 것이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현실인 것이다. 이런 난해한 부분을 해결하는 것이 ‘암시’라고 볼 수 있다. 이른바 화자의 메시지를 행간에 툭툭 던져 놓는 것이다. 물론 아무 것이나 던져 놓아서는 문장이 되지 않는다. 화자의 메시지에 부합되는 개연성과 당위성을 단초로 제공할 수 있는 암시가 되어야 전체 문장이 하나의 주어主語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암시와 관련하여 D.Daiches 는 의미심장한 이런 말을 했다.

 

"시 자체는 여러 가지 예술적 장치(리듬, 어조, 이미지, 형태)와 시어에 의해 독자가 그 시를 심미적으로 향수하도록, 즉 감상에 필요한 어떤 거리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하나의 암시적인 방향체계를 마련한다."

 

「 데이체(D. Daiches)」일부 인용

 

위 데이체의 말은 소설 작법에 관한 이야기면서 동시에 시라는 장르, 모든 글에 포함될 수 있는 주장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암시적인 방향 체계라는 말이다. 시에서 비유나 함축 혹은 묘사의 모든 방향성이 하나의 주제를 위한 근친의 암시가 가능해야 설득력을 얻는다는 말이다. 암시가 주제와 다소 동떨어지거나 주제를 우회하거나 비껴가게 된다면 주어진 암시로 인하여 암시는 암시가 아닌 다만 문장의 비만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시를 쓰다 보면 자칫 수사적인 부분에서 착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암시는 글의 주제를 끌고 가는 형식에 부수되어야 하는데 암시가 전부가 되는 우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잘못된 암시는 화자가 스스로 중언부언하게 만드는 핵심이 된다는 말이며 시를 쓰는 시인은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암시는 주제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 간격은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까워 마치 지구를 우주에서 보지 못한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지구의 밖에서 지구를 본 사람과 다만 추측으로 지구를 본 사람과의 색감이나 질감을 분명 다를 것이며 이는 지구에 대한 판단에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문장에서 암시의 질감은 주제와 흡사하지만 전혀 다르게 보이는 옷을 걸쳐야 한다. 속과 겉이 달라야 하지만 결론은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분명한 것은 현대의 시는 더 이상 상업예술이 아니다. 비상업적 예술을 지향한 것은 아니지만 여타의 이유에 의하여 시는 상업예술의 옷을 벗었다. 비 상업적이라는 말은 창작에 유동성을 부여하고, 창의성을 더 요구하게 만든다. 이는 ‘상업’이라는 수단을 배제한 순수문학의 본류에 가장 가까운 ‘창조’의 의미에 가장 합당한 말 일 것이다. 강인한 시인은 시인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말했다. ‘시인은 다만 운율 있는 언어로 자신의 성을 구축하는 언어의 주인일 뿐이다.‘ 자신의 성은 자신만의 성이기도 하지만 성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성을 소개하는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성의 구조와 성 안의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알려주면 너무 허탈하지 않을까 싶다. 적당히 보여주고 적당히 감추면서 정작 보여 줄 것은 모두 드러내 보여주는 지혜. 필자는 그것을 암시하고 말하고 싶다.

 

시가 어렵게 쓰여야 좋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인의 고민과 삶에 대한 철학과 성찰이 들어 있는 글이라면 적어도 그 글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이는 쉽게 쓰지 말라는 말과 같을 것이다. 쉽고 어렵고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글에 생명을 담고 철학을 담는 다면 그 글은 최소한 쉽게 읽히는 글이 아니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제를 찾아가는 재미라고 하면 너무 확장한 것이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글. 글이라는 명패를 가슴에 달았다면 흔히 말하는 ’ 가치‘를 내포해야 할 것이다. 거창하게 문학적 가치를 논하는 것보다는 글의 가치를 말하고 싶다. 사물이 갖고 있는 값이나 쓸모를 가치라고 한다. 글에 대입하면 글이 갖고 있는 값이나 쓸모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시는 값이 있고 가치가 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좀 더 많은 값과 가치를 지니게 된다면 더 좋은 가치가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더 좋은 가치를 창조하기 위하여 시인은 시적 장치에 대하여 더 많이 공부하고 배우고 감각을 키우거나 시적 질감을 다양하게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고민해야 한다. 아무런 장치 없는 것도 물론 좋을 때가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기에 한 편의 시를 위해 시인은 죽도록 고민하고 아파야 한다. 시쳇말로 쓴다고 다 글이 아닌 것이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쓴다면 이 얼마나 가치가 작을 것인가? 화자가 하고 싶은 말을 너무 빤하게 드러내면 이 얼마나 가치가 작을 것인가? 한번 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반문하고 대답해야 한다. 그 대답에 따라 시인의 가치는 자기 가치를 정확하게 찾을 수 있을 것이기에 필자는 그 하나의 수단으로 암시를 제시하는 것이다.

 

모든 시에 암시를 둘 수 없지만 모든 시에 암시를 버릴 수도 없는 것이기에 암시는 그 자체로 글을 역동적이고 창의적으로 만드는 대단히 훌륭한 수단이 될 것이다. 암시는 일종의 이미지라고 해석해도 될 것이다. 이미지는 신체적 지각에 의한 느낌을 형상화하는 것이며 하나의 훌륭한 이미지는 시 속에서 커다란 암시의 목적물이 될 수 있다. 결국, 암시 = 언어 + 이미지라고 해석할 때 암시에 대한 방정식이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이미지와 관련하여 문학평론가 박호영 교수의 주장을 인용해 본다.

 

이미지는 신체적 지각에 의해 산출된 감각을 마음속에 다시금 재생시켜 놓은 것이다. 이 정의를 음미해 보면 이미지라는 것이 개인의 상상력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신체적 지각의 과정과 마음속에 생산되는 과정이 얼마든지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월 대보름의 달을 차갑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포근하게 받아들이는 이도 있고 그 결과 같은 달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달의 이미지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교육 현장에서 가르치는 시의 이미지는 어떠한 것인가? 우리가 기억하는 시들, 예를 들어 김수영의 [풀]에서의 '풀'의 이미지라든가 윤동주의 [서시]에서의 '밤'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고정되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이미지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의 모색을 거치지 않았다. 이는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미지에 대한 교육에도 문제점이 있음을 시사한다. 박목월의 [윤사월]을 실제의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이 시는 4연 8행의 짧은 시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풍부한 연상 속에 놓이게 하는 시이다. 이 시에서 눈먼 처녀의 비극적인 상황-산지기 딸로서 가난하고, 어릴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눈이 멀게 된 비극을 겪었고, 과년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고, 지금은 외롭게 살고 있는 한과 설움의 삶-은 교육 현장에서 대개 지적되었다. 그러나 송화가루, 꾀꼬리의 노란 빛깔의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천착이 되지 않았다. 도시의 학생들에게는 송화가루의 빛깔이 어떤 색인지도 잘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시를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송화가루나 꾀꼬리의 이미지를 물어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노오란 네 꽃잎>에서 '노오란'의 이미지가 '성숙'을 의미하는 것처럼 이 시에서 노란 빛깔의 이미지가 성숙을 의미할 수도 있고, 그 경우 그 '성숙'의 이미지는 눈먼 처녀의 성숙함과도 연결되어 마지막 연에서의 처녀의 행동, 즉 '듣는' 것이 아니라 '엿듣는', 부끄러움의 미학으로도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상 아무도 없는 외딴 집에서 들려오는 꾀꼬리 소리를 자연스럽게 듣지 않고, '엿듣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 처녀의 성숙함과 부끄러움으로 연결되어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때 '문설주'는 안과 밖의 통로요, 자연과 인간의 통로이며, 외부의 성숙함과 처녀의 성숙함의 통로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이 시를 다음과 같이 도표화해 보일 수 있다.

 

 

| 송화가루 |-------→ | 문설주 | --------→ | 눈 먼 처녀 |

| 꾀꼬리 |

 

 

위에서 보듯 한 편의 시에 대한 해석은 대상의 이미지를 폭넓게 파악하는 데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대상의 이미지를 고정적인 지식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는 이를 보더라도 증명이 된다.

 

「비유와 이미지에 대한 시교육의 방향 -박호영」일부 인용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암시 (혹은 이미지화)는 시적 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매우 유용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던 포엠 2019.06월호에서는 이번 달의 글제에 부합하는 세 편의 작품을 선별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첫 번째 작품은 김비주 시인의 [당신도 부활을 꿈꾸나요, 이 도시에서]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아마도 부활일 것이다. 부활은 쇠퇴한 것이나 없어진 것이 다시 성하게 일어나는 것을 이야기한다. 물론 성경적인 의미의 부활도 존재하나 종교적인 측면은 본 글에서 논외의 것으로 함을 밝힌다.

 

당신도 부활을 꿈꾸나요, 이 도시에서

 

김비주

 

닭장이 홈런을 쳤다 꼬끼오 꼬기요

부활은 동선이 짧다

아침마다 부활을 알리는 거룩한 외침

잊혀져가는 구원의 등허리에 숨은 열락

도시의 어디에도 천국의 티켓은 멸실 중

촘촘한 그물을 엮어 던지던 난타의 말들도

꼬리를 감추는 중,

특별한 티벳의 허리에 엄마가 걸리고

국회의 문이 자유로이 여닫힐 때,

아파트 현관의 비밀번호를 날마다 캐는

배달의 일번지 청년의 채굴이 위태롭다

 

보라, 느린 자의 시간이

빠르게 시간을 먹어버리고

도시 어디서나 떠 다니는 청년을 만난다

이때 필요한 생의 축지법,

누렇게 눈뜬 계층의 알리바이가

서그럭거릴 때

내내 불편한 부활을 꿈꾸어 본다

 

김비주 시인의 이 작품은 시적 질감이 매우 무겁게 느껴진다. 부활을 꿈꾸나요, 이 도시에서라는 시제가 암시하는 것은 이 도시라는 것의 정체다. 살고 있는 곳 현재 거주하는 곳, 지금이라는 시간적 의미와 공간적 의미 모두를 내포하고 있다. 이 도시라는 것에서 도시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를 복선에 깔고 시작하는 것부터 시적 몰입도를 매우 깊게 만드는 작품이다. 본문 여러 곳에서 때론 묵시적이고 때론 암시적이며 때론 갸웃하게 만드는 문장들이 많이 등장한다. 동선이 짧은 부활, 구원의 등허리에 숨은 열락, 티벳의 허리에 엄마가 걸리고, 등등의 문장은 시인이 주제에 대하여 심도 있는 고민을 수 없이 했다는 반증이다. 필자가 서두에 언급한 암시는 가까운 듯 멀게 느껴지는 암시를 글의 매개체로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일관성이 결여된 듯하면서도 결론에 가서 시인이 구성한 일관성(흐름)에 공감하게 되는 점이 상당한 매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 부활은 동선이 짧다/

 

2. 특별한 티벳의 허리에 엄마가 걸리고/

 

3. 느린 자의 시간이

빠르게 시간을 먹어버리고/

===============================

불편한 부활

 

이 도시와 부활의 관계는 위와 같은 등식으로 성립된다. 부활을 꿈꾸지만 적어도 이 도시에서의 부활은 시인이 꿈꾸는 부활과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이는 곳곳에 등장하는 비유에서 볼 수 있다.

 

배달의 일번지 청년의 채굴이 위태롭다/

 

누렇게 눈뜬 계층의 알리바이가

서그럭거릴 때/

 

이때 필요한 생의 축지법,/

 

이때 필요한 생의 축지법이라는 부분에서 아릿한 혹은 비릿한 이 도시의 몰락을 보게 된다. 그 몰락의 풍경 뒤에 숨은 부활이라는 배경은 더 이상 부활은 부활이 아닌 ‘재생’의 의미 혹은 Replay라고 여겨지게 된다. 부활을 꿈꾸면서도 동시에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어쩌면 현대사회의 보이지 않는 자본적 계급주의를 한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자본이 만든 계급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생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다음 생 역시 같은 풍경과 배경을 가질 수밖에 없는 암울한 현대사회의 단면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엄숙하게 시대를 부정하는 시인의 안목이 상당히 날카로우면서도 어떤 계급의 인텔리 Intelligentsia가 소유하게 되는 회색빛 질감을 다소 낯선 어조로 증언하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시의 모든 문장이 좋지만 필자 개인적으로 머릿속에 각인되는 문장은

 

도시의 어디에도 천국의 티켓은 멸실 중/

 

적당한 표현이면서 동시에 어렵지 않은 표현이면서, 짙은 공감이 드는 문장이다. 시를 읽으며 필자 역시 어떤 부활을 꿈꾸는지? 지금부터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활? 부활이 과연 필요한 것인지?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이 도시를 본문에서 삭제하더라도 ‘부활’ 그 하나의 문제만 생각해도 요원한 이야기다. 적어도 이 도시에서는.

 

두 번째 소개할 작품은 이미영 시인의 [벽을 뜯는 사람]이다. 작품을 소개하기 전 이 시의 소재가 된 뱅크시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 뱅크시라는 예술가를 요약해 본다.

 

뱅크시Banksy는 영국 익명의 그래피티 예술가로 주요 작품은 <풍선을 든 소녀>와 <영역 다툼>과 <월 앤 피스>. 비꼬는 듯한 기발함과 은밀함으로 그래피티와 설치예술을 접목시켰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예술가로 유명하다. 생물, 무생물, 공간, 소재에 구애 받지 않은 다양하고 참신한 전시물들을 창조해내고 있으며 작품 특성상 반사회적 예술가로 평가되며, 명성이 높아진 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거리 예술에 헌신하고 있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그라피티 예술이니 설치예술이니 하는 것은 필자의 전문분야가 아니기에 이에 대한 설명은 부적절할 것 같다. 다만,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뱅크시라는 예술가는 1993년 벽에 낙서를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는 것과 반권위주의, 반사회적 예술가라는 부분이다. 이미영의 시는 뱅크시의 짓이라는 본문의 내용에서 ‘짓’이라는 것에 방점을 둔 듯하다. ‘짓’은 행동이나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단어이기도 하다. 일부 동사 앞에서 ‘마구’ ‘함부로’라는 의미에 의미를 더하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짓’이 ‘짓’이 아닌 부정이 부정이 아닌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수직으로 끓어 앉은 아기가 벽면을 바느질하고

그 위로 늘어진 만국기가 흉터처럼 걸려 있다/

 

밤사이 다녀간 뱅크시*의 짓이다

가게 주인은 예술과 상술에게 흥정을 붙여 볼 작정이다/

 

이 부분에서 떠오르는 영상은 ‘철거’라는 단어다. 벽을 뜯는 사람은 당연히 설치 예술가 혹은 그라피티 예술가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벽을 뜯는 행위를 뱅크시의 짓이라고 단정 한 것으로 보인다. 뱅크시가 암시하는 것을 좀 더 확장하면 도시의 미관 혹은 재개발을 위하여 벽을 뜯는다는 것은 미관이나 재개발로 인한 주변의 가치 상승의 무게보다는 뜯긴 벽 속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 (사람, 물건, 삶, 기억...)의 실종에 더 많은 가중치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려지는 순간, 벽은 그의 것이 아니라서

주인은 불면의 밤을 앓고 있다/

 

벽이 뜯겨 나가는 순간 이미 벽은 벽 속에 존재하던 모든 것들은 벽 밖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벽 속에 있던 벽의 주인은 불면을 앓는 것이다. 예술이 아닌 생계수단으로 존재하던 벽, 그 벽은 삶과 삶의 경계선이며 삶과 투쟁을 벽 밖으로 밀어내게 된 동기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3연의 말미에 다시 부정의 단어를 선택하여 긍정의 극대화에 대한 암시를 주게 된다.

 

벽 속의 무지개가 보고 싶어

매일 밤, 꿈틀거리는 상인의 근성

 

근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뿌리가 깊게 박혀 고치기 힘든 성질, 어떤 일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려고 하는 성질을 근성이라고 한다. 벽이 뜯긴 상인의 마음은 적어도 근성을 아닐 것이다. 어쩌면 본능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것 같은 의미로 근성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단어를 암시의 소재로 선택함으로 인해 시적 긴장감을 고조하는 기술적인 방법이 독특한 매력으로 작용한다.

 

 

벽이 뜯기자 처음으로 안쪽이 공개되었다

잡동사니들의 난장, 방치된 폐기물

예술과 쓰레기의 차이는 오직 벽 하나로 결정되는 것/

 

벽의 이쪽과 저쪽의 정체가 밝혀졌다. 방치된/ 폐기물/ 난장/ 아마도 이미영 시인은 지속적으로 반대 의미를 암시의 매개체로 사용하는 것을 시적 모티프로 삼은 듯 보인다. 예술과 쓰레기의 차이가 단순하게도 벽 하나로 결정이 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과감하게 결론을 맺었다. 예술과 쓰레기가 벽 하나로 결정되는 이 도시의 현실 같지 않은 현실, 아마도 이 부분은 뱅크시의 반권위주의, 반사회적인의 뱅크시 예술의 아이덴티티를 배경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은 결구에 가서 극적 희화를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시인의 메시지를 강하게 던졌다.

 

주인은 재빨리 새로운 벽을 견고하게 채워 넣었다/

 

주인, 주인? 주인! 주인은 벽 안쪽의 사람인가? 벽 바깥쪽의 사람인가? 누구든 새로운 벽을 견고하게 채운 사람이 주인이다. 벽을 뜯긴 사람인가? 벽을 뜯은 사람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계급, 벽을 뜯으라고 지시한 사람인가? 보이는 계급, 벽을 뜯긴 사람의 처지인가? 정답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이미영 시인의 작품은 단어 선택의 탁월함이 매우 돋보인다. 복선의 레일을 구성에 깐 것이 아니라 단어에 깔아놓은 점이 훌륭하게 읽힌다.

 

마지막 소개할 작품은 문현숙 시인의 작품 [파리지옥]이다. 이 작품 역시 파리지옥이라는 쌍떡잎식물을 소재로 하는 듯하면서 아닌 듯한 얼개를 갖추고 있다. 작품을 소개하기 전, 파리지옥이라는 식물에 대한 요약을 해 본다.

 

파리지옥은 끈끈이귀개과에 속하는 꽃피는 여러해살이풀. 곤충 및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독특한 습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원산으로, 축축하고 이끼가 낀 지역에서 흔히 분포한다. 식물체는 비늘줄기처럼 생긴 뿌리줄기에서 자라나오며, 키가 20~30cm인 곧추서는 줄기 끝에 흰색의 작은 꽃이 둥글게 무리 지어 핀다. 잎 가장자리에 가시 같은 톱니가 나 있으며 잎에 곤충이 앉으면 약 1.5초 만에 잎이 닫혀서 곤충을 잡는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식물의 잎에 곤충이 앉으면 잎이 닫혀 곤충을 잡아먹는 식물이다. 자료를 검색 중 글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지만 곤충을 잡아먹는 그 공포의 잎이 항암제, 면역조절제, 나병 치료제, 불임치료제 등에 유용하게 쓰인다는 효능이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어쩌면 참 아이러니한 잎이다. 잎이면서 입이 되는 잎이다.

 

파리지옥

 

문현숙

 

하양장이 서던 날,

백반 정식 소문난 중남식당은 파리지옥이었지

미식가라 자칭하던 것들이

잔칫날인 듯 차려진 밥상 위로

펄펄 끓는 국속으로 겁 없이 뛰어들어

입맛 다시는 노마드 청춘들

천장이 내려 준 구름다리 타고 올라가

걸쭉한 훈장처럼 박제된 양 날개

까마득한 허공만 파먹고 살아도

지상에서 영원으로 갈 수 있는지

산해진미 눈앞에 둔 처절한 전쟁터

입맛 찾아 떠돌던 여자

허기진 한 때, 모처럼 채우고 있었지

군내 나는 청국장쯤으로 여겨 밀친 사내도

제철음식 최고라 편식하던 그녀도

우화를 꿈꾸는 집파리처럼,

사흘을 채 못 넘기던 부나비 사랑

기둥서방처럼 껴안다 불어 터진 달콤한 지옥

 

작품은 파리지옥이라는 식물의 속성에 빗대, 삶의 한 단면을 희언화된 표현으로 독백하듯 담담한 어조로 진술하고 있다. 맛있는 정식을 팔던 중남식당은 파리(곤충)의 지옥이다라는 것에서 암시하는 것과 파리지옥이라는 식물의 속성이 암시하는 것의 무게를 동질로 두었다. 그 모든 파리는 본문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펄펄 끓는 국속으로 겁 없이 뛰어들어

입맛 다시는 노마드 청춘들/..............................청춘들

 

군내 나는 청국장쯤으로 여겨 밀친 사내도

제철음식 최고라 편식하던 그녀도/......................철 지난 여자 혹은 남자 혹은 사랑

 

파리는 절대 우화등선을 못한다. 아니 모든 것은 우화등선을 꿈꿀 수는 있지만 모든 우화등선은 꿈이다. 다만, 꿈이다. 꿈은 사람도 꾸지만 집파리도 꿈을 꾼다. 사람은 때론 집파리처럼 달콤한 것에 꼬드겨져 펄펄 끓는 국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노마드 청춘이 되기도 하고, 소읍을 떠돌다 중남식당 한 구석에서 입맛을 다시는 철 지난 여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사흘을 채 못 넘기던 부나비 사랑

기둥서방처럼 껴안다 불어 터진 달콤한 지옥/

 

어떤 각도에서 보면 빤하게 보이는 결론이지만 어떤 각도에서 보면 파리지옥의 속성이 연상하는 삶의 한 단면이 애처롭기도 하다. 삶이라는 것의 속성은 라디오 방송의 멘트처럼 길에게 길을 묻는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길에게 길을 묻다라는 나직한 멘트를 들으면 길을 묻고 싶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문현숙 시인은 파리의 속성을 몇 군데 시인의 느낌으로 잘 표현해 두었다.

 

천장이 내려 준 구름다리 타고 올라가

걸쭉한 훈장처럼 박제된 양 날개

까마득한 허공만 파먹고 살아도

지상에서 영원으로 갈 수 있는지/

 

어쩌면 이 지점, 구름다리 타고 올라 간, 박제된 양 날개, 허공만 파 먹어도, 의 지점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 지점에 피리지옥이 꽃잎을 활짝 벌리고 우릴 기다리고 있는 그 지점인지도 모른다. 결국 1.5초 만에 꽃잎이 닫히고 파리지옥의 소화기관 속에서 몇 날을 녹아내리게 되는 것이 삶의 결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파리지옥은 달콤한 지옥이다. 달콤한 지옥은 없다. 사람은 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비약적인 생각의 확대를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문현숙 시인의 파리지옥은...

 

소개한 세 편의 작품을 통해 세 작품 공히 작품의 소재, 제재, 배경, 본문의 이곳저곳에서 암시를 잘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점은 암시가 시의 본질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주제를 살려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암시를 적절하게 잘 사용하는 것. 그런 기술적 고민이 바로 좋은 시를 빚는 도공의 자세라는 점을 강조하며 맺는다. 이제 곧 여름이다. 그리고 겨울이 올 것이다. 독자에게 올 겨울을 암시해 본다. 우린 과연 무슨 결론을 우리에게 줄 것인가?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추천0

댓글목록

붉은선님의 댓글

profile_image 붉은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파리지옥 "  특히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Total 4,157건 2 페이지
내가 읽은 시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추천 날짜
4107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03 0 09-15
4106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53 0 09-13
4105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4 0 09-09
4104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1 0 09-09
4103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0 0 09-09
4102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4 0 09-09
4101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9 0 09-09
4100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6 0 09-08
4099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5 0 09-07
4098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4 0 09-07
4097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53 0 08-31
4096 온리백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4 0 08-27
4095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7 0 08-24
4094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21 0 08-17
4093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50 0 08-10
4092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19 0 08-08
4091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04 0 08-04
4090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28 0 08-01
4089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0 0 07-27
4088
신발 =장옥관 댓글+ 1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50 0 07-23
4087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87 0 07-20
4086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84 0 07-13
4085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80 0 07-07
4084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7 0 07-06
4083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11 0 07-01
4082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3 0 07-01
4081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8 0 06-29
4080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1 0 06-28
4079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7 0 06-28
4078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2 0 06-27
4077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58 0 06-27
4076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1 0 06-26
4075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1 0 06-26
4074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4 0 06-25
4073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9 0 06-25
4072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0 0 06-23
4071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1 0 06-23
4070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1 1 06-22
4069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87 0 06-20
4068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3 0 06-20
4067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8 0 06-19
4066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6 0 06-18
4065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3 0 06-17
4064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2 0 06-17
4063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5 0 06-16
4062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2 0 06-16
4061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3 1 06-15
4060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 0 06-14
4059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9 0 06-14
4058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9 0 06-14
게시물 검색

 


  •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 (07328)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0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645호
  • 관리자이메일 feelpoem@gmail.com
Copyright by FEELPOEM 200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