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계량計量할 것인가, 느낄 것인가/ 장마/ 성영희 외 2 > 내가 읽은 시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시마을 Youtube Channel

내가 읽은 시

  • HOME
  • 문학가 산책
  • 내가 읽은 시

    (운영자 : 네오)

 

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작품명/시인)

가급적 문예지에 발표된 등단작가의 위주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자작시는 삼가바람) 

12편 이내 올려주시고, 특정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詩, 계량計量할 것인가, 느낄 것인가/ 장마/ 성영희 외 2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55회 작성일 19-06-28 12:57

본문

  

詩, 계량計量할 것인가, 느낄 것인가

 

-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장마/ 성영희

침실의 철학*/이우디

내 귀는 주렁주렁/최서인



 

계량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분량이나 무게를 재서 알아낸다는 말이다. 천칭 저울이 있다. 한쪽에 한 편의 시를 놓고 반대편에 다른 한 편의 시를 놓고 두 편의 시, 그 무게를 측량한다고 하면 과연 저울의 기울기가 어떤 한 편으로 기울어질 것인가? 저울 한쪽에 놓인 시는 관념과 사족과 설명과 진술이 뒤범벅이며 다른 한쪽의 시는 함축과 비유와 환유와 리듬이 일정하다고 가정해 본다. 저울은 이야기할 것이다. 왼쪽은 너무 가벼워요, 오른쪽은 너무 무거워요. 하지만 고작 A4한 장에 담긴 글자의 개수는 한 장에 불과해서 수평을 유지할 수밖에 없어요.

 

계량경제학이라는 경제 용어가 있다. 현실의 경제현상을 통계학과 수학의 방법을 써서 수량적으로 파악하여 미래에 대한 예측과 계획에 이용하는 경제학이다. 통계학과 수학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배제하고 쉽게 말해보자. 한 편의 시를 백점 만점으로 간주하고 비유는 10점, 환유는 15점, 주제의 명징성은 20점, 소재의 참신함은 20점, 구성은 몇 점, 그리고 또 몇 점 몇 점... 중, 고등학교 시절 국어 책에 나오는 시들을 읽고 시험을 보면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서 볼 수 있는 사회 현상은? 시의 구성은 어떻게 배열되어 있나요? 등등의 사지선다형 혹은 주관식 질문이었다. 정작 시 한 편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시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썼는지 모르지만 사회현상이나 구성 등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대시는 시 한 편에서 얻어야 할 것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시 한 편에 참고서가 한 권 정도 있어야 해독이 가능한 시편들도 많다. 위 계량경제학 이론에 의하면 시에서 나타내는 문학적 가치에 대하여 (각종 비유, 환유, 구성, 주제, 소재...) 계량화하고 그것을 비교 분석하여 향후 문학적 가치의 발전, 진화 등을 측정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시의 계량화라고 본다면, 보거나 읽거나 쓰는 사람에 따라 분명 가치관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필자라면 시 한 편 쓰고 싶지 않다.

 

한 편의 시를 쓸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대상이다. 글의 주제나 글의 소재에 대한 맞춤 대상을 보게 마련이고, 그 대상을 본 느낌(작가적 상상에 의한 느낌도 부가하여)을 글로 적는 것이 가장 기초일 것이다. 글과 시는 분명히 다를 수 있다. 글은 그대로 남아 일기나 메모 혹은 단순 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글이 진화하여 일정한 양태를 가진 (형식, 운율, 구성, 시놉시스...) 나름의 옷을 걸치게 되면 글에서 나온 실이 시를 엮거나 소설을 토하거나 수필을 반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보고 느낀 것에 자신만의 세계관과 세상을 보는 통찰력을 가미하여 시 한 편을 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시 한 편은 말 그대로 시 한 편 인 것이다. 글의 경중을 따지거나 화려한 수사의 향연을 고려하여 그 무게를 따지기 이전에 시는 시 본래의 의미 그대로 ‘시인’(김경주 시인은 시인이란 지금 시를 쓰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했다.)의 가슴 한쪽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시의 무게 측량법이라는 생각이다. 위 인용한 김경주 시인의 말은 지금 시를 쓰고 있다에 방점을 두고 싶다. 잘된 시, 좋은 시를 떠나 지금 ‘시’ 한 편을 쓰고 있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필자는 해석하고 싶다. 시의 무게를 재는 행위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 일 수 있다. 용모, 기능, 실력 따위를 겨루기 위하여 열리는 대회를 콘테스트 Contest라고 한다. 짧은 영어 실력이지만 이 말을 유추해 보면 ~~ 등에 ~~ 하는 이라는 의미의 Con이라는 부사에 시험 혹은 실험이라는 뜻의 Test가 붙어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극히 개인적인 추론임을 밝힌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필자는 백일장이나 여타 비슷한 ~~ 문학상 경시에 심사위원으로 나가면 모든 작품을 다 뽑고 싶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런 곳엔 가고 싶지도 않다. 이른바 시를 계량화 한다는 것은 시를 ‘시’가 아닌 시로만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누가 있어 몇 날 몇 밤의 번민과 고뇌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시로 적어놓은 것에 대하여 점수를 매길 수 있을 것인가? 이 작품은 너무 관념적이라 마이너스, 이 작품은 언어의 조탁이나 조율성이 대단히 뛰어나서 가점, 이 작품은 시적 배경이 탄탄하지 않고 기시감이 너무 많이 들어서 탈락. 곰곰 생각해 보자. 흐르는 강물에 막대기 하나 들고 이리저리 선을 긋는다고 강물의 흐름이 바뀌거나 이쪽 혹은 저쪽으로 갈리는가? 잠시 찰나의 순간 갈리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도도한 강물은 그저 갈 길로 갈 뿐이다. 시라는 작품 한 편 속에 깃든 작가적 상상이나 작가의 세계관이나 작가의 불면의 밤들은 사라지거나 나뉘거나 잘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보는 우리가 나누거나 자르거나 할 뿐이다.

 

가끔 강의를 하다 보면 자주 묻는 것 중의 하나가, 동시는 뭐죠? 서정시는 뭐죠? 정형시는?... 등등의 구분법이다. 필자는 아쉽게도 동시, 서정시, 정형시에 대하여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시’입니다라는 대답밖엔 할 수 없다. 물론 필자의 불학 무식에 기반을 둔 대답이라는 것을 먼저 밝힌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시를 대할 때 우리의 무의식 속에 그런 질문을 담고 시를 대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배워온 시에 대한 도식적인 질문과 답, 시험에 대비하여 시를 분석(읽는 것과 분석은 엄격하게 다르다. )으로 교육받은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시에 대한 계량화가 먼저 생각나도록 주입되어 있다는 혐의가 강하게 든다. 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그대로 아름답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허공 중에 흩어진 이름은 흩어진 이름일 뿐이다. 아이스크림처럼 녹는 하늘은 표현 그대로 아이스크림처럼 녹는 하늘이다. 모던 포엠 2019년 07월호 평론에 소개할 작품을 찾다 이행숙 시인의 시 한 편을 발견했다. [단테와의 시간여행에서]라는 다소 난해하게 보일 수 도 있는 작품이었다. 그중의 한 부분을 발췌해 본다.

 

단테와의 시간여행에서

 

이행숙

 

중략

 

-연옥

 

공정하지 않은 사회 현실로

가고자 하나 갈 곳을 잃은 자

직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취업 준비생

사이버 세상에 매몰된 학생들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인구 감소로 지구 상에 가장 없어지는 나라로

가상화폐로 일확천금의 미끼에 낚이는 순간

이 모두가 황량함이 아니던가

 

후략

 

필자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고 단테라는 작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과연, 누가 이행숙 시인의 시에 계량을 할 수 있을까? 잘 된 시, 좋은 시의 잣대를 들이대고 재단할 수 있을까? 너무 직설적이네요 혹은 너무 진술이 많은 듯한데요, 시적 언어가 삭막해요, 따위의 말을 할 것인가 묻고 싶다. 이 작품은 감히 인용하기 미안할 정도의 사유가 농익은 작품이다. 세상을 너무 정확하게 보고 있어서 소름이 돋는다. 이행숙 시인이 보는 이 세상은 현실이며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이라는 메시지에서 필자는 말을 멈추게 된다.

 

시는 계량이나 측량의 대상이 아니다. 시는 현실을 반추해 미래를 다짐하는 것이다. 시는 과거를 끌어와 현실의 나를 보는 것이며 세상을 보는 것이다. 보이는 것의 오류에서 벗어나 미래의 나를 예지 깊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모든 행위에 가장 선행되는 것은 비유, 은유, 함축, 수사, 문장의 절제, 문장력이 아닌 ‘느낌’인 것이다.

 

물론, 시는 비교대상이 될 수 있다. 다른 한 편의 시와 또 다른 한 편의 시는 분명 다른 질감의 옷을 걸치고 있고, 다른 형상의 구조를 갖고 있어야 한다. 모두가 느낌만 좋은 시를 좋은 시라고 하지 않는다. 좀 더 다른 질감, 좀 더 다른 구조, 좀 더 다른 언어적 논리를 완벽하게 구비할 때 시문학적 가치의 진화가 된다는 것에는 이론異論이 없다. 아니 그런 시도와 실험은 문단에 혁신적이며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시’라는 대 명제의 포괄적이며 포용적 관점에서 볼 때, 좀 더 근시안적으로 독자적 관점에서 볼 때, 시의 계량화는 분명 불편하다. 좀 더 강한 어조로 말하면 시는 계량화 이전에 느낌이 살아 있어야 시라는 생명의 피돌기가 따듯하게 전달되는 것 아닐까 싶다.

 

구조적 측면의 비평은 대단히 필요한 작업이다. 서양의 시와 동양의 시, 시조와 시, 누구의 시와 누구의 시가 어떤 면에서 좋고 어떤 면에서 이렇게 발전하면 좋겠다 하는 비평은 문학적 가치의 새로운 태동과 발전을 위해 정말 필요한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현대시, 특히 요즘의 시는 키워드 방식, 혹은 이중구조, 혹은 다중구조의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다른 세대의 이 같은 구조적 혁신은 시를 좀 더 세계화에 가깝게 하며, 문학이라는 범주를 언어적 논리화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필자가 이전에 언급한 ‘기승전결은 더 이상 공식이 아니다.’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의 시도 이제는 결승기전 혹은 전승기결 등의 다양한 방식을 시도해야 하며 이러한 시도가 시적 발전과 더불어 논리적 사고의 다양화, 첨단소재로 직조한 시의 옷감을 재단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같은 옷을 매일 입어도 질리는 것이 요즘이다. 하물며 같은 패턴의 시를 읽거나 쓴다는 것은 얼마나 질리는 일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옷은 ' 옷‘이라는 가장 원초적 기능이 있어야 옷이라는 생각이다. 그 옷에 발수, 발한, 습식, 건조 등의 기능을 추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또 다변화하는 세상에서 필요한 일 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 옷‘이라는 것이다. 시는 ’ 시‘다. 편리에 따라, 사회적 요구에 따라 기능성을 부여하는 것은 좋지만 시라는 본질을 훼손하는 것은 불편하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자 혹은 시인 자신의 느낌이고 시인이 본 세상이며 시인이 갖고 있는 원초의 감수성이며 나름의 경륜이며, 성찰이다. 시가 아무리 진화해도 결국 위 열거한 부분들이 가려져 있거나 문장의 베일에 가려 보이지 않게 꼬여만 있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라는 반성을 하게 된다. 서정시, 정형시, 시조, 동시, 생활시, 서사시, 관념시, 모든 시의 종류 이전에 존재하는 것은 ‘시’ 그것 하나다. 정호승 시인의 ‘이별 노래’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이 구절에 임에 대한 영원한 사랑이라는 분석을 하지 말자. 수미상관의 기법으로 시적 의미를 강조한 작품이라는 연구를 달지 말자. 가정형 진술과 각운에 의한 뛰어난 운율감이라는 설명을 주석으로 달지 말자. 제재는 무엇인지? 별과 노을, 사람의 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지선다형 질문을 하지 말자. 다만, 정호승 시인이 이 시를 쓰며 느낀 그때 그 감정에 동일하게 나의 감정을 이입해 보자. 그것이 필자가 모던 포엠 7월호에 소제목으로 부여한 [詩, 계량計量할 것인가, 느낄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될 것 수 도 있을 것이다.

 

시속의 계량화에 대한 안도현 시인의 시와 연애하는 법 중, 시마詩魔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는 논고에서 일부 발췌 인용해 본다.

 

~중략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향기들을 ‘일곱 근’ ‘육십 평’ ‘두 치 반’ ‘칠만 구천 발’ ‘서른 되’로 계량화한 것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었다. 2007년 7월부터 정부에서는 표준도량형 제도를 시행한다고 밝힌 바 있다. 도량형을 통일함으로써 여러 단위의 혼용에서 오는 국가적 손실을 없애고 그 편리성과 효용을 국민이 누리게 한다는 취지가 그것이다. 이른바 실용적인 필요성 때문에 법적 구속력이 있는 표준도량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는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시는 실용과 경제의 반대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 무엇이다. 때로는 어슬렁거림이고, 때로는 삐딱함이고, 때로는 게으름이고, 때로는 어영부영이고, 때로는 하릴없음인 것이다. 시는 실용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와는 다른 시적 가치를 요구한다. 그것은 세상의 미학적 가치를 탐구하는 일인데, 우리는 그것을 시작(詩作)이라고 하거나 시적 순간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살다 보면 시적인 순간은 쉽게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영감(靈感)이나 시상(詩想)이 떠오르는 시적 순간은 의외로 곳곳에 산재해 있다. 초보자는 시적 순간이 수시로 입질을 하는데도 그것을 낚아채는 때를 놓쳐버리기 일쑤다. “영감이 오는 순간에 당신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번득이는 첫 생각과 만나는 순간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존재로 변화한다.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과 연결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그렇다. 시인이란,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든 메모지와 펜을 챙기고 받아쓸 준비를 하라. 잠들기 5분 전쯤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아, 내일 아침에 꼭 그것을 써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잠들어버리지 마라. 영감은 받아 적어두지 않으면 아침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해서 놓친 시가 수십 편이나 된다. 아쉬워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아예 메모지와 펜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 시마(詩魔)가 나를 괴롭힌다 싶으면 화장실에도 놓아둔다. 속주머니에도 넣어둔다. 당신도 시마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시와 연애하는 법3/시마(詩魔)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안도현」부분 인용

 

 

모던 포엠 2019.07월호 에서는 이달의 글제 중 ‘느낄 것인가’에 적합한 세 편의 작품을 선별하여 소개한다. 가장 먼저 소개할 작품은 성영희 시인의 [장마]라는 작품이다. 장마철 비 내리는 강가에서 자맥질하는 청둥오리를 보며 성영희 시인이 느낀 세상과 그 세상의 어느 한 단면에서 바라본 세상에 대한 독특하면서도 심장한 의미를 같이 느껴본다.

 

장마

 

성영희

 

비 내리는 강가

청둥오리 한 마리 머리를 쳐 박고 연신 자맥질 중이다.

뒤집힌 강물 속에서 무엇을 솎아낸 것일까

아름다운 지느러미와 꼬리를 삼키고

물갈퀴마다 꽃이 피는 지금은

산허리도 부푸는 장마철

물이, 물의 것들이 날아올라 풀숲에 든다.

물이 쏟아지는 철인데

날아가는 물이 대수롭냐고, 빗줄기에

울음의 곡을 붙인다.

 

저 장마의 바깥에는

염천炎天이 들어앉은 마음들이 또 몇이나

물속을 뒤지고 있을 것인가.

빗물로 와서 강물로 흘러가면 그뿐인

그러나 마음 한번 독하게 먹으면

세상도 발칵 뒤집고 마는

저 작은 빗방울들

 

슬픔이란 범람과 혼탁을 거쳐

가을 강물 속같이 투명에 이르는 일

쏟아지는 수 억 만개의 과녁을 다 받아내고

짧은 파장으로 범람하는 일

퉁퉁 부운 이름들만 물안개처럼 떠도는

비의 계절을

자맥질로 뒤지는 오리들,

 

성영희 시인의 시는 대체적으로 본향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다소 향토적이면서도 모던한 스타일의 시를 짓는 것으로 읽힌다. 필자는 동 시인의 작품 [칠월을 순지르다]를 모던 포엠 2016.01월호에 기고한 바 있다. 동 평론의 일부를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의 나를 보고, 엄마의 마음을 다시 느껴보고, 들일을 하고 오신 엄마의 짧은 오수를 본다. 이미 많이 늙은 엄마의 얼굴과 손이지만 내겐 무엇보다 아름답고 고마운 손길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들과 콩밭과 순지른 콩의 키가 목하, 가지런하게 보였을 것이다. 시인의 눈에는 억지가 하나 없다. 자연스러운 전개와 사유 논리의 진화가 시인의 고향처럼 부드럽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 시의 발화점이 온당하다. 결구를 끌고 가다 목하, 가지런하다는 말로 맺은 부분이 독자에게 짧은 시간 평화를 느끼게 한다. 모서리에 날을 세우거나 툭툭 불거지는 부분이 없다는 것이 새로움이란 단어에 대한 재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진정한 의미의 새로움이란 그저 지나친 것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진지한 시적 모럴이라는 생각이 드는 좋은 작품이다.

 

「모던 포엠 2016.01 월호 칠월을 순지르다/성영희 작품에 대한 필자의 평론 중」일부 인용

 

필자는 성영희 시인의 작품에 대한 개괄적 정의를 진정한 의미의 새로움이란 그저 지나친 것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진지함, 혹은 그런 진지함에 대하여 진지한 시적 모럴이라는 말을 논한 바 있다. 이번 작품 [장마]역시 같은 말을 하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장마철, 비 내리는 강가에 자맥질하는 청둥오리 한 마리는 누구나 한 번쯤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물론 오리 한 마리가 새로운 영법泳法을 수련하거나 거창한 무엇을 보기 위해 물속으로 연신 자맥질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청둥오리 한 마리는 다만, 생존을 위해 물속에 머릴 처박고 물고기를 낚는 것이다. 그 단순한 삶의 영속을 위한 행위에서 과연 시인이 본 것은 무엇이고 느낀 것은 무엇일까? 흔히 시인은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저 그렇게 지나칠 수 있는 풍경 하나에서 삶이라는 명제와 현실이라는 부제와 살아내는 방법이라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반성이나 성찰의 눈을 갖고 관찰한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점이다. 그저 그렇게 생각 없이 혹은 관심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무미건조한 일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말처럼 시적 대상을 향해 끊임없이 바라보고 관조하면서 생의 방정식에 대한 해법을 고민한다는 것은 인간은 사회적 관계라는 명제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살아가는 것과 살아 내는 것은 분명히 다른 관점이며 해석의 차이가 다르다. 시스템이나 일정한 루틴 Routine에 의해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잠을 자는 행위는 모두에게 같은 루틴이지만 그 루틴의 내면을 관조하는 습관이 있다면 루틴이 갖고 있는 오류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개연성이 충분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변화시키고 좀 더 다른 삶의 방식을 만들게 하는 언어적 혁신의 Tool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 장마의 바깥에는

염천炎天이 들어앉은 마음들이 또 몇이나

물속을 뒤지고 있을 것인가.

빗물로 와서 강물로 흘러가면 그뿐인

그러나 마음 한번 독하게 먹으면

세상도 발칵 뒤집고 마는

저 작은 빗방울들/

 

모든 것에는 근원이 있다. 강물, 장마는 작은 빗방울 하나에서 시작된다. 빗방울이 모이고 모여 장마가 되고 장마가 흘러 강물이 넘치게 되는 순환의 연속, 그 출발점에 빗방울이 있고 그 과정 중에 청둥오리의 자맥질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빗방울이 마음 한 번 독하게 먹으면 세상을 발칵 뒤집는다. 아무것도 아닌 풍경에 의미를 부여하여 한 편의 시가 되면 처절하게 반성해야 하는 삶이라는 강물이 된다. 성영희 시인의 눈은 청둥오리를 보지만 실제 시인이 바라보는 것은 작은 빗방울 한 방울이다. 그 빗방울은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는 어떤 분노, 미움, 사랑, 배려 혹은 알 수 없는 감정의 기제 하나 일 것이라는 심증이 든다. 그 마음속 빗방울이 독하게 마음먹지 않도록 자신을 갈무리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청둥오리의 자맥질에 현혹되면 빗방울을 볼 수 없다. 빗방울이 넘쳐흘러 범람하는 강물에 둥둥 떠내려갈 수도 있는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심증은 다음 연에서 짐작이 간다.

 

슬픔이란 범람과 혼탁을 거쳐

가을 강물 속같이 투명에 이르는 일

쏟아지는 수 억 만개의 과녁을 다 받아내고

짧은 파장으로 범람하는 일/

 

강물이 넘치는 범람은 슬픔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넘치고 넘쳐, 다시 넘치는 감정의 경계선을 넘어 질주한 것은 슬픔이라는 토사물을 만들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연신 비의 계절은 자맥질로 뒤지는 오리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하는 지금 이 시간, 어딘가 에서는 슬픔이 범람하고 어딘가 에서는 어둠을 뒤지는 오리들이 평행이론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일지도 모른다. 성영희 시인의 작품은 슬픔에 방점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는 아릿한 슬픔을 느낀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곳이 범람과 혼탁을 거쳐 여전히 흐르거나 넘치는 세상이라는 강물 속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장점은 정확한 기술 Description과 심상心像의 환기를 가능하게 하는 시적 언어의 정련화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성영희 시인의 시는 심상을 또렷하게 관통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좋은 느낌을 가진 매력적인 작품이다.

 

두 번째 소개할 작품은 이우디 시인의 [침실의 철학]이라는 작품이다. 이우디 시인의 작품 경향은 대체적으로 톡톡 튀는 언어적 감각이 돋보이면서도 더불어 거침없는 말솜씨(언어의 표현 기술)에 매력이 많다. 시를 소개하기 전, 작품의 시제로 쓰인 침실의 철학이라는 회화를 그린 르네 마그리트에 대해 잠시 소개해 본다.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우리는 너무나 친숙한 일상적인 사물들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 사물들은 그저 있어야 할 곳에 늘 그렇게 그들다운 모습으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따로 내어 낯선 곳에 위치시킨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누군가 늘 쓰는 책상을 바닥에 놓지 않고 천정에 붙여놓아 멋진 샹들리에와 함께 나란히 위치해 있다고 치자.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저으며 `왜?', `어째서?', `어떻게?', `뭐야?'라고 말하며 당혹해할 것이다. 자 여기서 우리의 무의식중에 죽어 있던 그 사물들은 그때야 비로소 찬란하게 되살아나고 오묘하고 신비한 존재감을 부여받게 된다.

 

미술사 속에서 이처럼 모순되거나 대립적인 오브제들을 전혀 엉뚱한 환경에 놓음으로써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킨 화가가 있다. 바로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이다. 그는 사물의 본질들을 역설적으로 결합한 `낯설게 하기', 즉 `데페이즈망(Depaysment)'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철학을 그리는 화가이다. 그의 작품 (개인적 가치)를 읽어보자.

 

이 작품에서 우리는 일견 기존의 재현체계, 의사소통의 체계를 거부하고 논리적인 자연의 비례법칙을 무시한 화면구성을 볼 수 있다. 거대화된 빗과 컵, 비누, 성냥개비, 화장용솔 등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버린 듯한 침대나 장롱과 대비를 이루며 기이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대립적인 물건들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서 이대로라면 사용할 수 없는, 일상 속에서는 그 기능을 잃은 것들이다. 또한 안과 밖, 혹은 화장대와 침실이 한 화면에 응축되어 있어, 회화 속에 재현된 현실과 실제 현실 간의 모호한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명백하게 실재하는 현실이란 것 자체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의 그림언어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을 건네며 끊임없이 수수께끼와 의문을 던져준다.

 

마그리트는 시공간의 마술적 변조나 문법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역설, 즉 일상의 사물들을 생소한 콘텍스트 안에 던져놓음으로써 관계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 그는 내면의 정신세계와 사고의 관계, 현실의 이면에 숨겨진 세계, 고정된 우리의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유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존재와 리얼리티의 철학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람의 마음속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고, 우리가 진리라고 믿었던 세계는 실은 일상적으로 파악되는 인습적, 가면적인 체계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이 융합되는 분화하기 이전의 자유로운 사고의 순간을 즐겨 표현해왔던 그에게는 데페이즈망이라는 기법이 매우 적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시적인 것이 실재인가? 비가시적인 것이 실재인가? 인식의 주체인 우리는 무엇을 자각하든 그것은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라 단지 인식작용을 통해 재구성된 이미지를 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마그리트의 회화의 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그림 밖의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고 간섭하는 `파레르곤(Parergon)'인 것이다.

 

「출처-충청 타임즈 2018.10.11 이상애와 함께하는 미술여행」기사 발췌

 

짐작하겠지만 르네 마그리트에 대해 장황하게 인용한 것은 이우디 시인의 작품이 르네 마그리트가 추구한 예술세계의 한 단면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비록 한 작품은 회화고 한 작품은 시라는 장르이지만 두 예술이 추구하는 지향점은 인식 작용을 통해 재구성된 이미지화에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침실의 철학*

 

이우디

 

얼굴을 버린 옷가지에 탱탱 불은 젖이 매달려 있다. 그 속에서 흘러나온 뽀얀 젖. 흘러내리는 것 같다. 보이지는 않지만 젖 줄기에 닿은 엄마 눈물이 실개천을 흘러내리는 것 같다. 젖몸살 앓던 엄마 신음소리 졸졸 흐른다.

 

잠결에 언뜻 들었던 그 소리, 얼음장 깨지는 소리처럼 찡하니 가슴 조각내는데 액자 밖으로 굴러 떨어지는 그림을 보니 밤꽃 냄새 말라붙은 물음표가 보인다. 왜 우는 거니, 묻는 물음표 아래엔 얼굴 없는 여자의 옷,

 

무릎도 발목도 보이지 않는 치맛자락 앞에 신발이 되지 못한 발가락이 놓여 있다. 엄마, 아파 아파 울면서 왜 자꾸 아를 낳노, 젖이 흐르는 옷에서 어서 도망가라고 떼쓰던 어릴 적 뒷산보다 높던 젖무덤은 무덤이었다.

 

난산의 기억 봉합한 어머니의 발가락이 도망 못 간 채 가지런히 놓여있는 그 옆에서, 도망가지 않으면서 따돌리지 못한 여자의 내력을 쓴다.

 

초분初分처럼 침실의 말맛은 지금도 첫, 봄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어쩌면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이 눈 밖이 아닌, 세상의 눈 밖에 있는 나의 모습이라면? 그런 가정을 해 본다. 일반화된 현상을 제3의 눈으로 볼 때, 그 가정은 상당히 다른 장면을 연상하게 만든다. 내가 너를 보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보는 것을 내가 너를 보는 것으로 착각하고 산다면 과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잠결에 언뜻 들었던 그 소리, 얼음장 깨지는 소리처럼 찡하니 가슴 조각내는데 액자 밖으로 굴러 떨어지는 그림을 보니 밤꽃 냄새 말라붙은 물음표가 보인다. 왜 우는 거니, 묻는 물음표 아래엔 얼굴 없는 여자의 옷,/

 

이우디의 시는 그저 그렇게 툭툭 던지는 단어의 나열 속에 해답이 있다. 조각조각 균열된 시적 단어의 나열과 그 부조합 속의 조합은 미묘한 이미지를 확대 혹은 축소 재생산하는 소재가 된다. 밤꽃 냄새/가슴 조각내는데/액자/얼굴 없는 여자의 옷/등의 나열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다소 전위적이지만 이타적인 심상이다. 내 것 이면서 네 것이라고 표현하면 어느 정도 맞을 듯하다. 나와 타자를 동일시하는 시선에서 시적 모티프를 발견하는 재미를 주는 이우디 시인이다. 시의 3연은 계속해서 더 많은 주제에 대한 단서를 모호하게 만든다.

 

난산의 기억 봉합한 어머니의 발가락⟷ 도망가지 않으면서 따돌리지 못한 여자의 내력

 

결국 난산이라는 것은 얼굴을 버린 탱탱 불어 터진 젖에서 단서를 유추하게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독자의 심상에 시인이 던지는 명징한 말은 한마디도 없다. 그러면서도 명징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결구를 본다.

 

초분初分처럼 침실의 말맛은 지금도 첫, 봄이다/

 

지금도 첫, 봄이라고 한다. 지금과 첫 봄, 의 상관관계가 만드는 이미지에 주목해서 보면 이우디 시인이 침실의 철학에서 끌고 온 르네 마그리트의 세계관을 읽을 수 있다. 시제와 본문의 엮음이 이질적이면서도 동질적 성향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모던한 현대적 매력을 충분히 장착한 시의 미사일 같은 느낌이다.

 

마지막 소개할 작품은 최서인 시인의 [내 귀는 주렁주렁]이라는 작품이다. 동 작품은 매우 공감각적인 요소들을 많이 구비하고 있다. 최서인 시인을 검색해 보니 수필과 소설 등을 쓰는 작가다. 소설과 수필은 시와는 좀 더 다른 구성적 요인과 표현적 요건이 다르다. 시는 빼는 예술, 소설은 더하는 예술이라는 구태의 관점에서 볼 때 시의 구성이 감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충분히 더 한 작품은 이른바 튀는 맛이 있다. 시의 구조적 방법도 눈길을 끌지만 언어의 채집 측면에서도 상당히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시적 순수성과 소재의 시인성에 주목해 작품을 읽었다.

 

내 귀는 주렁주렁

 

최서인

 

멧새들이 내 귀에 봄을 파종하느라 분주하다

포르르 날아와

귓바퀴 두 발로 가볍게 쥐고 콕, 콕,

 

새의 진지한 표정을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다면

두 귀 공손히 내미는 것이 예의

노란 예감의 속삭임들이 궁금해도 짐짓 눈 지그시 감고

오감五感의 보자기 활짝 펼쳐야 한다네

 

흰 꼬릴 흔드는 버들강아지

새콤달콤 꽃으로 버무린 화단

대문 밖으로 걸어 나오는 초록 모자의 아이

 

달팽이관 안쪽, 어제의 불면을 끝낸 씨앗들이

게으른 기지개를 켜고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내 귀의 만찬

 

풍선보다 가벼운 꽃받침들이 나를 한 뼘쯤

공중의 정원으로 들어 올리네, 활짝!

구름의 귀불 네게도 사과 꽃 귀고릴 달아줄까

 

사르르! 아이스크림 되어 녹는 하늘

부리 노란 새가 한 입 베어 먹고선

이 시리다며 살구나무 겨드랑이에 졸음을 비비고

 

동그랗게 모아지는 나의 두 어깨 위에

얼굴을 묻는 바람의 오수午睡

세상 모든 것들의 귀마다 초록의 편도로 달려오는

나, 귀고리 같은 봄을 매달고 주렁주렁

 

시는 별도의 내용 해설이 필요 없을 정도다. 다만, 시인이 이끄는 대로 시인이 들고 있는 셀카의 뷰 파인더를 눈으로 쫓아가면 된다. 하지만 무작정 시인의 눈을 쫒아가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독자가 멈춰야 할 지점을 명확하게 지정해 준다. 저를 따라오세요 오시다 거기서 잠시 멈춤!이라고 이야기 하는 듯하다.

 

새의 진지한 표정을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다면

두 귀 공손히 내미는 것이 예의/

 

구름의 귀불 네게도 사과 꽃 귀고릴 달아줄까/

 

세상 모든 것들의 귀마다 초록의 편도로 달려오는

나,/

 

최서인의 시를 읽으면 발걸음이 경쾌해진다. 빨리 걸을 일도, 두리번거릴 일도, 세상에 현혹될 일도, 계산에 집착할 일도, 타성이라는 안주를 씹을 일도, 화려함에 눈이 멀 일도, 모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최서인 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풍경의 배경이 갖고 오는 또 다른 ‘허무’의 본질에 귀 기울이게 된다. 필자는 시를 읽으며 본문 글자의 정반대 의미로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마치 거울은 늘 나를 반대로 보여주듯, 어쩌면 그 지점에 최서인 시인의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심증이 든다. 그것은 시의 분석이 아닌 시적 본질에 대한 원초적 느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 귀에 주렁주렁 달린 것은 내 눈에 박혀있는 정물화 된 물상의 이미지가 아니라(어쩌면 주렁주렁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주는 이른바 귀차니즘 같은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한) 물상이 갖고 있는 배후를 눈여겨보게 되는 묘한 시적 전위를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필자는 정작 필자의 주장과 정반대로 시를 계량화하여 보는 것은 아닐까? 글을 맺으며 필자도 모를 당혹감에 잠기게 한다.

 

귀고리 같은 봄을 매달고 주렁주렁/

 

좀 더 정확한 문법적 어순이라면 귀고리 같은 봄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맨 뒤에 달려있는 주렁주렁 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그 의도를 분석하기보다는 주렁주렁이 주는 어감 그 자체에 몰입하고 싶다. 그것이 바로 느낌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봄이 간다. 여름이 온다. 이 여름의 초입에 필자에게 주어진 시 세 편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힘을 준다는 느낌이다. 독자 제현의 건강을 진심으로 기원 드리며 맺는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4,162건 5 페이지
내가 읽은 시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추천 날짜
3962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0 0 04-19
3961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1 0 04-19
3960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0 0 04-17
3959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0 0 04-17
3958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0 0 04-16
3957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80 0 04-16
3956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1 0 04-15
3955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7 0 04-15
3954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6 0 04-15
3953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6 0 04-14
3952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3 0 04-14
3951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3 0 04-14
3950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6 0 04-13
3949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4 0 04-13
3948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7 0 04-13
3947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6 0 04-12
3946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8 0 04-11
3945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1 0 04-11
3944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8 0 04-10
3943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7 0 04-10
3942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7 0 04-09
3941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89 0 04-09
3940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4 0 04-09
3939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7 0 04-08
3938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2 0 04-08
3937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9 0 04-08
3936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9 0 04-07
3935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8 0 04-07
3934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3 0 04-07
3933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5 0 04-06
3932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5 0 04-06
3931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 0 04-06
3930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7 0 04-06
3929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7 0 04-04
3928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0 0 04-04
3927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5 0 04-04
3926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5 0 04-04
3925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6 0 04-04
3924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3 0 04-03
3923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5 0 04-03
3922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5 0 04-03
3921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2 0 04-02
3920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1 0 04-02
3919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3 0 04-02
3918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8 0 04-01
3917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8 0 04-01
3916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4 0 04-01
3915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4 0 04-01
3914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4 0 03-31
3913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6 0 03-31
게시물 검색

 


  •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 (07328)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0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645호
  • 관리자이메일 feelpoem@gmail.com
Copyright by FEELPOEM 200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