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잘된 시 [대리기사/서영택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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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78회 작성일 19-09-05 17:24본문
* 잘된 시, 좋은 시
-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대리기사 / 서영택
등, / 안은숙
일상적 사물/ 이강
말복이 지나갔다. 무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인 듯하다. 기록상으로는 작년에 비해 올 해의 무더위 지수가 그리 높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올 해가 더 덥게 느껴진다. 작년을 돌이켜보면 실내온도가 한때 37~8도를 육박했던 날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올 해가 더 덥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지금’이라는 무의식이 작용한 듯하다. 지금이라는 말은 현재라는 말이며 동시에 과거는 모두 과거일 뿐이라는 논리도 될 것 같다. 삶에 대입해보자. 지나간 것은 상처, 기쁨, 이별, 만남 등의 모든 것의 크기가 현재라는 것에 비해 느낌의 강도가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한 것들 다만, 지나간 것이라는 말이다. 시를 생각해 본다. 적어도 시에 있어서만큼은 ‘지금’이라는 논리가 성립되기 어려울 것도 같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좋은 시는 좋은 시로 가슴에 남아 있게 마련이다. 현대시의 트렌드가 다중구조, 미래파, 난해 시, 등이 문학적 진화를 통해 문단에 새로운 사조로 자리매김하고 그 탁월한 문학적 가치는 충분히 박수 받을 가치가 있다. 또한 필자 역시 그런 진화의 결과물을 보면 저절로 감탄을 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문학적 진화가 아무리 더 발전한다 해도 김소월의 진달래는 여전히 진달래로 남아있을 것이며,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는 아직도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남아있다. 비록 현대 문단의 시 풍조와 비교할 때, 김소월 혹은 박인환의 시가 1: 1 대응을 하게 되면 분명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시가‘ 지금‘이라는 범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박인환 시인이 현대에 살았더라면, 그래서 신춘문예에 도전했다면, 과연 그가 당선을 했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 그 답은 이 글을 읽는 독자 나름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상의 이면에는 시에 대한 평가기준이 존재한다. 평가는 사람이나 사물의 가치나 수준을 일정한 기준에 의해 따져 매기는 지극히 인위적인 행위다. 평가의 잣대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범용적인 기준선은 ’ 지금‘이라는 것이다. 지금과 비교할 때 그의 작품은 혹은 누구의 시와 비교할 때 이 작품은?이라는 잣대의 기준점은 ’ 지금‘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평가를 다만, 평가에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평가에 가치를 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위험한 발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의 기준점이 ’지금‘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사회 구조, 그 당시의 문화 사조, 그 당시의 문학적 배경, 배후 등을 계산에 넣지 않고 다만, 진화한 문학의 결과물을 기준으로 예전의 작품을 비교하는 것은 어쩌면 문장을 문장으로 읽거나 쓰는 일종의 교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기혁의 ’ 지주망‘과 박인환의 ’ 목마와 숙녀‘를 시의 구조론이나 시의 형상화 등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은 문학적 가치를 바탕에 둔 비교가 될 것이며 자칫 박인환 시인과 기혁 시인 모두에게 치명적인 폄하가 되거나 그 반대가 되거나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시 작품은 비교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필자는 반대하는 편이다.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하여 시인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며, 그 한 편을 잠시 읽는 독자는 시 한 편에 담긴 시인의 모든 것을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이 슬프지만 사실일 것이다. 그 당시의 시는 그 당시의 문예사조일 뿐 그것이 좋고, 나쁜 혹은 차원이나 수준이 높고 낮고를 ’ 지금‘이라는 기준점에서 단순비교하는 것은 시문학적 가치 제고 측면에서는 매우 유용한 분석이 될 것이나 ’ 시‘라는 것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어쩌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우매한 생각이다. 이러한 것을 이번 달 소제목의 근간으로 두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잘된 시와 좋은 시를 짚어보고 싶다.
잘된 시, 좋은 시에 대하여는 많은 시인들, 평론가들이 문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그 분분한 의견을 지면에 소개할 수는 없기에 다만, 필자의 이분법만을 피력해 본다. 일반적으로 잘된 시는 평가라는 잣대를 두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른바 문학적 가치에 근간을 두고 그 진화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시의 구조론과 형상화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을 잘된 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주 쉽게 풀어서 이야기한다면 기존에 나와 있는 혹은 발표된 시들 중에 첨단의 기법을 사용한 작품. 연과 연이 다르면서도 결국 그 각 연마다의 낯섦을 하나의 당위성을 묶는 다중구조의 시는 상당한 내공을 바탕으로 연마다 키워드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묘미를 준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 방향, 시인이 의도라는 상상과 연상과 다른 세계와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이 각각 다른 입구를 통해 들어오게 만든다. 이러한 시적 구조는 작품을 입체적으로 보게 한다. 마치 정물화나 풍경화가 아닌, 추상파 화가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하면 비유가 적절할 것 같다. 추상이라는 것은 개별의 사물이나 표상의 공통된 속성이나 관계 따위를 뽑아내는 것을 일컫는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가 아닌, 보이는 것은 내가 본 대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이는 대로’라는 말속엔 범용이라는 것이 의식에 작용한다. 범용은 여러 분야나 용도로 널리 쓰이는 것이라는 의미와 일이나 사물이 별다른 점 없이 평범하다는 의미가 있으며, 다른 말로 일반적이라는 말과 유사할 듯하다. 사물이나 개체를 볼 때 내가 본 것이 네가 본 것이 되고, 우리는 같은 모양이나 형태를 본 것이 되는 것을 범용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추상이라는 것은 그 기본적인 속성에 Ego라는 것이 작용한다. 내가 본 것이 된다. 당신이 본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것에는 나의 심미적인 관점과 나의 상상력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많은 해석을 갖게 만든다. 다의적이며 중의적인 형상으로 재탄생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시의 내적 충만이 ‘나’를 기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면 적정할 듯싶다.
필자가 생각하는 잘된 시의 공통점은 한 번에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한 번에 읽히지 않는 것은 필자의 과문하고 어눌한 시 공부와 견해가 문제일 수 있지만 독자의 몫이라는 아량을 한껏 내가 내게 베풀어 보면 어느 정도 변명은 될 듯하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잘된 시는 비교적 ‘비틀기’에 성공한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천양희 시인의 말처럼 시, 낯설게 하기에 충실하게 응답한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든다.(물론, 천양희 시인의 낯설게 하기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밝힌다.) 다만, 필자는 낯설게 하기는 글자 그대로에 충실한다는 말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를 때가 더 많다. 필자의 과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차치하더라도 과연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는 것이 잘된 시의 공통점이라니! 필자 역시 일반적인 독자라는 것을 기준으로 생각해도 잘된 시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의 면면이 어쩌면 시와 독자 사이의 간극을 멀어지게 하는 것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한 적이 많다. 물론 잘된 시의 문학적 가치와 그 수사적이고 구조적인 진화에 대하여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고무적이며 위대하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볼 문제는 분석의 대상이나 평가의 대상으로는 매우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일독 한 후 머리 혹은 가슴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는 시는 소통이며 울림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잘된 시 속의 소통과 울림을 파악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을 읽고 또 읽고 해도 수월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이 지점이다. 가치와 진화는 인정하고 박수 치지만 시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 감정의 이입, 교류, 소통, 당위성에 대한 즉각적인 이해 더 나아가 ‘울림’이라는 기본적 가치 측면에서 볼 때 잘된 시는 좋은 시와 확연하게 구별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좋은 시,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시는 위에서 언급한 그러한 부분이 충족된 작품을 좋은 시라고 말하고 싶다. 좋은 시의 공통점은 소통이다. 시인이 느낀 것을 독자가 공감의 영역 속에서 같이 느끼는 것이다. 세상을 보고 느낀 시인의 감정을 혹은 시인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거나 받아 비로소 내 것이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은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말이다. 의견이나 의사 따위가 남에게 잘 통한다는 말이다. 나와 관계하지 않은 남, 일면식도 없는 남, 모두 타인이라고 한다. 그 특정되지 않은 타인에게 내 느낌이나 감정의 속성을 송두리째 제공할 수 있다면 적어도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성공한 작품이다.
소통에 성공했다면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따라오는 것이 ‘울림’이다. 울림은 감정의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공략하여 명백한 메시지를 만드는 것이다. 무명 시인의 ‘아내’라는 작품을 잠시 소개한다.
아내
(작가 미상)
아내가 아프다
바라보는 내가 더
아프다.
이 작품에는 어떤 시적 장치도 없다. 어떤 구조도 없다. 어떤 형상화도 없다. 어떤 낯섦도 없다. 하다못해 어떤 수사도 한 줄 없다. 일상어로 썼다. 아내가 아프고 그걸 바라보는 내가 더 아프다는 말이 내포하는 부부간의 사랑과 그 아픔을 대신하고자 하는 남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물론 현대시의 트렌드로 보면 혹자에 따라 시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작품이야 말로 시의 본질을 정확하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 과연 어떤 수사로 더 치장하면 이 작품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필자 생각에는 더 이상의 수사와 구조와 이론과 평은 이 작품을 낮추는 결과만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우리는 시를 쓰다 보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어 말의 꼬리를 잡고 한 없이 늘려가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든 20행 또는 25행을 맞춰야 한다는 아무 근거 없는 행과 연의 길이에 현혹되어 시를 망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도대체 왜 시가 1행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가? 단 1행이라도 그 속에 소통이 있고 울림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독자의 가슴속에서 두고두고 기억되고 성찰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시의 목적, 본질이 달성되는 것이 시라는 것에 무엇인가에 대한 정답이라는 것이 천학 비재한 필자의 엉성한 시적 논리다. 그것에 토를 단다면 필자는 아무 할 말이 없다. 다만, 공부가 부족함을 피력하는 수밖에...
잘된 시, 좋은 시, 어쩌면 그런 이분법적인 구분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자가당착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시와 독자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는 안타까운 현실에 반추해 볼 때, 잘된 시와 좋은 시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그 해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잘된 시 속에 좋은 시의 속성을 부분집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집합을 만드는 것. 어쩌면 그것이 현대 시가 가야할 올바른 방향이라는 생각이다. 문학적 가치 속에 소통과 울림이라는 양념이 적절하게 가미되어 팔팔 끓인 된장찌개가 될 때, 독자의 숟가락이 한 번 더 그 속으로 가지 않을까 싶다. 일방적인 진화는 분명하게 반대한다. 잘된 시로의 진화와 좋은 시로의 회귀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고 공존할 때 독자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품이 될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처음 접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매우 유명한 조병화 시인의 작품이다. 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애송하고 자주 들려주는 작품이다. 잘된 시, 좋은 시에 대한 위에 언급한 필자의 견해를 가볍게 무시하고 감상해 보자.
공존의 이유 12
조병화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너 만이라든지
우리 들 만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일세라든지
같은 말들은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것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올 때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모던 포엠 2019.09월호에서는 본 글의 소제목인 잘된 시, 좋은 시에 대한 필자의 견해 중, 잘된 시와 좋은 시의 간극을 좁힌 작품 세편을 (필자의 시각에서) 선별하여 소개해본다. 물론 필자의 견해는 다만, 필자의 견해일 뿐이라는 점을 먼저 밝힌다. 견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며 필자의 견해가 반드시 정답이 아니라는 점도 먼저 밝힌다.
첫 번째 소개할 작품은 서영택 시인의 [대리기사]라는 작품이다. 세상에는 많은 직업들이 태어나고 소멸하기도 한다. 현대사회는 그 직업의 생성과 소멸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다. 필자의 유년 시대에 그 흔한 쌀 집, 석유 집, 얼음집, 연탄가게, 필름 집, 이 모든 직업은 이미 하나도 없다. 그만큼 사회가 발전한 것의 반증이다. 대신 그 시절에 상상도 못 한 직업들이 탄생했다. 반도체, 융합, 스마트 폰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직업군들, 그중 하나의 새로운 직업군 중에 [대리기사]라는 직업이 생겼다. 전 국민이 알고 전 국민이 자주 찾는 직업이기에 별도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 생략한다. 시인은 대리기사로 일하시는 분들의 애환과 사회현상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일인칭의 관점에서 기술하면서도 느낌은 전지적인 관점과의 평형을 잘 유지한 작품이다.
대리기사
서영택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둠이 무너지고 있다
거리에
허물어지는 발자국이 쌓이고
웃다가 우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핸드폰을 꺼낸다
매번 도착지가 다른 장소로 수신된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얼마나 많은 불빛은 목적지를 태우고 사라졌는가
맞은편 도로가 건너온다 사라진 목적은 거기쯤 있을 거라고 누군가
말한다 오늘의 신호는 바래가고 바탕화면에 그림자만 서성인다
거리는 끝내 날 기억하지 못한다
다시 휴대폰을 켠다
날리는 광고 사이로
남은 배터리가 지워지고
잃어버린 꿈이 허공에 흩어지고 있다
현대사회가 다변화하고 빠르게 성장하다 보니 새롭게 발생하는 사회문제가 대두된다. 음주운전이라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며 타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중범죄다. 물론 반드시 대리기사가 음주운전을 방지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 대리기사의 역할이 다를 수도 있다.) 대리기사를 호출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음주운전을 하지 않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리기사를 호출하는 고객의 관점이 아닌, 대리기사의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면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이며 어떤 형태의 세계관이 흘러가는지에 대하여 시인의 시선은 매우 담담한 어조를 빌어 삶의 고단함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시인의 대리기사 중 더 많은 비중으로 시선을 끄는 몇 부분을 인용해 본다.
거리는 끝내 날 기억하지 못한다/
남은 배터리가 지워지고/
잃어버린 꿈이 허공에 흩어지고 있다/
대리기사는 매우 유용한 제도이며 보람 있는 직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시대의 피곤한 삶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현대사회의 청년 실업률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소득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이른바 투잡을 하는 계층도 존재한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리기사로만 생활을 이어가시는 분들도 있고, 다른 직업과 병행하여 두 개의 두 개의 직업을 갖고 생활하는 분들도 많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리기사라는 직업은 직업의 특성상 밤에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잦다. 생활리듬이 깨지는 것을 감수하고 일한다는 것은 소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기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과 살아낸다는 것, 삶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특히 살아낸다는 것에는 책임과 의무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다. 그 책임, 의무, 중압감의 반대편에는 자신의 시간을 희생해야만 하는 절박함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삶의 피곤함으로 상존하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직업과 삶의 고단함 사이에 놓인 우리들의 가장, 우리들의 이웃 우리들의 애환을 다시 한번 돌아보자는 의미가 시 속에 존재하는 것 같다. 감정노동자라는 말이 있다. 계층이 어떠하든, 손님과 대리기사 사이에는 근로를 제공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최근에 사회문제로 대두된 손님의 갑질, 혹은 그 반대의 경우는 사회를 힘들게 하고 멍들게 한다. 수평적인 생각과 사고에서 출발하면 아무 문제없는 것을 간혹 그렇지 않는 경우들이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대리기사 하시는 분들도 우리처럼 가족이 있고 꿈이 있고, 목적지가 있고, 돌아가 쉴 집이 있는 분들이다. 대리기사 분들은 호출하는 우리도 호출받는 대리기사가 될 수 있고, 대리기사로 일하시는 분들도 호출하는 입장이 될 수 있는 것이 사회다. 이른바 역지사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를 읽으며 미처 돌아보지 못한 사회와 직업의 이면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둠이 무너지고 있다/
매번 도착지가 다른 장소로 수신된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위 연과 행에 대해 필자의 어떠한 설명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서영택 시인은 정확하게 대리기사 분들의 가슴을 읽고 읽어냈고 표현했다. 수사가 아닌 듯하면서 절묘하게 수사적 표현과 기법을 구현했다. 새로운 메시지와 무너지는 어둠의 상관관계는 어쩌면 대리기사로 국한되지 않는 포괄적, 우리 시대의 직업과 삶에 대한 아픔이 적절하게 내재되어 있다. 다만 [대리기사]라는 앵글에 맞춰 동기화한 것일 뿐 사실은 삶의 모든 부분에 상존하는 가치의 몰락을 말한다는 생각이 든다. 허물어지는 발자국이 쌓이고/웃다가 우는 사람들/의 배후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화상을 보고 있는 듯하다. 결국 우리 시대의 어떤 부분에서의 귀결점은 이 작품의 결구에 있는 것 같다.
잃어버린 꿈이 허공에 흩어지고 있다/
서영택 시인의 [대리기사] 속에는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은 낮고 담백하지만 커다란 궤적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가슴으로 슬그머니 들어오고 있다. 시인이 묘사한 장면,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불빛처럼 남아 있을 것 같다. 언제든 밤이 되면 켜지는 그 불빛처럼.
두 번째 소개할 작품은 안은숙 시인의 [등,]이라는 작품이다. 등은 시의 소재로 많이 다뤄진 소재다. 하지만 안은숙 시인의 등은 시인만의 시선으로 바라본 또 다른 등의 세계가 존재하기에 신선하다. 작품은 시제부터 독특함을 바탕으로 전개했다. 쉼표, 사실 시제에 쉼표를 쓴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경우다. 여러 이론들이 있겠지만 쉼표 이후의 것에 대한 진술의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또한 첫 연은 강렬하게 눈길을 끄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등은 구부러지는 바깥/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깥이라는 것이다. 안의 반대의 개념인 바깥이며 동시에 [바깥]이라는 단어 자체의 바깥, 중심의 바깥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한 중의적인 의미의 바깥이 사용되었다는 점이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 두기에 충분하다.
등,
안은숙
등은 구부러지는 바깥
바깥은 바깥으로 구부러질 때 부러진다
외면했던 순간들보다 외면당했던 순간들이 내게 더 많아 뒤척거리는
것들을 다독여 누워있던 등
나는 오늘도 뒤척거리는 외면을 업고 있다
달의 뒤편은 온갖 소문과 수군거리는 오해를
늘 장식으로 달고 있었다
오래 잊고 있던 이름을 불러준 것도 등이었다
한 번도 수식이 달리거나
화장을 한 적 없는
장식을 달아본 적 없는 등
다만 등의 기억엔 우는 아이가 있고
달래는 흐느낌이 있었던 곳
아무리 뒤돌아서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등
가물가물 소실점
두근거리는 곳을 가장 가까이 두었던 근처
아주 작은 귀가 달린
몇 개의 걸음의 그곳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그 무게로 점점 굽어지고 있는 내 등엔
여전히 울음이 남아 있고
손이 쉽게 닿지 않아 달랠 수 없다
내 등은 보채는 아이의 울음처럼 아팠지만
끝내 엎드렸던 굴욕을
일으켜 세우지도 못했던
등,
등은 구부러지는 바깥이라는 말은 상당한 양의 시적 내공을 축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슴의 바깥 혹은 앞의 뒤가 아닌, (앞의 뒤라면 등은 구부러지는 뒤쯤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바깥이라는 단어를 채집하여 표현했다. 그것은 시의 본문에 대한 시인의 의도를 가늠하게 만드는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며 동시에 시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등, 시제가 의미하는 것도 진중하지만 첫 연의 바깥이 의미하는 것도 시제에서 사용된 쉼표 이상으로 비중이 크다. 그 바깥의 개연성을 2연에서 말해준다.
바깥은 바깥으로 구부러질 때 부러진다
외면했던 순간들보다 외면당했던 순간들이 내게 더 많아 뒤척거리는
것들을 다독여 누워있던 등/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는 등과 바깥의 상관관계를 얼추 짐작하게 된다. 등의 안쪽의 내 삶의 중심이라는 것. 등은 등이 아닌, 나와 단절된 관계를 상징한다는 것, 한 걸음 더 나가면 나와 단절된 이 아닌, 내가 단절한 으로 변형시켜 생각하게 된다, 나와/ 내가 의 차이는 매우 크다. 수동태와 능동태, 사고의 출발은 아주 많이 다르다.
외면했던 순간들보다 외면당했던 순간들이 내게 더 많아/
시인 자신의 등, 안쪽에 산재해 있는 아픔의 깊이를 짐작하게 되는 구절이다. 그러면서도 탈출구 없는 반어법적 위증을 한다.
나는 오늘도 뒤척거리는 외면을 업고 있다
어렵지 않은 표현으로 어려운 생각을 침착하게 이야기하는 시인의 화법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시인은 이미 바깥이 되어버린 등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다.
오래 잊고 있던 이름을 불러준 것도 등이었다/
동시에 시인은 등, 과 자신의 관계를 부정할 수도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에 진술의 방점을 찍고 있다.
몇 개의 걸음의 그곳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그 무게로 점점 굽어지고 있는 내 등엔
여전히 울음이 남아 있고
손이 쉽게 닿지 않아 달랠 수 없다/
내게서 멀어진 모든 것들에 대한 회한, 미련, 억울함, 분노, 애증, 아쉬움 모든 감정의 기복과 차가운 이성의 공존, 그것이 시인이 보고 있는 이 사회과 세계에 대한 시인의 지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하게 글자로 표현되는 것의 이면보다는 등, 의 내면을 자세하게 사유해 보면 등, 이 등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 나를 떠나간 내가 떠나보낸(삶의 모든 부분이다.)것조차 한 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인만의 세상 살아내기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유니크하고 모던한 좋은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품은 이강 시인의 [일상적 사물]이라는 작품이다. 이강 시인의 작품은 일상이라는 모티브 Motive가 제공하는 것들을 시의 소재로 사용했다. 쉽게 말하면 보이는 것들이다. 눈에 쉽게 보이는 것들, 삶에서 쉽게 보이는 것들, 관계에서 쉽게 보이는 것들, 공간에서 쉽게 보이는 것들, 길에 나서면 쉽게 보이는 것들, 그 쉽게 보이는 모든 것들에서(사물이라고 통칭하자.) 쉽게 볼 수 없었던 일상 아닌 일상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이강 시인만의 매력이 존재하는 작품이다.
일상적 사물
이강
벗어놓은 사물들이다
천장에 매달린 빈껍데기들이다 그 사이에서 당신이 무엇인가를 찾는다
기울어지는 햇빛이 의자에 몰려 있다
세탁소에서 유일하게 따듯한 곳이다
굴러다니는 풍선, 인도에 박힌 콘크리트 말뚝, 가로등에 걸린 예술로
140번 길, 차 없는 차도에 방향을 알리는 흰 화살표, 잃어버린 당신의
기대, 세탁소 밖 사거리 혹은 안의 풍경
천장에 걸린 옷들은 인칭이 없고
사물들은 서쪽 허공에서 가볍게 쉬고 있다
당신은 사라진 시간을 이어주는 작업을 시작한다
풀린 공간에 비늘을 넣는다 한 땀이 끝나는 점과 시작점을 이어
붙인다
옷에서 풀린 공간을 찾을 때마다 그늘이 분가루처럼 날린다
당신이 그늘의 점과 점을 이어가는 작업을 계속할 때
오후를 닮은 긴 실이 옷 속으로 들어갔다 나올 때
사실 일상에서 일상이 아닌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인은 시인만의 독특한 관점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면 이강 시인의 일상적 사물에 대한 기본 전제가 성립될 것 같다. 가령 시제를 일상 혹은 일상의 사물이라고 했다면 다소 흥미가 반감될 수도 있으나, 적的이라는 일종의 구체적인 형태를 갖고 존재하는 대상들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의미의 的을 사용함으로 인해 사유의 확장성을 갖게 된다. 필자 역시 的이라는 시제의 작품은 발표했기에 더욱 공감이 가는 的의 용법이다.
벗어놓은 사물들이다
천장에 매달린 빈껍데기들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일상적이라는 것들에 대한 결구부터 던져놓고 시작한다. 다음 연에서 일상이라는 것에 대한 무게, 비중, 배후를 일종의 의미점층법으로 3연을 끌고 가는 기법이 좋다.
굴러다니는 풍선, 인도에 박힌 콘크리트 말뚝, 가로등에 걸린 예술로
140번 길, 차 없는 차도에 방향을 알리는 흰 화살표, 잃어버린 당신의
기대, 세탁소 밖 사거리 혹은 안의 풍경/
독자는 이 지점에서 일상이 일상이 아닌, 몽환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착오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차분하게 들여다보면
풍선은 하늘 위에, 차는 도로에, 흰 화살표는 질주하는 차량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시인에게 일상이 아니다. 굴러다니는 풍선과 잃어버린 당신에 대한 기대가 일상이라는 일상 아닌 일상에 대한 아이러니를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천장에 걸린 옷들은 인칭이 없고
사물들은 서쪽 허공에서 가볍게 쉬고 있다/
인칭, 옷, 사물, 서쪽 허공/ 없고/ 있고, 이 모든 것들이 대비하여 만드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유쾌해진다. 시적 의미에 대한 유쾌가 아닌 시인이 만들어내는 언어적 몽환에 쉽게 젖는다. 같이
때때로 일상은 일상이 아닌 것으로 인식될 때, 가장 일상적인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강 시인의 시가 독자를 그렇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일상으로 인식되어 있던 것들이 사실은 일상이 아닌 삶의 중심점이었다는 사고의 추론은 인식의 전환이며 동시에 인식의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당신은 사라진 시간을 이어주는 작업을 시작한다/
당신이 그늘의 점과 점을 이어가는 작업을 계속할 때/
이강 시인의 시는 쉽게 읽다가 어려운 구석으로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묘한 언술적 테크닉을 갖고 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읽을수록 읽는 횟수에 비례하여 각각의 다른 맛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 그 부분이 가장 큰 장점이며 잘된 시, 좋은 시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잃어버린 당신의 기대 혹은 잃어버린 당신에 대한 기대, 두 가지 모두 기억의 디엔에이에 축적되어 남아 있을 것 같은 좋은 작품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밤을 꼬박 새웠다. 더운 열기의 바람이 그나마 가신 새벽, 열대야의 풍광이 좋다. 독자 분들이 책을 받게 될 때쯤 지긋지긋한 여름이 끝날 것 같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의 문턱에서 좋은 시를 읽고 쓰기에 가장 좋은 계절과 만날 독자 제현의 행복을 기원드린다. 건강한 하루로 듬뿍 채워질 가을을 빚어내길 진심으로 간구하며 맺는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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