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필 원고/문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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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14회 작성일 21-01-24 19:34본문
육필 원고
시인 L에게
문성해
그저께는 잡지사에서 보내달라는 육필 원고를
주머니에 꽂고 다니다 잃어버렸지요
남의 가게 쓰레기통을 뒤지고
낙엽들 사이를 헤집던 그날 밤
백지를 잘게 찢듯 눈이 내렸어요
눈을 안경에 맞고 숨결에 섞고 보니
그날 나는 시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시가 내게서 나간 것임을 알았어요
내가 하얀 종이 위에 지문을 묻히며 쓴 것들이
어느 음식점 밑에서 구정물에 젖다가
비루먹은 개나 쥐새끼 코끝을 간질이다가
퉁퉁 불다가
조용히 퍼지다가 마침내 찢어지니
나는 시를 잡지사가 아닌 공중으로 돌려보낸 거라는 거
그날 밤 까칠한 내 얼굴 위로
자꾸만 신발을 벗어놓던 그 눈발도
해진 주머니를 빠져나온
누군가의 졸시였단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는 거였어요
- 시집 <입술을 건너간 이름>에서, 2012 -
* 시인의 특기는 실생활에서 섬세하게 시를 끄집어내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잃어버린 시조차도 시가 되는 시인의 감성은 눈처럼 내게도 쏟아진다.
그러니깐 시인의 시를 읽는 건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에 적힌 사람다움이 넘치는,
추억들을 하나 둘 꺼내보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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