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양의 유산/이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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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67회 작성일 21-04-10 19:09본문
산양의 유산
이병일
내가 잃어버린 침구는
희고 아름다운 불면증을 가진 자작나무숲인데
자정 이후 나는
저 퍼붓는 흰 빛이
텅 빈 골짜기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내 그림자를 쫓아와
내 짧은 목을 와락 쑤시는 검은 털의 스라소니,
첩첩하게 더운 숨을 뚝, 뚝 부러뜨린다
목이 달랑거리고,
줄줄이 내장 뜯길 때까지
나는 잠들지 못했다
이 겨울밤은 침침한 비명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나는 흰 빛이 숲을 표백시키고
뿔의 테두리마저 녹이는 소리를 들었다
침묵하고 있는 음침한 바람 계곡이
나를 검불로 헤집었지만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이끼 낀 밤을 위해 기도했다
흰 빛을 좋아하는 것들은 꼭 겨울밤에 죽었지만
사실 나는 흰 빛이 눈 속에 가득 차서
숲의 불면증 속으로 들어가보지 못했다
- 시집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에서, 2016 -
* 이 시를 몇 년 전에 읽었지만 전체 내용보단 하나의 하얀 이미지만 남아 있었다.
그런 면에서 내 기억에겐 좋은 시다.
제목의 산양은 어느 구절에서도 언급되지 않고 시 전체의 이미지로 작동하고 있다.
불면증, 산양, 자작나무숲과 대비되는 스라소니에 이르러, 시는 절정을 맞는다.
그리고 산양의 유산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그림자처럼 흘리며 시는
자작나무숲의 불면증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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