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호주머니 속의 산책/강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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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호주머니 속의 산책
강성은
손이 시려서 너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눈이 펄펄 날리고 있어서
나의 한 손을 거기 넣었다
그 캄캄한 곳에 너의 손이 있어서
나의 한 손을 거기 넣었다
그날 우리는 걸어서 어디로 갔나
두근거리는 손 때문에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흰 눈이 내리는데 햇빛이 환한데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는데
심장이 된 손에 이끌려
우리는 쉬지 않고 걸어서 어디로 갔나
우리는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데
우리는 잡은 두 손을 놓은 적이 없는데
호주머니 속에서
불안은 지느러미를 흔들며 헤엄쳐다니고
그림자로 존재하는 식물들이 무서운 속도로 자라났다
우리 두 손은 검게 썩어들어갔다
어째서 너의 손은 이토록 비릿하고 아름다운가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검은 피가 흘러나와 우리 발목을 적실 때에도
우리는 이토록 생생한 봄을 상상했다
언젠가 우리는 각자 다른 계절을 따라 사라졌지만
호주머니 속에는 아직도 폐허의 공터에
날카로운 손톱으로 서로를 깊숙이 찌른 두 손이
펄펄 날리는 흰 눈을 맞고 서 있다
-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에서, 2009 -
* 이제니, 안미옥, 유이우, 강성은.
이들 시인들은 시를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르치려 들지 않고, 거창한 담론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냥 시를 즐겁게 쓰고, 음악처럼 리듬감을 가지도록 한다.
이들 시인들의 시는 그들의 시집 전체를 쭈욱 잃어내려가야 느낌이 온다.
마치 가수의 음반을 다 들어봐야 그 음악성을 헤아릴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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