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이 병인 양 / 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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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기차를 탑니다. 거짓말입니다. 한주일에 한번씩 탑니다.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실은 한달에 한번쯤 탑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사실을 바라는 건 배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꽉찬 배신은 꽃잎 겹겹이 들어찬 장미꽃처럼 너무 진하고 깊어 잎잎이 흩어놓아도 아름다울 뿐 다른 방도가 없다 합니다.
2
산수유가 빨갛게 동백꽃을 떨어뜨립니다. 흰 목련이 거짓말을 하더니 샛노란 은행나무가 됐습니다. 정말입니다. 사람 안에는 사람이라는 다민족, 사람이라는 잡목숲이 살아 국경선을 다투다 갈라서기도 하고 껴안다, 부러져 못 일어나기도 합니다. 꽃필 때 떨어질 때 서로 못 알아보기도 합니다.
3
당신은 세상 몰래 죽도록 다정하겠다, 매일 맹세하죠. 거짓말이죠. 세상 몰래가 아니라 세상 뭐라든이 맞죠. 아시죠. 이것도 거짓말. 사실은 매일이 아니고 매시간이죠. 매시간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진실이 너무 가엾어서죠. 나사처럼 빙글대는 거짓말은 세상과 나를 당신을 더욱 바짝 조여줍니다.
4
진흙으로 만든 기차 같죠 어디든 가겠다 하고 어디도 가지 못하죠 다정이 죽인다 매일 타이르죠 종잇장 같은 거짓말에 촛불이 닿을 듯 말 듯 촛농같이 흘러내리는 다정, 뜨거움이 차가움을 잡는지 차가움이 뜨거움을 모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다정이라는 거짓말 죽지요. 죽이지요.
창비2008 김경미[고통을 달래는 순서]
감상평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와 [고통을 달래는 순서]를 읽었다
김경미의 시집은 일상적인 은은한 향기가 배어서 읽기가 편했다
위의 시는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인데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적이 없을 만큼 거짓말에 익숙한 지적생명체다
시는 거짓말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시인들이 많다
시는 진리이고 믿음이기에 거짓말이라고는 일절 생각하지 않는 시인들이 많다
시란, 거짓말이든 사실이든 음서던 양서던 가르침을 받았다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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