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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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
=박성현
매일, 흰 눈이 내렸다 가장자리는 높고 안쪽은 따뜻했다 늦도록 기울어진 초승달과 새파란 별이 곁을 지켰다 언덕에 앉으면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앙상한 뼈에 달라붙은 옛날이 초록의 깊은 곳으로 물러났다 나는 울음을 꺼낼 수 없어 매일, 흰 눈을 뭉쳐 당신을 조각했다 바람이 등에 기대 휘파람을 부는 사월이나 피와 녹이 사납게 엉겨 붙는 구월에도 매일, 눈을 뭉쳐 당신의 악보와 의지를 그렸다 흰 눈이 내렸다 제발 그만이라 말해도 흰 눈 내리는 사월과 구월은 그치지 않았다 머물 수 없어 떠나는 이유가 회오리치는 대낮이라면 이제는 믿어야 할까 매일, 흰 눈이 내리고 혼자 부르는 노래는 상냥했으며 당신의 조각은 어김없이 녹아 흘렀다 눈이 내렸다 매일 높고 따뜻한 새가 날아와 당신을 지웠다 흰 눈이 내리면 내 몸에서 쏟아지는 울음을 꾹꾹 눌러 심장 속에 감췄다 심장을 찢어야 울음을 꺼낼 수 있는 한여름, 흰 눈은 그치지 않고 자꾸 당신을 지웠다
월간 「현대시」2020년 5월호
鵲巢感想文
흰 눈은 맑고 순수함을 대변한다. 나의 울음을 받을 수 있는 객체며 앙상한 뼈에 달라붙는 옛날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몸을 형성한다. 체體, 뼈에 풍부하게 붙는 살 그것은 초록으로 빛날 것이며 지나가는 객들에게 쉬어갈 수 있는 높은 그늘을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흰 눈은 바탕이다. 그 위에 당신을 조각하는 바람은 꽃피는 사월이거나 꽃 지는 구월이겠다. 사와 구의 표현과 달 월月이라는 이상향, 이렇게 보고 있는 것만도 악보며 의지겠다. 흰 눈을 밟는다. 제발 그만, 그만 밟으란 말이야! 그러나 계속 걷는 눈은 내리고 잠시 머물며 과일過日을 생각한다. 회오리치는 대낮이었고 그것이 폭풍이었다면 번개처럼 칼날로 온몸을 들쑤시며 맞아야 하는 그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곧게 받아들이고 피를 흘리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일 것이다. 세상 밀려오는 파도에 울렁거림이 없는 리듬과 전율을 거기서 좀 더 나간다면 삶의 조각은 그렇게 단조롭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시 밤은 오고 흰 눈은 여기 곱게 내려앉아 나를 돕는다. 하루가 길었다고 그 하루가 거칠고 힘들었다며 사포처럼 마지막을 어우르고 있다. 능수능간能手能幹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든 잘 해치우는 재주와 익숙한 솜씨다. 마음을 彫刻하는 일, 두루 주周와 돼지 해亥에 터럭 삼彡과 칼 도刂가 있다. 털끝 하나에도 의미가 있고 거기에 칼을 대하는 것은 생명선에 닿는 살붙이 하나라도 정교함이 있어야 하는 것을 저 흰 눈을 밟은 이가 간다. 오늘도 당신을 지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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