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았거나 혹은 놓쳤거나 /정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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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 김포신문 230915)
놓았거나 혹은 놓쳤거나 /정재희
270사이즈 신발 한 켤레를 현관에 두었어요
그의 부재가 결핍은 아니지만
그냥 남자 신발 한 켤레쯤은 필요하네요
늦은 밤 허공에 고백하건대
내가 편안하지 않길 바라요
너무 느긋했거나 너무 순해서
갑자기 그리고 처음으로 놓쳐버린 것들
내가 다 감당할게요
이제 촉각을 돋우지 않으면
주체적이지 못하겠죠
장미와 프리지어가 다르듯
이혼과 이별은
별개의 태도와 자세
한낮의 햇살이
미세먼지의 스펙트럼 같아도
모두 받아들일래요
더러운 것도 아름다웠는데
이젠 아름다운 것도 불결해요
내 몸에 닿지 않게 피해야 해요
오늘은 손잡이를 스무 번도 넘게 닦았는걸요
손등이 짓무르도록 씻었어요
쉿, 비밀이에요
제 뇌리엔 수많은 예민선線이 매설되어 있어요
아무도 모를 노선을 따라
말풍선이 달아나는 꿈도 꾸어요
아슬아슬 멀어져가는
놓쳤거나 혹은 놓아버린
당신과 나만이 아는 순간들
(시감상)
살다 보면 모종의 이유로 이별하게 될 때가 있다. 놓았거나 놓쳤거나는 능동과 수동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우린 서로 놓았다고 혹은 놓쳤다는 착각 하며 산다. 입장의 차이가 아닌, 자기 합리화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서로 놓았다고 해도, 놓쳤다고 해도 후회만 남는다, 그의 부재가 결핍은 아니지만 이라는 말속에 결핍이라는 고백이 들어있다. 어쩌면 서로 결핍에 겨워 살고 있는지 모른다. 당신과 나만이 아는 순간들은 당신과 나의 결핍이라는 환경 속에 먼지처럼 사라지지 않고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정재희 프로필)
서울, 열린시학 등단, 2023 국민일보 신춘문예 대상
정재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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