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폭력 =조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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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폭력
=조혜은
당신은 왜 그다지도 쓸모없이 다정해지려고 하지? 오늘이 지나면 나는 나를 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텐데, 머리카락이 자랄 때마다 머리가 자라나는 상상을 합니다. 미용실에 가야 할까. 무거워진 어제의 목을 다듬어 낸 오후, 어쩌면 갓 뜯어낸 채소처럼 싱싱한 하루. 싱거운 점심을 먹고 저녁을 기록합니다. 그렇게 하나씩. 오늘의 나는 없어져 갑니다. 배달된 상품처럼 진열을 기다리는 동안, 장소가 사라지고. 공간을 초월해 또 다른 시간이 겹쳐지는 것을 쉽게 망각하고, 언덕을 오르며 발목에 돋아난 생채기를 잊고 아픔의 원흉을 모르고 숨을 고르고 높이 솟은 구두의 무게를 모르고 나를 누르고, 나누고, 나르고, 다시 평지에 오르는 동안, 한동안 우리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오늘의 머리가 자랄 때마다 머리 위로 또 다른 머리가 자라나는 상상을 합니다. 어디를 가야 나를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 당신이 부러뜨린 나의 목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식물은 아니어서 슬펐습니다. 우리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당신의 손 안에서 환하게 서로를 보며 웃고 있는 나의 성실하고 서로 다른 머리 다발들. 그날 고백하는 당신의 심장은. 폭력을 기록합니다. 나는 상실되었습니다.
민음의 시 300 조혜은 시집 눈 내리는 체육관 127p
얼띤感想文
너무 찾지 않으면 눈도 잃어 가나 보다. 한동안 보지 않고 딴 세상을 그린 적 있다. 세월은 노안이라고 하지만 낭만은 피안이라고 했다. 나이 오 십에 쇼스타코비치를 좋아하고 춤은 무대의 뒤편에 고스란히 앉혀 두었다. 점점 술은 싫었지만 오래 묵은 나비가 줄곧 나를 찾곤 했다. 짚신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아 늘 맨발로 걸었지만 활발한 쪽은 바닥에 걸려 누운 모서리였다. 간혹 서쪽에서 부는 비유가 서늘할 때면 연장을 챙겨 들고 산으로 간다. 그러고 보니까 악다구니로 퍼붓던 차라투스트라는 지금 밥 먹고 있는 이가 초인이라는데 에궁 딴소리 좀 그만하쇼, 하품하려다 다리를 고쳐 잡고 정중히 앉는다. 이 두 개 빠져 보이는 마당의 단풍에 왠지 정이 가고 덩달아 이 드러내며 징글맞게 웃어 보인다. 그러면 뭐가 잘못됐는지 침까지 오르고 숨긴 거 하나 없는데 자꾸 벗기려 애쓰는 손길에 아예 입고 있던 끄나풀까지 마저 풀어 덜렁거린다. 손길은 그리 부드럽지가 않고 남자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며 과일이 묻은 칼끝을 혀로 핥았다. 베어지는 일에 대해서 아픔보다는 희열이 오고 참지 못한 마침표에 섬세함까지 가미해서 키운 꽃잎이 있다면 나비처럼 유희와 단련의 두 어깨에 앉아 천근만근 무게는 덜어 지웠을 것이다. =숭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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