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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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이영광
가나안 교회를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녀는
물었고, 길이 복잡하니 따라오라고 나는 말했다.
마음에 든다는 듯 그녀는 웃었다. 꽃무늬 재킷 전체가 웃었다.
서른이 안돼 보이는 여자가 마흔이 넘은 나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듯
내 생애의 어떤 여자보다도 더 기쁘게 따라왔다.
벚꽃이 지고 있었다. 언덕 밑 자드락길 파밭 지나
골목에 접어들어서도 나는 몰랐다. 놀랐다.
가나안 교회를 얼마나 가야 하니, 반말로 그녀가 다시
물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별안간
블라우스 앞섶을 홱 열어젖히고 맴가슴을 꺼낸 채로
달려들어서, 내 목을 끌어안고 매달려서가
아니었다. 문득 여자의 등 뒤에서 여자를 꼭 닮은
늙은 얼굴이 나타나 깔깔대는 알몸을 철썩철썩
때려가며 옷을 입히고, 사과도 없이 허둥지둥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아, 나는 정신없는 몸 앞에서
정신없이 옷깃을 여미는 인간이구나. 나도 몸이었구나.
하지만,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니. 어떻게 견디지
않을 수 있었니. 벗은 몸이라도 통닭처럼 내던져야 했던
참혹이 있었던가, 다 벗어던지고라도 따라가야 했던
순간이 누구에게는 없었을 것인가, 살 떨리는 그곳이 비록
독과 피가 흐르는 저주의 땅이라 해도.
창비시선 366 이영광 시집 나무는 간다 54-55p
얼띤 드립 한 잔
가나안은 하나의 이상향이다. 가나안을 가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통닭처럼 내던져야 했던가. 문제는 아직도 던지고 있다는 사실, 다 벗어던졌다고 착각하지 마라, 남은 일 푼이라도 있다면 씨앗은 살아 있으니까, 통닭에다가 비유를 둔 것에 참 재밌게 읽었다. 털은 하나도 없고 내장까지 쏙 뺀 것 아니냐, 거기다가 토막까지 낸 것 없이 온전한 몸뚱어리 그 자체다. 그렇게 벗어던지며 바라보고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여전히 흐릿한 꽃무늬 재킷에 마음은 갈리고 길은 복잡하다. 그러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은 딱딱한 직선이 아니라 유연한 곡선이다. 직선은 평행한 두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이에 비해 곡선은 우아하고 온건해서 새처럼 날 수 있다. 함께 거니는 것이다. 그렇게만 갈 수 있다면 그녀처럼 블라우스 앞섶을 홱 열어젖히다마다 뿐일까, 그 못난 아랫도리까지 탁 끊어버리고 기어이 오름세를 탔을 것이다. 이제는 그럴 때도 되었다. 하지만, 시간은 영영 가재 편이다. 여전히 꾹 닫은 몸뚱어리는 철썩철썩 때리는 파도에 안주하며 지켜 바라볼 뿐 나풀거리는 옷깃에 손짓을 보내며 그래 맞아 저거였어, 너는 그렇게 날아갔다. 늘 그랬다. 원체 두들겨 맞다 보면 아주 조그마한 꽃비에도 나가떨어지느니 좀생이 따로 있을까 보다.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내 생애를 걸고 과연 갈 수 있을까 죽어서 가는 그런 흔한 일 말고 살아 한 번쯤 가 있는 일도 생겨 나를 믿고 따르는 이 있어 언덕을 딛고 자드락 길 젖히며 파밭까지 지나 조목조목 안내하는 날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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