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고추밭/김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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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250301』
할아버지와 고추밭/김부회
모깃불 마당에 콩 튀기는 밤
신작로 멀리 구슬픈 승냥이 울음소리
구부정 할아버지 연초 연기
우물가 앵두나무에 열린 부연 옛날이야기
툴툴, 늦잠쟁이 손주
창호지 작은 유리로 슬그머니 들어온
햇살의 손이 잠 깨우는 새벽
콩깍지 여물 익어가는 냄새
찌그러진 양은 막걸리 주전자 덜컹
등지게 뒤로
개구리 풀쩍거리는 들길 너머
이슬이 너름새를 추는
꽈리고추밭
길가 토마토 한 알
개울물에 썩썩 씻어 한 입 베어 물다
고춧대를 부러뜨리며
데굴데굴 구르던 밭두둑 지나 들려오는
깊은 저음의 호통
거침없는 달음박질에
중년을 친친 감아 오르는 참외 넝쿨
아이 한둘은 삼켰다는
입 벌린 저수지 속으로
꼬리 달린 유성이 첨벙 자맥질하는
내 기억보다 오래된, 잃어버린 검정 고무신 속
이~노~옴!
할아버지 칼칼한 목소리
(시감상)
그런 날이 있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런 그리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 구차한 셈법이 없던 나라. 수박 서리 한 것보다 밟아 깨뜨린 것이 열배쯤 많아도 싹싹 빌면 웃고 말던 아저씨. 할아버지는 모르는 것이 없는 위대한 박사였다. 학위 없는. 어느 날 상영하던 영화관 필름이 뚝 끊어졌다. 그리고 영영 우리와 우리는 이별했다. 양자 컴퓨터로도 풀 수 없는 어린 날의 셈법은 지극히 단순하지만 많이 아픈 셈법이다.
(김부회프로필)
계간 문예바다 주간, 시인, 평론가, 시집 (시, 답지 않은 소리)(러시안 룰넷)평론집(시는 물이다) 외 20여 권 출간
김부회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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