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행성의 위치 =진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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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행성의 위치
=진수미
하얗게 바람이 숲에서 흘러나왔다.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올린 후 허공을 동그랗게 말며 사라져갔다. 숲의 입구 18km 지점을 통과하면서 댄이 외쳤다. 이봐 스즈키, 이곳은 움직이는 가구들로 가득하군. 바람을 따라 잎사귀들이 한 방향으로 스스스 쏠리고 있었다. 앞서가던 스즈키가 고글을 고쳐 쓰며 말했다. 댄, 이것들은 가구라 부르지 않아, 그건 옳지 않지. 누가 그래? 댄이 마른 나뭇가지를 밟았다. 단호한 부서짐. 목소리. 댄의 그것도 바스러지는 듯했다. 누구라니? 스즈키가 소리를 좇아 돌아보았다. 댄이 지워지고 있었다. 흐릿해진 형상을 숲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스즈키는 고글을 정수리 위로 올렸다. 미간을 좁히며 사라지는 친구의 조각조각을 응시했다. 이것을 가구라 부르지 않는 존재, 그들은 살아 있나? 댄이 부재한 자리를 회갈색 가지와 몸체가 얼룩덜룩 채우다가 떡갈나무 한 그루가 선명하게 보일 때까지 스즈키는 꼼짝하지 않았다. 옹이에서 목질로 된 노란색 뻐꾸기가 튀어나와 뻐꾹, 하고 울었다. 12시군, 스즈키가 고글을 내리며 돌아섰다
거기, 12시의 당신, 살아는 있나?
댄의 목소리였다
스즈키가 숨죽여 웃었다. 나무들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방향으로 흔들렸다
되돌아오고 있었다
문학동네시인선 226 진수미 시집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 056-057p
미친 듯 덜 미친 듯
행성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돌고 돌다가 먼지와 같은 입자들의 난립 속에서 얼굴을 만드는 일 그러나 결국 행성에 불과하다. 타이탄은 토성의 행성이다. 대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지구와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그것이 생물에 유용한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질소로 꽉 덮여 있다는 사실일 뿐 하지만 타이탄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우리는 매번 이름 하나 없이 허공을 동그랗게 말며 얼굴을 그리다가 만다. 숲의 입구 18km 지점에서 말이다. 오른쪽에서 닿지도 않는 왼쪽을 바라보며 아무런 가치도 없는 죽음을 그리고 있다. 살아 있으니까 고글이란 색안경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입이 참 더럽다. 먹고사는 게 또 비우는 게 바르지 못하니까 어쩌면 왼쪽도 그러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 왼쪽을 더욱 그리는 건 아닐까 12시가 다 되도록 가구가 가구가 아니라고 구태여 명명하듯이 소리 없이 내지른 위안 같지도 않은 위안으로 말이다. 댄은 고정적이며 불변이다. 그는 부재한 것 같아도 늘 존재감을 더러 내고 있다. 댄을 대하는 또 하나의 마음, 스즈키 스즈키만 생각하면 지난밤 마셨던 맥주 한 잔이 그 순간 큰 위안이었을지는 모르지만, 현실은 더욱 조이는 마음에 머리만 아프다. 정말 죽어야 끝나는 일일까! 나도 모르게 뻐꾹뻐꾹 딸꾹질해 본다. 새가 두꺼운 대기층을 열어젖히며 빼꼼히 쳐다본다. 뭔가 묵직한 것만 보이는 것 같아서 그만 다시 쏙 들어간다. 시찌구리한 세계에 다시 더러 눕고 만다. 역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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