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이신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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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260105」
염소/이신율리
봄이 오면 아버지는 염소 새끼를 끌고 왔지 팔랑거리는 내 다리를 묶었어 냉이꽃 들판을 휘돌아 쳐도 심통은 풀리지 않았지 염소는 뒤꼍에 꽁꽁 묶어놓고 닭장 속에 갇힌 거위 등에 올라타 마징가 제트처럼 날고 싶었지 뿔 자리가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애송이가 꼴에 대가리를 번쩍 쳐들어 내 봄을 파먹었어 딱 한 번이라도 배떼기를 걷어차 풀밭에 쫙 뻗었어야 했는데 그때 내 눈엔 네가 아버지로 보였어 수업료 안 냈다고 벌서던 일이 자꾸만 떠올랐거든
*
하얀 꽃은 모두 구겨 삼키고 싶다 구름 아래서 냉이꽃을 꺾는다 최신 가요에 맞춰 춤을 추면 봄비가 내릴 거라고 점점 하늘이 내려오고 뿔이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지겹다고 화성으로 날라버린 그를 찾으러 갔다 그는 쭉 빠진 알파고 옆에 끼고 앉아 화산에서 감자를 굽고 있었다 나는 순하게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지하철 2호선 티켓을 보여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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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 높은 발이 냉이꽃은 밟지 않았다 풀밭에 누워 우리 화성의 기운이 넘치는 염소자리나 찾아볼까 아니면, 뿔과 혼선된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며 매리너스 협곡에 투망을 던질까
2025 시집 (호수 빼기 참새 14쪽)
(시감상)
전위와 카타르시스가 결합할 때 좋은 시가 나오는 것 같다. 염소에서 파생된 생각의 파장은 아버지를 거쳐 화산을 지나 지하철을 타고 화성의 매리너스 협곡까지 줄기를 뻗어나간다. 현대시는 과거의 서정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거나 풍부한 질감의 언어를 사용해 현대를 과거로 되새김질하는 역할을 한다. 염소자리는 현실적이고 책임감이 강한 흙의 별자리다. 염소자리의 시작은 동지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 봄이 곧 올 것이라는 의미를, 그래서 냉이꽃을 기다리는 의미를, 이 겨울의 중간지점에서 에둘러 말하고 있다. 염소의 뿔과 혼선된 리모컨의 대비가 강렬하다. 1월의 첫 주. 냉이가 필 것이며 아버지가 돌아오실 것이다. 매년 그랬듯. 꿈을 피우는 독자님들이 많아질 것이다. 붉은 말의 안장을 올린다. 말, 달리자.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이신율리프로필)
세계일보 신춘문예, 오장환 신인문학상, 2025 시집 (호수 빼기 참새)

이신율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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