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스토리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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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809회 작성일 18-01-25 09:26본문
스토리문학상 수상작 / 양현주
◯의 분홍
양현주
바람은 난해한 질문을 던지기 일쑤
가렵다
꽃가루 알레르기 같은
저기, 빛과 늪이 공존하는 아프리카 숲
어둠이 몸속에 박혀있는 기억을 뽑아낸 후 뾰족한
별 화살을 산란했다
한 바퀴 몰아친 ○의 회오리바람
절정에 든 야자나무는
탐스런 대낮에 그늘을 늘어뜨리고
꽃잎 소복한 저녁을 맞는다
사바나의 멋을 아는 코코넛에 심취했다면 그것은
온전히 야자나무 덕분이다
원숭이든 고릴라든
야― 자아 자,
한번 오르면 쉽게 내려설 수 없는
나무의 기름진 등을
사랑하게 된다
이때, 모서리 없는 ○의 달그림자는 원의 숲 그늘마다
얼굴 빼꼼 내민다
위험천만 짐승들의 속내는
알 수가 없고
한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생각만 데굴데굴 구르다 멈추는 동그란 구멍 속에
완성되는 로맨스
덜 채워진 초승달의 틈새로
무한대 ∞가 일정 없는 시간을 풀고 개구멍을 빠져나온
노란 달이 웅크려 달, 달달
길을 밝힌다
○의 도발처럼
홀로코스트
안개가 철조망에 툭, 걸려있어요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갇힌 머리꼭지를 따며 불볕을 훔치는 손아귀가 서늘해요 한 줄로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풀 죽은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요 한여름 피땀을 뒤집어쓴 엄마 이마를 쓱 만져주고 싶어요 수용소 밖으로 삐져나온 목쉰 소리가 아우성쳐요 안개를 먹어 웃자란 꿈, 머리채가 뽑혀요 뜨거운 빛깔로 키를 늘이는 시간, 운동장을 나란히 걸으며 그들은 천천히 죽는 공부를 해요 안녕, 학교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요 군인은 빗소리같이 털털한 친구들을 몰고 막사에 검은 구름을 초대했어요 곧 시뮬레이션 게임의 시간이에요 우리는 욕실에서 샤워하듯 청춘을 벗어요 푸른 옷을 벗자 붉게 더 붉게 느린 걸음으로 저린 시간들이 쏟아져요 소싯적 친구들이 지워지고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있는 건조기가 우리들의 지혜를 쪼글쪼글 말려요
난 정말 죽은 걸까요
화장실에 숨어 변기시트가 엉덩이를 다 파먹도록 탈무드를 읽어요 왈칵, 변기물이 넘쳐요 내 몸의 물을 빼앗긴 나는 미치도록 허기져요 부스러진 나치의 문양 같은 검붉은 쇳가루가 수북이 쌓여요
나는 종종 인연을 연인으로 읽는다
인연에도 격이 있다
분위기를 골라서 쓰는 모자와는 다른
첫말이 끝말에 닿기도 전에
안녕,
이라는 말 한 마디
디딤돌을 놓지 못한 가벼운 인연은
손보다 먼저 눈이 스캔한다
출근길, 눈에 잠을 매단 발바닥은
딱딱한 길의 습관
책갈피에 접힌 유통기한 지난 후회
감정의 서류뭉치들이
캐비닛에 처박힌 먼지처럼
무겁다
*
등걸에 앉아 별 떨기를 딸까
북쪽 벌판을 걷던 사자좌의 별들이 고요를 치켜들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별의 뼈를 핥아 먹은 연인이 달빛 아래
나무를 키운다
달의 헛기침은
어느 들판에서 두 번째 애인을 맞을까?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은 별의 이름들
옹골지게 정情을 놓지 않은 탓에 달을 껴안고
열꽃이 핀다
나는 종종 인연을 연인으로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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