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현대시학상 수상작 / 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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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00회 작성일 21-11-22 19:43본문
[2021년 현대시학상 수상작]
우울할 땐 코인빨래방으로 가요 외 4편
박서영
조심히 다루어주세요
이제 막 태어난 신상이에요
왼쪽 옆구리를 뒤집으면 취급주의 라벨이 붙어있어요
햇살70% 분홍리본22% 주금깨8%
고온금지 비틀기금지 좌절금지
아르바이트는 두 개를 해야 해요
아르바이트 천국인 나라 거주민이거든요
잠이 부족해요
빨래는 쌓여가고 다크서클이 눈가를 검게 덮어요
하얀 셔츠는 까만색과 가까운 목은 자주 어두워지고
허리는 자주 고장이 나요
우울할 땐 코인빨래방으로 가요
쌓인 걱정을 모아 집을 나와요
커다란 곰 인형 노란이불이 따라와요
세탁 바구니를 뒤지면 나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시간을 믿어도 될까요
취업은 언제일까요
원하는 코스를 골라주세요
사용은 어렵고 시집이 멀다면 애인을 구하세요
애인의 가슴에 몸을 열고 버튼을 누르세요
애인이 돌아갈수록 하얀 꿈은 부풀고
밤은 가까워져요
코인 수만큼 여러 애인을 가질까요
빨래방은 24시니까요
다섯 방
어디에
거울이 깨어진다
내 머리 어디에 둔 걸까?
배캠을 들으며 퇴근한다
노을 속으로 길을 잃어버리기 좋은 시간
여긴 어디지
어디가 출구일까
지하철은 왜 은하철도를 꿈꿀까
탁발
환한 봄날 마을로 내려간다
만발한 꽃발에 놀다가 탁발바가지를 잃어버린다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빙글빙글 돌아가는 수화를 벨트 위
캐리어는 도착하지 않는다
길은 길을 잃는다
플라밍고 노을이 타오르는 라 콘차 해변
바다는 밤보다 어둡다
구두를 벗고 맨발이 되어가는 바다
바다가 바다를 찾고 있다
백야
밤이 밤을 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휘파람을 불면 립스틱은 짙어지고
빨강 구두는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자신을 살해한다
오후의 화병
수국은 변덕이 심하지요
아침엔 보라였다가 밤에는 파래져
고양이 울음소리 들려요
고양이를 화병에 꽂아요
울음을 꽂으면
가을장마가 시작되어요
엄마는 화병에서 시들어 가요
물을 갈아도
엄마의 얼굴은 피어나지 않아요
아빠는 집에 언제 올까요
아빠를 잘라 식탁에 올려놔야 하는데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누구도 보이지 않아요
햇볕이 빈방을 비추어요
잘린 목들이 화병에서 반짝여요
Never, Never, Land
까만 밤은 춥고 창문은 무서워요
엄마 없는 우리는 곰인형을 안고 산책을 가요
요정의 손톱이 창문을 두드려요
팅커벨이 밤하늘에 마법의 가루를 뿌려 놓아요
피터펜의 손을 잡고 네버랜드로 날아가요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우린 자라지 않을 거예요
네버
네버
미혼모의 성곽은 높고 위험해요
아빠 없는 아이들이 버려지고 있어요
전쟁이 필요해요
네버랜드를 열자
완다 블랙켓 가모라 그루트 마블 히어로가 등장해요
멀리서 나팔 소리 들려오고
쇠갈고리 반짝이는 후크 선장이 나타나요
절정은 자정이에요
자정에는 모두를 용서해요
째깍째깍 시계를 삼킨 악어가 잠들고
우리는 침대에 누워요
밤은 어둡고 내일도 창문을 열어둘게요
고양이와 정글짐
메타세콰이어는 꽃이 없지 꽃 없는 바람이 건반을 두드린다 악보를 넘기며 날아오르는 새들 새들의 머리카락과 먹구름이 몰려오는 공원, 놀이터에 빗방울은 번지고
고양이는 정글짐에 갇혔지 파란 눈빛의 러시안블루 머리를 숙이고 다리를 구부리고 정글짐 안으로 네모난 하늘이 울면서 따라오지
미로가 쌓여 가는 하늘, 하나씩 상자를 열수록 추워진다 여기는 겨울일까 왜 이렇게 추운 방에 몰래 들어온 걸가 언제부터 고양이가 되어버렸는지 아무리 울어도아무리 뛰어도 출구는 보이지 않지
상자 안에는 고양이가 남고 고양이 안에는 고양이가 울고 우는 고양이 앞에 나는 아이가 된다
어둠이 밀려온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키 큰 나무가 정글짐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다 꼭대기에는 파란 밤하늘이 걸리고 내가 쌓은 천 개의 정글짐에 천 개의 고양이는 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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