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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쪽에서 온 사람/ 권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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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6회 작성일 23-05-04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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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삶의 영역에서 찾아낸 성찰의 크기와 무게


노을 쪽에서 온 사람/ 권상진 두 번째 시집을 읽고

걷는사람 시인선 87/ 2023년 4월 13일 1판 1쇄 펴냄


 



글/ 김부회 시인, 문학 평론가



  권상진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받았다. 가장 먼저 펼친 것은 해설이나 시의 본문이 아닌, 목차였다. 보통 본문이나 해설을 먼저 보는 것이 상례이지만 목차를 먼저 본 것은 권상진 시인이 주목하는 세상에 대한 눈을 보는 것이다. 시인이 세상을 보는 눈은 한 쌍의 눈동자가 아닌 겹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낱눈이 여러 개 모여 벌집 모양으로 생긴 눈을 겹눈이라고 한다. 하나의 현상이나 풍경이 아닌, 하나에서 열을 보는 시인의 눈을 본 것이다. 언어의 조탁은 나중 문제일 것이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무엇을 어떤 눈으로 보는가 하는 것이다. 눈의 온도가 따뜻해야 세상이 따뜻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차가운 눈은 차가운 것에 익숙하기 마련이며 더 차가워지는 것이 눈이다. 때론 시를 쓰는 목적이 본말 전도(本末顚倒)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시를 쓰는 이유는 명징해야 한다.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거나 자신의 삶을 미화하거나 포장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시가 아닌 광고성 멘트에 불과할 것이다. 시를 끊임없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아와의 대립이며 올바른 자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언술을 바탕으로 고백이나 참회를 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면서도 타인의 눈을 의식하게 마련이다. 타인을 의식하는 순간 시는 이미 본질에서 벗어나 시적 문장이 되고 마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율격과 품격이 있는 문학 장르에서 일관성 없는 변명만 늘어놓는 것은 자신에 대한 당위성에만 연연하는 것이며 독자 이전에 자신에 대한 모독일 수 있을 것이다. 권상진 시인의 시집에 대해 요약하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 냄새” 진득하게 묻어나는 사람 냄새가 배어있는 시집이 (노을 쪽에서 온 사람)이라는 시집이다. 목차 중 일부를 소개하면 /접는 다는 것/ 실직/ 흠이라는 집/ 가족이라서 그렇습니다/ 주름 한 권/ 당신의 바깥/견딜 만한 일/ 달방/ 빈방이라는 악몽/애도/ 등등의 작품 제목들이다. 우리의 일상이다. 일상 외의 것이 아닌, 일상 내의 것에서 일상을 시화한 것이 권상진의 매력이다. 삶의 범주는 의외로 넓고 깊다. 천체, 물리, 우주, 대륙, 신화, 창조, 등등의 외연에서 나와 너, 가족, 우리들이라는 내연까지 다양한 포커스를 갖고 있다. 시인 권상진이 추구하는 세상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과 주변과 있을법한 이야기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개척한 신대륙이다. 그러면서도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다 듣고 나면 그 이야기의 무게에 공감하게 된다. 울림에 감동하게 된다. 시적 질감이라는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다. 질감 이전에 이미 그가 완성한 글의 필체는 궁서체이다. 한 글자 한 글자 온기와 삶을 담아 정성스럽게 쓰는 반듯한 서간문이다. 독자에게 보내는 곡진한 시인의 편지에 귀 기울이다 보면 권상진 시인이 가진 성찰의 크기와 무게에 공감하게 된다. 몇 편의 작품을 소개해 본다.   

 접는다는 것


권상진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진실들이
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변용
(권상진 시집 노을 쪽에서 온 사람 16쪽)

책을 읽으며 중간중간 읽은 부분을 접게 마련이다. 물론 책장이 접히지 않도록 무언가를 붙이는 사람도 많지만, 대개 귀퉁이 한 부분을 접게 마련이다. 시인은 그 접는 행위에서 성찰을 하였다. 접힌 부분을 경계하고 생각했다. 그 경계는 너와 나, 우리 사이의 연속성에서 잠시 쉬어가는 부분이기도 하고, 삶이라는 정해진 종말을 향해 가는 우리 인생의 어느 부분과 부분의 경계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경계가 경계에서 끝난다면 경계는 경계 자체로의 기능만 존재할 뿐 미래지향적 가치를 잃게 된다. 골이 생기고, 감정의 계면에 선을 긋고, 다만 그것에서 종료된다면 접힌 부분의 의미는 단절로 귀속되는 다만 그것뿐이다. 시인의 아포리즘은 3연에 부각된다. 경계를 그은 것에 대한 반어적인 의미, 경계는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경계 이후를 생각하라는 선험적 교훈이다. 앞 장과 뒷장이 같이 포개지라는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해와 간구를 요구하는 것이며 다음 장을 위한 [쉼]이라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4연에서는 3연의 주장을 합리적인 관점에서 부연해 설명해 주고 있다. 모든 경계의 선을 긋는 행위는 어쩌면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자기반성에 그 요체가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내 몫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내 몫이라는 말속엔 중심이동이 나로부터라는 말이 내재하여 있으며 반성이 더해져 있다. 내 몫이 아닌 네 몫에서 원인을 찾을 때 모든 문제는 더 커지며 더 많은 문제를 반드시 만들게 되어있다. 너와 나라는 말은 우리라는 말과 같다. 우리라는 말은 좀 더 포괄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말한다. 삶이라는 말이다. 변명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명 속에서 반성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다.

『김부회 평론집 아포리즘이 더 필요한 시대』일부 인용

흠이라는 집

권상진 

상처라는 말보다는
흠집이란 말이 더 아늑하다

마음에, 누가 허락도 없이
집 한 채 지어 놓고 간 날은
종일 그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홀로 아득해진다 

몇 날 며칠
부수고 허물어낸 빈터에

몇 번이고 나는,
나를 고쳐 짓는다

*시집 (노을 쪽에서 온 사람 36쪽) 

흠집의 사전적 정의는 물체가 깨지거나 찢어진 자리를 말한다. 흠집을 (집)으로 보는 시인의 시각이 예리하다. 내 시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흠집이라는 집 한 채, 어쩌면 그 흠집은 상처라기보다 반성의 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함석헌 시인의 골방처럼 그 흠집에 조용하게 앉아 몇 번이고 나를 고쳐 지을 수 있는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골방과 같은 흠집, 부끄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미련도, 기대도 없는 집. 홀연히 내가 나를 불러내 조곤조곤 이야기 나눌 곳에 흠집 투성이의 내가 매일 보수를 하고 있다. 일평생 보수하더라도 흠집은 여전히 흠집이다. 그래서 사람 냄새나는 집이다. 흠이라는 집은.


『김포신문 2023.04.28. 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전문 인용

성윤석 시인의 시집 추천사와 정훈 시인의 서평 일부를 소개하며 서평을 맺는다.

권상진의 시에는 문장으로 대상을 선명하게 파악하려는 시선이 있다. 그 시선은 인간의 삶에 대한 사유와 결부되어 있어, 언제나 신선한 인식을 선보인다. 이 시집을 다 읽고 덮으면, 역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감성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장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나는 조목조목 아프다”(「고수」)라는 표현처럼 그는 타인을 경이롭게 보려는 시선을 매 편마다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문장을 발명하는 것, 또 그 문장을 확장하는 시도가 시라는 걸 그는 숨기지 않는다. 시와 시인이 일치하는 지점을 그는 갖고 있는데, 사람과 시가 이리 동일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겸손하지만 예리하고 비범한 사람이고 게다가 유머까지 지닌 시인이다. 그의 시도 마찬가지. “그는 술만 마시면 시를 뱉는다” “술값은 내가 냈으니 표절은 아니다”(「술값은 내가 냈으니」)라고 하듯 그는 일상에서 사람에게서 문장을 얻는다. 사실 문장을 얻으러 골목으로 시장으로 바다로 산속으로 들어가는 자가 시인 아닌가. 그곳들에는 언제나 장소성이 있고 삶이 있으니, 마땅히 잘 표현된 시가 시인에게 포착될 수밖에. 문장으로 세상을 샅샅이 들춰 보고 그곳의 시적 인식과 사람의 태도를 찍어 올리는 데 고수인 이 시인의 시집을 읽어 보라. “걸어 들어간 사람들마다/눈사람이 되어 나왔지/더러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조차도”(「눈사람」)라는 대목처럼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면서 대상과 나, 대상과 세상, 대상과 타인을 대할 때 어떤 인간의 태도가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윤석 시인)

한 사람의 생애가 완성되는 날은 바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그 검은 사신이 자신의 손목을 쥐는 때 그는 비로소 세상에 ‘펼쳐지면서 밝혀진다.’ “서가 귀퉁이에 가지런히 꽂”히듯 우리 삶도 필요할 때 꺼내 읽을 수 있는 ‘장르별’ 목록에 안착하는 것이다. 시인은 죽음을 말하면서 삶의 방법론을 되새긴다. 하지만 삶의 방법이나 태도보다도 더욱 근원적인 영역을 눈여겨보고 싶어 한다. 권상진 시인의 시도 그렇다. 그의 시는 사람과 말의 표면에서 어른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사태들의 문을 열고 기꺼이 바라다보고자 한다. 이 행위는 윤리나 이념의 자장磁場 밖에서 이루어지는 순정한 실천이다. 차라리 생명의 가장자리에서 복판으로 뛰어들려는 장엄한 의식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의식은 딱딱하거나 형식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내향적이다. 안으로 제 몸과 마음을 접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향해 섬세하게 기울어지려는 방식이다. 느닷없이 눈을 부시게 하는 형광등이 아니라 구석진 자리 은은하게 덥히는 백열등의 누런빛처럼 천천히 스며들고자 한다. 모든 세상이 뉘엿 넘어질 때를 기다려 대낮에 활보했던 말들의 이삭을 줍는 자, 저녁 모서리에 걸터앉아 눈동자를 조금씩 적시는 저 청록의 하늘을 두 팔로 끌어안으며 기도하는 자, 고난과 절망과 상처투성이들이 울렁거리며 물결처럼 지날 때면 문득 자신의 마음을 온통 내맡겨 버려 적시게 하고 싶은 자이다. 그런 시인의 시를 읽었다. 『(정훈/문학평론가/ 권상진 서평』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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