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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연애하는 법 17 -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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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267회 작성일 15-10-29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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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시 한 편에 이야기 하나를 앉혀라



비탈진 달동네 개똥이네 집 지붕이 비만 오면 샌다거나 공장에 나가는 순이의 얼굴이 핼쑥하다는 이야기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1970년대가 그랬다. 표현의 자유란 애초에 없었으므로 눈앞에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에 대해서도 침묵할 것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그때 신경림의 <농무>가 솟아나왔다. <농무>라는 한 권의 얇은 시집이 조근조근 따지듯이 되새겨낸 세계는 현실의 사실적 묘사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사건이 될 만했다. 얻어 쓴 조합 빚과 술집 색시의 분 냄새와 담뱃진내 나는 화투판이 소외의 장막을 활짝 걷어 젖히고 신선한 시어가 되어 한국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는 화두를 접한 ‘못난 놈’들이 비로소 소주잔을 들이키며 당당히 어깨를 흔들 수 있게 되었다.


〈침묵 강요하는 참담했던 시절〉
〈신경림 ‘농무’ 현실묘사 ‘충격'〉


<농무>가 아직 내 책꽂이에 꽂히기 전, 까까머리 나는 이른바 고등학생 문단을 들락거리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문학 소년이었다. 쥐뿔도 없는 내가 잘난 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시를 척척 써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 기술을 나에게 전수한 것은 요샛말로 모더니즘이었다. 나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치밀하게 언어를 계산하는 데 몰두했다. 삶의 남루와 슬픔을 함부로 까발리지 않아야 한다는 창작의 원칙 같은 것도 나름대로 정해두고 있었다. 나는 그저 향기롭기만 한 시를 쓰고자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겨운 풍경들이 내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전에는 나와 어울려 놀았으나, 내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담겨 있던 풍경들이 생생하게 다시 인화가 되어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시골 큰집>)는 시집 속의 평범한 좌우명 하나가 실제로 시골 큰집 내 사촌형의 책상 앞에 붙어 있을 것만 같았다. 쓸쓸하고 고단한 줄로만 알았던 하찮은 세계가 한 권의 시집 속에 그렇게 눈부신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다니! 게다가 구태여 말을 비비꼬지 않더라도 시가 태어날 수 있으며, 한 토막의 이야기도 서정을 만나면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롭게 배웠다.

서정과 서사의 결합, 즉 시에다 이야기를 담는 우리 시의 전통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에 대하여 김기진은, 이 작품이 “생생한 소설적 사건”과 “현실, 분위기, 감정의 파악이 객관적, 구체적”임을 근거로 ‘단편서사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객관적인 현실을 형상화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 시의 창작방법론으로 이 용어를 제시한 것이다.
이야기가 담긴 서정시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시가 이용악의 <낡은 집>이다. 이 시에서 이용악은 초근목피의 세월이 우리 민족의 생존을 송두리째 뒤흔들던 1930년대의 상황을 어린 화자의 눈을 통해 절실하게 보여주었다. 그 당시 민중들의 생활상을 마치 단편소설처럼 펼쳐 그려낸 것이다. 이 한 편의 시 안에는 오랜 세월 동안 한 가족이 겪어야 했던 슬픈 이야기가 들어앉아 있다. 아이들은 축복도 받지 못하고 태어나 가난하게 살아야 했고, 가장은 가장대로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야반도주를 감행해야 했다. 떠나지도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시에 하나의 사건이나 이야기를 들어앉히는 이 방법은 1970년대 김지하에 의해 ‘담시’라는 형식으로 발전했고, 신경림의 <농무>를 거쳐 1980년대에는 최두석 등이 ‘이야기 시’라는 개념으로 확대해서 정리한 바 있다.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새 우시어
하이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이용악의 <달 있는 제사>는 전체 5행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주 짧은 시다. 언뜻 보면 이 시에는 세부적인 사건도 없고, 특정한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나 배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장중한 서사적 뼈대를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짧은 시에도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어머니의 상실감을 아프게 바라보는 화자가 선명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슬픔은 ‘이슬이 두어 방울’ 속에 집약되어 있다. 이 두어 방울의 이슬은 이슬의 양이나 슬픔의 무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두어 방울은 현실의 슬픔이 감당할 수 없이 벅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반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슬픔을 이겨내려는 안간힘의 표상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용악은 ‘달빛·박꽃·이슬’이라는 전통적인 자연서정에다 당대 민중의 보편적인 삶의 고통을 ‘두어’라는 관형사로 압축하고 싶었으리라.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황인숙의 시 <삶> 전문이다. 단 석 줄로 삶을 간명하게 정리하는 이 시는 자꾸 읽어볼수록 아프다. 문장의 끝에 찍은 물음표와 말줄임표, 그리고 마침표를 유심히 보기 바란다. 첫 행의 물음표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두 번째 행의 말줄임표는 이루어지지 않는 꿈의 좌절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마지막 행의 마침표는 삶의 어찌할 수 없음으로 인한 체념, 혹은 그래도 살아가야 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따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에서 외상값의 의미도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확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부모에 대한 빚,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빚, 이웃에 대한 빚… 그런 외상값 때문에 사는 것, 그게 삶이라는 것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이야기-서정 만나면 ‘시’ 탄생〉
〈감정 구성하고 소재 장악해야〉


이렇듯 아무리 짧은 시라도 한 편의 시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사건의 전개와 인물의 배치에 관심을 두는 서사지향의 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하나의 관념이나 순간적인 이미지의 포착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시가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머릿속에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해 놓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소재에 대한 시인의 장악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사를 쓸 때처럼 시에 도식적인 육하원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의 독자가 바라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머리는 매우 세밀한 육하원칙을 바탕으로 시를 통제해야 한다. 시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감정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구성한다는 것은 드러내고 싶은 감정의 순서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시도 하나의 구조물이라고 하며 시에도 기승전결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시의 기승전결 구조가 겉으로 보이지 않고 시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시인은 머리와 가슴 속에 이야기를 쟁여두고 시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속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야.

-나희덕의 <허공 한줌> 전문


좀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이 시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판타지의 힘을 빌린 아기 엄마 이야기 하나와 그 이야기를 듣고 옮기는, 귀가하는 화자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죽음으로 아기를 살리는 모성도 감동적이지만 삶의 어떤 집착으로부터 풀려나는 한 인간(화자)의 모습이 시를 읽는 독자까지도 시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여 해방시킨다. 시인의 뛰어난 소재 장악력이 감동을 낳았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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