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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시에서 쓰여지는 시로 - 강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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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006회 작성일 15-11-19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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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시에서 쓰여지는 시로

 

 

겁없이 시를 쓰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내 20대 때였다. 정신 없이 쓰고 또 썼다. 그것만이 내 삶의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되어서였다.
30대에 들면서 시 쓰는 일이 그렇게 신바람 나고 즐겁기만 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시를 쓴다는 일이 조금씩 힘에 겨워지고 감각이 둔해지는 것을 점점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꿈속에서도 시를 생각하던 지난 20대의 열정이 이젠 아득한 옛날같이만 생각된다. -- 내 죽은 뒤에도 나는 내 시를 걱정하리라. 그런 치기 만만하던 시절이 새삼 그리워진다.
시대 상황이 내 시에 역설적으로 힘이 돼 준 것은 옛날 시 노트를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악몽 같은 시월 유신(維新). 그 어두운 상황 속에서 나는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절망으로 가는 길만이 터널처럼 뚫린다.
겨울밤을 달리는 버스의 전방
아우성처럼 부딪쳐 오는 눈보라 속을
벌거벗고 뛰어가는 우리들의 마음.
흉칙하고 거대한 손이
이 시대의 하늘에 떠서
주시하고 있다.
벗어날 생각은 말라,
너털웃음을 날리면서 날리면서 떠 있다.
-- '밤 버스를 타고' 전문

누구의 그림인가 기억이 확실하진 않다. 살바도르 달리였던가. 화면의 삼분의 이를 하늘이 차지하고 있는데 음산하고 불길한 구름이 흐른다. 어디선지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붉은 손이 악마의 저주처럼 지상을 장악하고 있는 초현실주의의 그림인데 그것이 이 시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겨울 밤의 눈보라 속을 달리는 버스의 기억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눈은 버스의 헤드라이트 불빛 속으로만 마구 펑펑 퍼붓는 것이었고, 어둠 속엔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 이 시를 썼다. 1974년의 일이다.
불의와 왜곡된 시대 상황은 말하자면 그 무렵 내 시의 어쩔 수 없는 에너지가 되었고, 나는 거기에 어떤 설명을 부연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8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그렇다고 내가 소리 높여 민중시를 쓴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렇게 의식한 적도 없다. 의식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시 스스로의 길을 구속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시가 스스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나는 나의 언어를 조종할 뿐. 그러면서도 나는 비교적 보수적인 태도를 잊지 않고 있었다. 시가 지나치게 신기에 빠지거나 전위를 앞세운 황당한 실험형식의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그것이다.
나의 시가 수많은 독자를 만나 공감을 얻고 오래 읽힌다면 그야 더 말할 수 없는 영광이겠지만, 나는 그런 소망을 가진다는 게 헛된 욕심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그저 시인은 제가 좋아서 천성으로 시를 쓰면 족하다. 사후(死後)의 평가에 기대어 보고자 함도 또한 허욕이다. 사람마다 키가 다르고 얼굴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듯, 시인들의 시 또한 마찬가지다. 잣나무 같은 시, 싸리나무 같은 시, 장미꽃 같은 시, 난초 같은 시...... 내 시가 이름 없는 풀꽃 같은 시라 해도 좋고 그만도 못한 한 포기 잡초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타인의 눈을 따갑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내 재주가 허용하는 시의 길이 그렇게밖에 되지 않음에랴.
시의 길과 삶의 길에 대하여 요즘 많이 생각해 본다. 될 수 있으면 나는 그 두 길이 하나로 일치하기를 바라며 살지만 욕이나 얻어먹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어떤 시인은 간드러진 시로 사람들을 홀리는 기술이 대단하건만 그가 살아가는 삶의 길이 구역질나는 것을 보게 된다. 시인이 너무 많아서일까. 요즘 개방의 물결을 타고 저질의 싸구려 외국 농산물이 곧잘 국산 농산물로 둔갑하는 경우와 어쩌면 그리도 흡사한지. 자기 이익을 취하기 위해 삶의 길조차 손바닥 뒤집듯하는 그런 시인은 아무리 큰 상을 받는다 하더라도 솔직히 시정 잡배에 다름아닐 것이다.
시인은 평범한 인간보다 우위에 있다. 그래야 마땅할 시인이 인간 수준 미만의 삶을 택하고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아무리 당대의 비평가들이 침이 마르도록 그의 시를 칭찬한다 해도 그건 값싼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시는 언어의 기교가 아니다. 명예와 출세를 위해서 언어의 기교를 습득한 경우, 그것은 향기 아닌 악취를 풍긴다.
오늘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1930년대가 아니다. 단지 '시인'이라는 이유로 부도덕과 파렴치가 용인될 수는 없다. 기행과 만용이 시인의 면책 특권 같은 낭만적 기질일 수는 없다. 시인의 길은 보다 준엄한 인간의 길일 것을 요구한다.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나는 남들이 보면 쓸데없는 그런 군말을 덧붙일 때가 종종 있다. "이 사람의 시는 이 사람의 삶 자체와는 다르다." 같은 시의 길을 걷는 후배로서 선배 시인을 폄하하면서도 못내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럴 때마다 만해(萬海)나 육사(陸史)나 석정(夕汀) 시인의 시가 더욱 휘황한 불기둥으로 솟아오름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시를 쓰는 것과 쓰여지는 것 사이의 차이.
오래 전에 나는 시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할 수만 있다면 여러 번 퇴고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경우엔 열 번 이상 옮겨 쓰고 옮겨 쓰면서 완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갈가마귀 북풍 속을
떼지어 날아가는 남행 길
반도의 하반신에
어루만지듯 눈이 내린다.

1975년에 쓴 '남행(南行) 길'이란 제목의 졸시 끝 부분이다. 시 노트에는 마지막 한 행이 더 있었는데 지워져 있다. '눈이 내린다.'의 반복적인 끝맺음. 그런데 나는 억지스런 그 반복을 지워버린 모양이다. 메모된 10년 전의 초고를 고쳐서 다시 쓴 경우도 물론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요즘은 사정이 조금씩 달라졌다. 시가 '쓰여지기'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예전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다. 어쩌면 그만큼 내 시는 메말라 가고 있는 반증이 될 것도 같다.

시월은 안사돈들이 나란히 나와서
혼례의 촛불을 밝히는 달,
우리나리의 단풍은 이 한 달을
북에서 남으로 걸어서 내려오느니
-- '거리에 비를 세워두고' 부분

여기서 단풍이 남하하는 이미지 같은 것이 '쓰는' 경우가 아닌 '쓰여진' 경우에 해당한다. 이제 나는 시가 내 안에서 저절로 익어 우러나기를 기대한다. 잘 쓰여지지 않더라도 천연의 언어가 스스로 발효할 때까지 나는 조급해 하지 않고 기다린다. 그만큼 열정이 식었다고나 해야 할까. 좀 부끄러운 고백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럴 때 시가 언어 이상으로 빛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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