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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속의 궁핍 - 한국 현대시의 현주소 - 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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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292회 작성일 15-11-25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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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속의 궁핍 - 한국 현대시의 현주소
임보 (시인)



한국 현대시의 연원을 신체시로 잡는다면 그 역사는 이제 한 세기에 접어든다. 유구한 역사의 흐름에서 본다면 100년이란 별로 긴 기간은 아니지만 한국 현대시는 그 동안 괄목할 만한 발전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더욱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시는 공전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 수천 개의 문예지들이 앞을 다투어 발간되고, 수만 명을 헤아리는 시인들이 등장하여 매일 수천 편의 작품들을 생산해 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 세계의 어느 곳에도 한국처럼 왕성한 시단을 가진 나라는 없는 것 같다. 한국은 지금 시인 공화국으로 시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기현상은 이처럼 시를 생산하는 시인들은 많은데 시를 읽는 독자들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 들러 시집 코너를 찾은 적이 있다. 수천 평의 광활한 공간인데 시집들을 진열해 놓은 서가는 겨우 둬 평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한쪽 귀퉁이에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시집들이 그렇게 푸대접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찾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왜 독자들이 시를 외면하는 것일까? 이 이유도 자명하다. 시가 재미없고 따분한 글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시가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이라면 사람들은 읽지 말라고 해도 밤을 새워가며 다투어 읽을 것이 아닌가.

도대체 시인들은 북적대는데 시가 외면당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왜 이런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시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있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점들 때문인지 따져보도록 하자.

1. 자유시에 대한 오해


정형시인 경우는 시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이 정해져 있어서 그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시가 되지 못했다. 따라서 시와 시 아닌 글의 한계가 분명했다. 그런데 자유시가 등장하면서 정형시가 지닌 여러 규제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시와 시 아닌 글의 한계가 모호해졌다. 자유시는 정형시와는 달리 정해진 틀에 구속됨이 없이 자유스럽게 쓰는 글이다. 그런데 ‘자유스럽게’에 대한 인식이 ‘제멋대로’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자유시는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것처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더군다나 시는 애매모호한 글이고, 비문장적인 표현도 허용되므로 산문보다 쓰기 쉬운 글이라고 얕잡아보는 것도 같다. 그래서 너도 나도 시인이 되겠다고 시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넘쳐난 것이나 아닌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시를 쉽게 생각하고 달려든 사람들에 의해 쓰인 글이라면 보나마나 조잡할 것이 뻔하다.


자유시가 정말 멋대로 써도 되는 글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정형시의 정해진 틀에 따르지 않을 뿐이지 규제가 없는 글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착각이다. 자유시는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나 이미지를 적절한 운율에 담아 가장 능률적으로 살리기 위해 시어의 선택과 행들을 배열한다. 말하자면 한 편의 자유시를 쓴다는 것은 매 작품마다 그 내용에 가장 적절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 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정형시는 미리 정해진 틀이 있어서 그 틀에 맞게 수동적으로 끼워 넣는 글이지만 자유시는 작자가 작품마다 새로운 틀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는 글이다. 따라서 자유시는 자율과 책임을 요하는 보다 창의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시가 정형시보다 오히려 더 쓰기가 까다롭고 힘든 글이다.

시는 함축과 간결을 지향하는 정제된 고급문학이다. 시는 분량이 짧고 모호성을 지닌 글이니까 부담없이 적당히 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위험천만한 착각이다. 그런데 현 시단에는 이러한 착각 속에서 무책임하게 쓰인 글들이 시라는 이름으로 적잖이 횡행하는 것 같다. 실로 시의 위의를 떨어뜨리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운율에 대한 경시


중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문자로 기록된 모든 글들은 다 운문이었다. 글이란 일상적인 언어와는 달리 율동적인 가락에 실려야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글에게 일상어와는 다른 감동과 운치를 부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것이 실용문에서부터 번거로운 운율 장치가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분량이 긴 산문들에서도 차차 운율이 경시되기에 이른 것이다.

자유시가 등장하면서 시도 운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운율이 시를 구속하는 굴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운율이 시의 구속물이 아니라 시를 능률적으로 지탱케 하는 장치라면 운율의 경시야말로 크게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래가 인간의 정서 함양에 얼마나 소중한가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노래가 우리의 심금을 울린 것은 가사의 내용에 앞서 그 가락 때문이다.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청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가사의 내용에 감동해서라기보다 리듬에 심취해서인 것이다. 리듬 곧 율동적 요소는 정서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만상의 동적 구조는 율동이다. 미미한 생명체의 움직임에서부터 거대한 천체의 운행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율동적이다. 심장의 박동도 그렇고, 호흡의 간격도 그렇고, 보행의 동작도 그렇다. 사계의 흐름, 밤낮의 반복 등 율동 아닌 것이 없다. 수만 년 동안 세계의 율동적 구조에 길들어 살아온 인간은 리듬에 대한 감각이 생득적으로 체질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의 언어라면 운율에 실린 말이 보다 자연스럽고 효율적으로 심금을 파고든다. 우리는 심청전을 읽을 때보다 심청가를 들을 때 더욱 뭉클한 감동에 사로잡힌다.

시에서의 운율은 독자들의 가슴을 흔드는 원초적 장치다. 시에서 운율을 소홀히 하는 것은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이 무기를 소홀히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시의 운율은 독자들의 가슴을 공략하는 무기다. 인구에 회자되는 아름다운 작품들은 다 운율을 소중히 다룬 것들이다. 소월이나 미당의 시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 다 그렇지 않던가.

오늘의 시인들은 운율을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젊은 시인들은 거추장스러운 운율 같은 것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시에서 운율이라는 것은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마치 몸을 떠나지 않는 그림자처럼 문장에 매달려 따라다닌다.

정형시의 형태는 정형적인 운율을 담기 위해 그렇게 자리잡은 틀이다. 정형시의 각 행들이 일정하게 배행(配行)된 것은 가지런한 운율을 담기 위해서인 것이다. 행의 길이가 운율의 형태를 결정하는 바탕이 된다. 긴 행에는 유장한 운율이 짧은 행에는 촉박한 운율이 담기게 마련이다.

자유시의 배행은 정형시처럼 일정하지 않고 들쭉날쭉 자유스럽다. 따라서 자유시는 행마다 다양한 운율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정형시는 작품 전체가 통일된 운율로 일관되지만 자유시는 다양한 운율이 혼재한 상태인 것이다. 시인들이 아무리 운율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작품을 쓴다고 해도 운율은 스스로 행들 속에 자리를 잡는다. 비록 산문일지라도 분행하여 배열하면 운율이 살아난다. 그 운율이 조화와 균형을 지닌 미적 구조를 갖춘 것이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시인들의 운율에 대한 무관심은 운율의 방치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작품이 누더기 같은 운율을 달고 있든 어떻든 방관하는 불성실한 태도다. 숙명적으로 떨쳐버릴 수 없는 운율이라면 방치하지 말고 돌봐야 할 일이다. 효율적인 운율을 의식하면서 분행에 고심해야 되고, 해조로운 운율을 살리기 위해 시어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

시어의 의미와 이미지들이 빚어내는 내재율까지를 고려한다면 작품 속에 운율을 담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다. 귀찮다고 방치하는 것은 게으름이며 자기기만이다. 자신의 작품이 보다 감동적으로 독자의 흉금에 가 닿기를 바란다면 운율을 결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


3. 독선적 발언


모든 발언은 들어줄 상대를 전제로 해서 시도된다. 독백조차도 자신을 청자로 설정된 담화라고 할 수 있다.

문학작품들은 세상을 상대로 한 작자의 발언이다. 시 역시 세상을 향해 쏟아내는 시인들의 발언이다. 그런데 그 발언이 의미를 가지려면 발화자와 수화자 사이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리 중요한 발언이라도 수신자와의 코드가 맞지 않아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도로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시가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난해성’이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시는 통상적인 발언들과는 달리 까다로운 글이다. 함축과 간결을 지향하는 글이기 때문에 이해가 쉽지 않다. 더욱이 선시(禪詩)와 같은 심오한 정신의 세계를 다룬 것이거나 고도의 은유나 상징적 장치가 구사된 작품인 경우는 일반인의 접근이 어렵다. 이럴 경우는 독자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발신자(시인)와의 코드를 맞출 수 있다.

그런데 현 시단에는 수신자(독자)를 아예 무시한 독선적 발언들이 범람하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이해되기를 거부하며 쓰인 작품들이 없지 않았다. 심층심리를 작품화하려는 초현실주의의 시와 대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무의미 혹은 비대상의 시들이다.

초현실주의의 시는 소위 자동기술법에 의해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상념들을 아무런 여과도 없이 그대로 쏟아 놓은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질서도 논리도 규범도 없다. 어떠한 윤리의식이나 이념의 규제도 받지 않은 혼돈된 언어의 토사물인 셈이다. 그야말로 수신자를 의식하지 않는 일방적인 배설이다.

무의미시의 시 쓰기는 미술에서의 비구상화가 그렇듯이 대상으로부터의 자유를 모색한다. 그러나 언어 구조물인 시는 비구상화처럼 대상을 완전히 떠날 수 없으므로 대상 자체를 변형시키거나 이질적인 대상들을 낯설게 결합시킴으로 관습적인 기존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 역시 의도적으로 수신자와의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일방적인 발언이다.

오늘의 한국 현대시가 독자를 무시한 독선적 발언들로 넘친 것은 앞에 얘기한 두 경향과 더불어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서구적 풍조의 영향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지만 시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자꾸 모색되어야 한다. 그래야 시문학의 지평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가 긍정적인 것이 아닐 경우엔 문제가 없지 않다.

나는 보수적일지는 몰라도 문학에서의 효용론을 옹호하는 편이다. 세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데 기여하지 못한 작품은 존재의의가 없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감동적인 요소를 작품은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독자들에게 전달되기를 거부하는 그런 작품에게서는, 아니 독자를 답답하고 짜증스럽게 하는 그런 작품에서는 감동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작품의 생산이 작자의 울적한 심리를 해소하는 작업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자기만족의 일방적인 독설이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자신의 심리적 갈등 해소만을 위한 작품이라면 혼자서 즐길 것이지 세상에 내놓을 일이 아니다. 이는 세상을 불쾌하고 답답하게 만드는 공해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이 시를 생산하는 것은 배설이 아니라 출산이다. 산모가 아이를 낳듯 시인은 잉태와 산고의 고통을 거쳐 시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시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감동을 심으며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

4. 미의식의 문제점


나는 시에 이념이나 윤리의식을 고집하는 계몽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시가 아름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심미주의자의 편에 선다. 시가 예술이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는 작업이어야 한다. 내용이 아름답든지 아니면 표현 형식이 아름답든지 간에 아름다운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시가 아름다움과 무관하다면 예술이라고 부를 수 없다. 해체주의자들 가운데는 그 동안의 시들이 아름다웠으니 이젠 아름다움과 상관없는 시를 만들어 냄직도 하다는 주장을 펼지 모른다. 설령 그러한 글이 있다면 예술이 아닌 새로운 장르의 명칭을 만들어 시와 구별해야 할 일이다.

오늘의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대하면 미의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미적인 정서보다는 자극적인 감각에 더 많이 의존하는 것 같다.

울적한 심리나 불쾌한 감정을 작품화할 경우 어떻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물론 시가 아름다운 것만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만스런 것들에 대한 비난, 질시, 혐오의 감정을 노래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를 시정하기 위해 규탄, 선동, 저항의 수단으로 시가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격한 감정을 노래하는 경우라도 그것이 시라는 이름의 글로 불리기를 바란다면 미의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시는 격렬한 감정을 그대로 쏟아낸 구호나 격문이나 욕설과 같은 생경한 글일 수는 없다. 위트 풍자 역설 비유 상징 등 시적 장치의 여과를 통해 순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속을 벗어나 시의 품격을 갖춘 글이 되고, 동양의 전통적 시관인 소위 온유돈후(溫柔敦厚)를 지니게 된다. 유연함이 시의 덕목이며, 힘이며 또한 아름다움이다.

한편 미의식의 저속화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덕더덕 짙게 분칠한 여인의 얼굴이 저속하게 느껴지듯 지나친 수사로 치장한 글이 또한 우리를 역겹게 한다. 진실이 담겨 있지 않은 미사여구는 조화(造花)와 같아서 생명력이 없다. 짙은 화장이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본연의 얼굴을 감추는 가식이기 때문이리라. 아름다움은 진실을 바탕으로 할 때 감동으로 다가온다. 예로부터 기어(綺語)를 꺼려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현 시단에는 진실을 바탕으로 한 절실한 작품보다는 관념 위주의 화사한 능변들이 적지 않은 것도 같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감동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격이 아니겠는가.

5. 시정신의 퇴락


시정신이란 좁게는 개별적인 시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정신을 가리키기도 하고, 넓게는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시를 시 되게 하는 시문학의 정신적 특성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전자를 협의의 시정신 그리고 후자를 광의의 시정신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개별적인 작품들 속에 담겨 있는 협의의 시정신들이 모여 한 시인의 시정신을 형성하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들의 시정신이 그 시대의 시정신을 형성하게 되며, 시공을 초월해서 시인들이 지닌 보편적인 시정신이 시문학의 특성을 드러내는 광의의 시정신이 된다. 따라서 협의의 시정신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라면 광의의 시정신은 보편적이며 종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실현하고자 언어를 구사한다.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는 발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목적의식을 ‘욕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시라는 형식의 글도 분명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시는 시인의 욕망 실현의 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를 통해 실현코자 하는 시인들의 욕망은 보통 사람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과는 같지 않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온 좋은 시들을 살펴보건대, 그 작품들 속에 서려 있는 시인의 욕망은 세속적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부귀나 명리를 지향하지 않는 맑고 깨끗한 승화된 욕망이다. 진?선?미를 추구하고 염결(廉潔)과 절조(節操)와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다. 이는 우리의 전통적인 선비정신과 상통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선비정신’을 이상적인 시정신으로 삼고자 한다.

오늘의 많은 시들이 감동으로 다가오기는커녕 오히려 울적함과 불쾌함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시가 욕설인가 하면 말장난이요, 잡배들의 장타령처럼 저속한가 하면 술 취한 자의 주정처럼 거친 푸념 같기도 하다. 시가 이처럼 난삽하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나는 그 원인의 하나가 시정신의 상실 때문이라고 본다. 오늘의 시에는 청렬한 시정신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흔치 않다. 고결한 선비정신을 지닌 시인들이 많지 않다.

오늘날 실추된 시의 위의(威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정신을 되살리는 일이 급선무다. 양질의 상품 생산을 독려하는 운동이 있는 것처럼 오늘의 시단에 청렬한 시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어떤 이는 ‘자유’를 핑계 삼아 청렬한 시정신으로 우리시의 정체성을 수립하자는 데 선뜻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시가 어디로 가든 오불관언 방관 방치한다면 이는 태만을 넘어 자신의 소임을 저버리는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시가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해 갈 수 있도록 모색하는 것이 어찌 우리의 소중한 책무가 아니겠는가.

시는 언어의 정련 못지않게 정신의 정련을 필요로 한다.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기술자이기 이전에 정신을 다스리는 수행자여야 한다.

6. 풍요 속의 궁핍


나는 이 글의 첫머리에서 현금의 우리 시단을 시인이나 작품의 생산량으로 보아 공전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시의 전성기라고 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시가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난삽성’ 때문이라고 보았고, 그 난삽성의 요인을 다섯 가지 입장에서 비판했다.

첫째, 자유시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폐단이다. 그리하여 함량미달의 조잡하고 불성실한 작품들이 생산된다.

둘째, 운율에 대한 등한시다. 운율은 시를 흥겹게 하는 무기인데 이를 소홀히 하여 시에서의 감동성이 상실되었다.

셋째, 독선적 발언이 문제다.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은 일방적인 발언이 시를 난해하고 역겹게 만들어 독자들로 하여금 시를 멀리하게 했다.

넷째, 미의식에 대한 문제다. 미의식에 대한 무관심으로 예술성이 부족한 작품이 생산되거나 혹은 저급한 미의식으로 진실성이 결여된 가식적인 작품들이 생산되기도 한다.

다섯째, 시정신의 퇴락이다. 진 선 미와 염결 절조 친자연을 추구하는 선비정신을 이상적인 시정신이라 할 수 있는데 이의 쇠퇴로 말미암아 시의 위의(威儀)가 실추되고 말았다.

물론 현 시단에도 시인의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역작과 수작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긍정적인 작품보다는 부정적인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많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거론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현 시단은 작품의 풍요한 생산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감동적인 작품은 흔치 않아 보인다. 한마디로 풍요 속의 궁핍이라고 진단할 수 있을 것 같다.

궁핍을 벗어나는 길은 분명하다. 시가 다시 감동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시인들이 감동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떠났던 독자들은 다시 되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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