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다리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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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6건 조회 322회 작성일 20-09-11 00:06본문
하얀 벽 위에 조미령이 비치고 있었다. 조미령이 박암의 한쪽 다리를 잘라 산 속으로 도망하였다. 나는 너무 늙은 소나무가 그녀의 치마를 홱하고 낚아채는 것을 보았다.
이미 달이 이우는데.
산골 집 지붕에 박넝쿨이 여우 울음소리를 내는데.
빈 방에서는 익사체들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방안까지 누가 폐선을 들여놓았나.
아픈 잎 밟고 품 안에 다리 한짝 안고서 조미령이 거미줄 속으로 들어갔다.
하얀 벽 안에서 시체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앙상한 손가락으로부터 반지 하나가 뚝 떨어졌다. 조미령의 옷이 폭포수에 젖었다. 엎어놓은 사발 위로 애액이 떨어진다. 조미령이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낙숫물이 속삭인다. 사슴이 있었어. 그녀 자궁 안에는 사슴이 한 마리 있었어. 아직 채 눈 뜨지 못한 사슴. 담에서 담으로 이어진 좁고 고립된 골목. 쁠이 빨간 절규. 단단한 담을 들이받는 절규. 그러자 그녀 배꼽이 사슴 울음소리를 낸다. 박암이 그녀를 쫓아 바위 위로 기어오른다. 박암의 남은 다리 한짝이 방해되었다. 울 아버지가 봉놋방에 가셔서 수백년 동안 쓰지 않았던 낫을 갖고 오신다.
이걸로 배암을 끊어라. 봄이라서 그런지 배암의 등에 선홍빛 꽃이 만발하였다. 뭔가 홀린 듯 선홍빛 꽃이 청동빛 비늘들로 우렁차게 퍼져나갔다. 비단자락이 자르르 윤기의 결 따라 허물어졌다. 조미령이 하얀 치마를 들어올린다. 바위 사이로 투명한 것이 흘러갔다. 박암이 털썩 흙더미 위에 무너졌다. 산삼(山蔘)이 와서 흐릿한 호롱불을 갖다 대본다. 불이 가까와지자 어둠 속으로 은어떼들이 도망가버린다. 나도 아버지도 개집 안에서 우리집 흰둥이도 모두 일어나 함께 박수쳤다.
댓글목록
날건달님의 댓글
날건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시에 대해 생무지다 보니 제가 시를 대하는 눈이 자꾸 흐트러지는군요. 시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꾸 어떤 사건에 매달리게 됩니다. 이 시를 읽어내려가면서도 어릴 적 보았던 흑백영화와 연관시키게 되더군요. 좋은 시 감상 잘하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영화 맞습니다.
전설의 고향에서도 했었죠.
유현목 감독 한이라는 공포영화에서 조미령이 아내로 나와서 남편을 살리려고 한밤중 공동묘지로 가서 시체 다리 한짝을 잘라서
오는데 박암이 분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더니 한 다리로 쫓아오는 에피소드입니다.
아마 보셨을 것 같네요.
날건달님의 댓글의 댓글
날건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다양한 시어의 표현들이 이미지를 생성하고 이미지가 고리처럼 연결되어 특정한 영상을 만들고 그 영상들이 제 마음속에 시적 풍경이 되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가 알고 있던 시에 대한 편견이랄까요. 시에 대한 접근 방법을 달리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시인님의 시적 언어의 표현이 너무 좋아서 시인님의 시를 자주 열람하는데요, 감상할때마다 참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고맙습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는 나와 언어 그리고 그밖의 무한한 공간 이렇게뿐입니다.
이렇게 따라가면 시가 된다, 이렇게 해야 시가 된다 같은 것은 없습니다.
시는 그냥 발버둥입니다.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창가에핀석류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박암, 조미령.. 잊고 있었던 이들인데 여기서 만나게 되는군요.
그런데 박암씨는 얼굴이 아주 생생한데 조미령씨의 얼굴 기억은 흐릿하군요.
한 시대를 빛내던 옛 배우들인데 기억해 내시다니요, 대단하십니다.
납량특집 즐겁게 감상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가 기억해낸 것이 아니구요,
유현목 감독의 한이라는 영화를 얼마 전에 감상했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가 너무 재밌고 마음에 들어서 한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역동성이라든가 치밀한 짜임새같은 것이 좀 부족한 것 같아서 시가 좀 허술한 것 같습니다.
시가 절정에 도달하는 것이 참 어렵네요. 늘 걱려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