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창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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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6건 조회 610회 작성일 20-10-06 01:32본문
비창소나타
혼자 창문을 열다가
지난 여름 내 새끼손가락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문지방이 열대림처럼 자라난다. 문 밖에서는 소나기가 내린다. 코코넛 열매가 떨어지는 소리 들려온다.
검은 가슴뼈 안에 흰 피아노 건반들이 가득 들어있다.
아직 숲이 저렇게 남았는데.
숲 아래 깔린 바윗돌 하나 흙 알갱이 하나,
처연히 솜털 돋은 팡이꽃 두 손에 졸졸 흘러가는
전설을 엿듣는 오솔길 하나,
내 생명에 잔물결 일어나는.
내 방 유리창이 떠는
좌우대칭의 기하학적인 황홀.
나직이 들려오는 전설은 산유화들 몸 비비는 꿈 속을
신발 벗겨지는 줄 모르고
발목 뼈가 드러나도록 신비하게 걸어가고 있다.
내 유년시절 피었다 지던 꽃들을
구름 심연 속으로 그 바닥을 향해 헤임쳐 들어가면,
우물가에 서서
검은 안쪽을 들여다보든,
우물 안에서
비췻빛 천정을 내다보든.
너는 내 누이를 닮았다.
손목이 마른 월계수 가지처럼 향그럽던,
현악사중주처럼
서로 다른 빛깔 조화로운
맥박으로 너와 대화하던,
누이여
날 잊었나. 네 표정은 얼음 같아
오히려 음계 안으로 네 삶과 죽음의
기하학을 비창한 선율로 옮겨적을 수 있겠다.
죽음 안으로 쏟아져,
통 통 튀어오르던
단단한 진주알들의 조용한 아우성.
벨데베레 궁전 황금의 방 안에서 엿보았던,
조장 당한
죽은 황녀의 분홍빛
반지 뼛조각 속으로
두더지처럼 코를 박고 들이밀던 내 하반신
두 다리 사이를 흘러가던
해와 달.
바람의 흐느낌.
댓글목록
라라리베님의 댓글
라라리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몽환적이면서 아름다운 시입니다
생명의 잔물결을 일으키는 고요한 속삭임을 듣는 것처럼
빠져들게 하네요
숲 속 하얀 안개를 걷고 들어가면 다른 황홀한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
죽음마저 아름답게 채색 될 것 같은
꿈꾸 듯 눈감고 듣는 아름다운 곡 오늘은 코렐리님 덕분에
비창 소나타를 들어 봐야겠습니다
푹 잠겨있었는데 이제 현실로 돌아오려니 아쉽네요
감사해요 이런 시를 아낌없이 볼 수 있는 아침이
무척 행복합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너무 좋게 보아주시네요. 시로 남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시 쓰는 이에겐 가장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비창소나타는 제가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대 후반을 저와 함께 했던 곡입니다.
질풍노도의 시대를 막 지나갈 때였는데, 비창소나타가 한 음 한 음 참 와닿았습니다.
삶 죽음 신비 아름다움 비극 황홀같은 것이 한데 뭉쳐 마음 속을 지나가던.
빌헬름 켐프의 연주를 닳도록 들었었는데요.
음악은 영원하고 인간의 삶은 유한하네요. 시를 통해서 유한의 경계 바깥으로 돌을 던져볼 수 있을까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창가에핀석류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문득 창가에 앉아 선율에 젖어있는 한 시인을 생각하게 되는군요.
휴대폰 액정면이라 이글의 향기를 넓게 채우지 못하는 아쉬움 입니다.
나중에 차분히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두 다리 사이를 흘러가던
해와 달
바람의 흐느낌
마치 해와 달 바람이 육화된 듯
코렐리님의 정서가 살랑살랑 다가오는데 너무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제 글을 적확하게 읽어내셔서 제가 석류꽃님 댓글을 읽으면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가야하겠다 하는 방향도 얻고는 합니다.
향기와 지조는 석류꽃님 시에 더 깃들여있죠. 시어는 그렇게 단단하신 데 말입니다.
석류꽃님 훌륭한 시 고대하고 있습니다.
grail217님의 댓글
grail217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코렐리 시인님은 정말 ㄷㄷㄷ하네요..
언제나 훌륭한 시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시마을문학상을 수상할 거라고 예감합니다..
고맙습니다..
^^*..
..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너무 과찬이십니다. 제 시를 제가 잘 아는데요.
제 시가 과녁을 맞추는 일은 참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격려하시는 말씀인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격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