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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나간다면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레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89회 작성일 21-01-11 22:33

본문



이곳을 나간다면

 

 

링거를 꽂자 벽이 나보다 먼저 몸을 뒤틀었다

 

달력은 창백한 벽 붙들고 신음하는 날짜를 진단한다

고립으로 탈이 난 목록을 견디는 것

염증들은 언제부터 범람한 걸까

 

진공상태가 되어 환자복 속에서 찾아냈다

 

쓰리고 아픈 아침과 밤이 회진하며 내 복통을 들춰보고 간다 달아난 잠을 다시 불러 눈두덩이 위에 올려놓기를 반복하였고 묽거나 흰 시간이 죽 그릇에 담겨와 구경하다 멀어졌다

 

둘 중 하나는 쉬지 않고 뭔가를 쏟아내던, 나와 알약

눈 뜨면 욱신거리는 숫자들이 스카이 댄서처럼 춤추었고

저녁이면 하루 치 죽음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방문한다

 

출입구가 어디냐고 묻던 손가락, 그런 날엔 충혈 된 벽이 손을 씻었다 창백한 고립을 순식간에 찢어낼 수 있다면, 이라고 중얼거리는 무력한 하체가 수선해야 할 수액을 매달고 몇 알의 몽롱함 속을 헤엄친다

 

서른 날의 답답함을 엮어 탈출할 수 있는가

동전 앞면이 나오면 구속, 뒷면이 나오면 탈출

불길한 예감은 어긋남이 없다는 듯 동전 앞면이 깔깔거린다

 

병실 밖 허공에 먹물처럼 출렁이는 까마귀를 향하여 밤을 뒤 짚어 썼구나, 말 건네자 회전목마 같은 요일들이 알약처럼 쏟아졌다 그것들은 숫자였으므로 물어가도록 밖에다 던져주었다

 

옆 침상 장기 체류자에게

왜 왔느냐고 묻자

검버섯 같은 암세포가 위장을 삼키더니 간과 폐까지 집어 먹었으나 암보험을 5개나 들었다고 말하는 누런 이빨이 미소를 물고 있다 지친 걸음을 덧칠하던 통증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크고 작은 발들이 진통제를 밟자

발목이 수소풍선처럼 가벼워졌다

 

주삿바늘이 버려지는 속도로 내일이 배달되었고 쓰디쓴 꿈을 끝내자 옆 침상이 따뜻한 커피를 건넸다

 

나오는 날

옆 침상에게 잘 가시라는 인사 건넸고

그는 나에게 또 보자며 익살스런 웃음 던졌다.

 

가로등 밑, 배웅하는 산수유나무 한 그루에게

너도 이곳을 나간다면

이곳을 나간다면

나간다면

 

모두 같은 온도를 가진 정물이 되어 지워지지 말자


댓글목록

미상님의 댓글

profile_image 미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해체시는 인공지능도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현대시에 암흑기가 찾아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몸 건강하게 지내세요
챙겨주는 사람이 없이 몸이 아프면 서글픕니다
한 때 해체시를 전문으로 쓰는 현대시인이 되고자 했는데
챗봇을 알게 되면서 이렇게 멍청한 인공지능도 시를 쓰는구나 하면서 한탄합니다
미래가 다가올수록 마지막 까지 살아남는 시인이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레떼 시인의 시가 오늘 따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레떼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레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미상시인님

시를 너무 사랑하시는 군요..!
적당히 사랑하시어요,ㅎㅎ
저는 치유의 관점에서 시를 쓰고 있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굴 위해 시를 쓰는것이 아니라 저의 고된 하루를 치유하기 위하여
어떤 형식이나 내용에 구속되지 않고 글을 쓰지요

시인님도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미상님의 댓글

profile_image 미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레떼 시인님

이 정도로 잘쓰는 시인이 단지 자신의 치유를 목적으로만 쓴다는 게 아쉽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타인에게 보여 주는 목적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집 한 권을 출판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시인은 자신과 타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의 시에서 그런 면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까닭은 실제 그런 시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코렐리 시인의 시에서도 구원의 효과를 찾아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시는 그외의 역활을 하는 면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치유하듯 타인도 치유할 수 있는 레떼시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꼭 시집 한 권을 명시집으로 이름을 날리는 레떼시인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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