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너머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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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벗자 시야는 내 이름을 먼저 잊어버렸다
글자는 다리가 돋아 도망가고
색깔은 서로의 고막을 핥으며 울었다
눈동자에선 빛이 아니라 무게가 떨어졌다
무게가 바닥에 닿자 바닥이 하늘로 뒤집혔다
유리알 속에는 누가 숨 쉬는지 몰라
바람의 주머니를 더듬어 만져보니
내 어제와 네 내일이 한 장의 영수증으로 포개져 있었다
숫자들은 흐느끼며 서로를 지웠고
지워진 자리에서만 새들이 태어났다
새들은 날지 않고 문장을 씹어 삼켰다
그들의 부리에선 모음이 끈적하게 녹아내렸고
자음은 서로를 미는 골목처럼 좁아졌다
골목을 지나던 내 그림자가
갑자기 나에게 주인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림자는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빛은 언제나 늦는다고 속삭였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빛은 날 따라잡기 위해 걸음을 포기했다
대신 어둠이 나에게 안경을 씌워주었다
그 안경 너머엔
나의 발자국들이 서로에게 길을 묻고 있었고
길은 대답 대신 눈물을 빌려주었다
그 눈물에서만 시간은 익었다
익은 시간을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한 미래가 아니라 잉크 흘린 과거가 입안을 휘감았다
나는 뱉지 않고 삼켰다
그리고 다시, 안경 너머로 사라졌다.
댓글목록
이장희님의 댓글
안경을 30년 넘게 착용하고 있어요.
안경 없으면... 뭐 아실겁니다. ㅎㅎ
[그 눈물에서만 시간은 익었다] 여기가 저에겐
확 다가오네요.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늘 건필하소서, 수퍼스톰 시인님.
김재숙님의 댓글
안경너머 사라진 과거는 말랑말랑한 눈물로 남을지 모르지만 다시 맑은 안경알에 맺힐 내일은 아주 밝은 빛으로 다가 올것 같습니다
좋은시 잘 감상했습니다 시인님~~~^^
수퍼스톰님의 댓글
이장희 시인님,
김재숙 시인님,
혼자 중얼중얼 횡설수설한 글에 마음을 얹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한 해의 끝자락이 다가 오니 마음만 분주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2025년, 멋지게 마무리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