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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학교,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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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andres00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340회 작성일 19-08-1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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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人學校 公告(공고)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金冠植, 쌍놈의 새끼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 내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金素月 金洙暎 휴학계 全鳳來 金宗三 한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크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校舍.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1921 ~ 1984) - 김종삼 시 감상이라 할까 : - 시인학교, 그 以後 金宗三의 시인학교엔 남아있던 몇몇 시인들이 마시다가 남은 막걸리와, 먼지 덮힌 시집들과 어느 유명 작곡가의 '시를 위한 변주곡'이 있다 그러나 실상, 들어보면 별 감동은 없다 그저 그런 시간의 뼈가 덜그럭거릴 뿐이다 한 쪽 벽에선, 썩은 살들이 멀쩡했던 육신을 회상한다 (미소짓는 초상들) 차라리 지금은 제일 경박한 말이 어울릴 때다 그 말을 하고 싶어 안달하는 시인들, 모두 자퇴하였다 인사동 밤 11시 길 건너 술취한 자동차가 비틀거리며 헤드 라이트를 켠다 휘청이는 빛에 흩어지는 어둠 사이로 간혹 비가 내린다 쏟아지는 느낌표들이 모두 다 바람에 날려 비에 젖고, 길 지나가는 사람들은 살가운 그림자 한 조각 남기지 않는다 그 한 모퉁이, 세상을 닮아가던 늙은 시인의 어두운 신음이 낡은 현(絃)같이 처진 그의 어깨 위에 눌러 앉았다 무가치한 꿈, 이제 그는 자신을 지울 일이 큰 숙제 그가 몸 담았던 세상의 온갖 풍경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친다 최후의 절망도 더 이상 그럴듯한 공포는 되지 못해서, 높기만 하던 그의 하늘이 서서히 무너져내린다 막다른 벽에서 짧은 호소가 잠시 꿈틀대고, 남아있던 마지막 추억이 원고지에 마침표를 찍는다 '모두 썩어질 놈들이야' 하며, 떠들석하니 들어와 새롭게 자리 잡은 풋풋한 푸른 시인들이 다음 학기 수강신청을 호기롭게 한다 그래도 늘 울리는, 시인학교의 그 변주곡은 별 감동이 없다 감상에 따른 사족 : 이 시인학교는 속이 빈 상자나 죽은 새들을 말함이 아니라, 아침의 어둠을 술회하며 홀로 가는 나그네의 얼굴들을 말함 입니다 누군들 알았겠습니까 ? 그들이 그토록 몸부림치며 되돌아가려 했던, 영혼의 푸른 서식지 앞에서 부끄러운 나체가 되어 눈물 흘리는 것을 이따위 속절없는 말이라도 항상 아끼는 마음들이 있어, 허튼 詩나마 아직은 노래되는 세상이기에 이런 시인학교도 한 폭의 정겨운 그림이 되는 듯 합니다 단조로운 방 안에 걸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 熙善, 부록: 김종삼論 ▣ 김종삼의 삶과 문학 한 늙고 추레한 노인이 가난한 산동네의 구멍가게에 들어왔다. 무허가 집들이 밀집된 산동네 산 8번지의 한 구멍가게였다. 그 일대에는 개백정도 살고, 상처한 복덕방 영감도 살고, 막노동꾼, 술집 나가는 아가씨들도 산다. 과자 부스레기, 라면, 소주, 일용 잡화 따위로 겨우 구색을 갖춘 코딱지만한구멍가게였다. 마침 주인은 자리를 비운 채 였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얼른 소주 두병을 훔쳐 밖으로 나왔다. 노인은 구멍가게에서 훔친 소주 두병을 소중하게 옷안에 숨겨가지고 어디론가 허청허청 가고 있었다. 그이가 저 유명한 시집 [북치는 소년]의 시인 김종삼이라는 걸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소주 두병 값을 갔다 주긴 했지만 이 무렵 김종삼은 구제불능의 소주 중독이었다. 집에서 책을 들고 나가 헌책방에 넘겨주고 받은 돈으로 소주를 마셨고, 동네 세탁소 주인에게 구걸하듯이 소주값을 빌리기도 했다. 세탁소 주인은 <깔끔하시던 분이 변해도 너무 변하셨어.......>라고 한탄을 하며 혀를 찼다. 한 번은 집을 나간 김종삼이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를 봤다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종적은 묘연했다.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내고도 며칠이 더 지난 뒤에야 식구들은 시립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를 찾아내었다. 술에 만취되어 길가에 시체처럼 방치되어 있는 그를 누군가 시립병원에 입원시켰던 것이다. 그는 무연고 행려병자로 십여일간 사경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살아나 가족들에게 연락이 닿았던 것이다. 김종삼은 일어나 걸어다닐만 하자 시립병원의 여기저기로 마실을 다녔다. 시체실 주위를 배회하기도 하고, 중환자실의 침상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얼굴도 들여다보기도 하고, 특별치료 병동 중환자 보호대기실에서 환자 보호자와 말벗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치료를 받은 뒤 시립병원에서 퇴원하고 그 이후로 식구들은 그에게 일체 용돈을 주지 않았다. 한 푼이라도 생기면 구멍가게로 달려가서 소주를 사 마셨기 때문이다. 김종삼은 절도라는 극한의 방법도 마다 하지 않고 소주 두병을 확보했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알콜 중독이 아니라면 그는 멀쩡했다. 상처한 복덕방 영감이 석달만에 서둘러 후처를 들였다가 심장마비로 죽자 매장에 필요한 사망진단서를 떼다 준 것도 그였다. 아니면 하릴없이 인파 속을 어정어정 걸어가다가 충무로의 한 평 남짓한 자그만 카셋트 점포에서 흘러나오는 핏셔 디스카우가 부른 슈베르트의 보리수에 취해 있곤 했다. 그는 <팝송 나부랭이와 인기 대중가요가 판치는> 세상을 못마땅해 했다. 그런 곳에서 커피 한잔이라도 마시면 <속이 메식거려 기분 나쁘게 먹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김종삼은 유서깊은 고전음악 매니아였다. 김종삼은 전봉래 전봉건 형제들과 함께 사변 전의 유명한 고전음악감상실들 이었던 명동의 돌체 오아시스 라아뿌륌의 단골이었다. 전쟁이 터지고 돌체가 피난지 부산 역전으로 옮겨진 뒤에도 김종삼은 그곳을 드나들었다. 돌체는 피난지로 몰려든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다. 때로는 잠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돌체의 홀에서 잤고, 아침이면 바하를 틀어놓고 세수를 하기도 했다. 그때 김종삼은 여기저기서 훔친 마태 수난곡의 독창 판과 브람스 교향곡 4번의 SP판도 소지하고 있었다. 그 무렵 그의 품에는 [園丁] [G. 마이나]와 같은 처녀작 원고를 갖고 다녔다. 시인 김윤성이 그의 처녀작 원고를 본 뒤 [문예]지에 추천을 받게 해주겠다고 갖고 갔으나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의 작품들은 꽃과 이슬을 노래하지 않았고,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이유로 [문예]지의 추천위원들로부터 거절당한 것이다. 시인이며 불문학도였던 전봉래가 전후의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부산 남포동의 스타다방에서 바하를 들으면서 자살을 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김종삼은 1963년 2월에 동아방송 총무국에 촉탁으로 입사했다가 1967년 일반사원이 되어 제작국으로 옮겼다. 그 이후 그는 10여년간을 동아방송에서 음악효과를 맡으면서 1976년 정년으로 동아방송을 나올 때까지 그는 원없이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남들이 다 퇴근한 뒤 자정 너머부터 혼자 음악을 들었다.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그는 방송국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방송국으로 다시 들어갔다. 의아해 하는 방송국 수위에게 손을 번쩍 들어 <시그널 몇 개 만들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텅 빈 레코드실에서 옷속에 감춰 들여갔던 소주를 따고 혼자 모짜르트를 들었다. 어떤 곡은 며칠 몇 달씩을 반복해서 듣기도 했다. 오랫동안 방송국에 근무하면서도 그 흔한 직책하나 맡은 적이 없지만 그 시절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김종삼의 부친은 신문기자를 지낸 지식인이었다. 나중에 [평양공론]이이라는 잡지를 내기도 했다. 김종삼은 평양고보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귀족들만 다니는 동경문화학원에서 문학부에 입학하지만, 작곡을 하고 싶어 음악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가 음악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안 그의 부친은 일체의 송금을 끊어버렸다. 김종삼은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며 7년간 고학을 했다. 그 시절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하여 광범위하게 독서를 했고, 바이런, 하이네, 발레리 등의 시들을 열심히 탐독했다. 고전음악만을 틀어주던 동경의 르네상스 다방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드나들기도 했다. 내가 김종삼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초봄이었다. 그해에 나는 신춘문예를 통과하여 문단에 나온 신출내기 시인이었고, 한 단행본 출판사의 편집사원으로 일할 때였다. 같은 출판사의 편집장이었던 시인 이세룡과 함께 인쇄소를 다녀오다가 무교동에서 점퍼 차림에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걸어오는 그와 마주쳤다. 낡은 등산모, 커다랗게 솟아 있는 귀, 그리고 어정어정 걷는 걸음........ 나는 <나는 누구나 가는 길을 /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라는 그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며 그가 김종삼 시인이라는 걸 한눈에 알았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시인 이세룡에게 다짜고짜로 세금 2천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세룡은 웃으며 호주머니를 뒤져 그에게 2천원을 건네줬다. 그의 소주값이라고 했다. 그 뒤에도 조선일보 옆에 있는 아리스 다방에서도 몇번인가 그를 만났다. 어느날 그가 출판사의 편집실에 예의 점퍼 차림에 벙거지를 쓰고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생전의 그의 별명은 도깨비였다. 그는 그렇게 도깨비처럼 출판사 편집실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그는 품에서 원고 하나를 꺼내더니 내게 베껴쓰라고 했다. 김종삼의 육필 원고는 글자 하나가 주먹만 했다. 글자들은 날카롭게 직선으로 뻗어 있었고, 원고지의 네모칸을 훨씬 벗어나 있었다. 나는 그 원고를 새로운 원고지에 정성스럽게 옮겨적었다. 내가 정서한 원고를 받아 든 김종삼은 자신의 육필원고와 대조를 마치고는 원본을 이세룡에게 내밀었다. 말은 안했지만 며칠 전 2천원의 갈취에 대한 우아한 답례였다. 김종삼은 보헤미안이었고, 無産者였고, 생활인으로서 철저하게 무능력자였다. 그의 인생에는 생활이 없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시와 음악과 술이었다. 그는 다만 시인이었다. 때로 그는 자조적으로 <나 같이 인간도 덜 된 놈이 무슨 시인이냐. 나는 건달이다, 후라이나 까고.>

    라고 내뱉었다. [製作]이라는 시에서 <그렇다 / 非詩 일지라도 나의 職場은 詩 이다>라고 선언했둣이 그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시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 부록 글 / 장석주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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