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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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운영꽃부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09회 작성일 19-09-24 07:59본문
어릴 적 책갈피에 노랗게 물든 단풍잎을 끼워 넣어두면,
짝사랑하던 누나가 릴케의 시집 속에서
바싹 마른 향기를 꺼내 읽어 주었다.
거기 귀 기울이면,
보랏빛 투명한 포도알들이 내 귓속을 굴러갔다.
가을이면
가느란 코스모스처럼 위태로운 누나가,
음영 짙은 그 눈동자 속에 농익은 시월보다도
시집을 읽다가 가끔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먼 곳이 더
내 눈에 시렸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누나 시선이 멎는 자리.
바위 틈 술렁이는 가을숲 있었다.
누나 이마를 늘 반쯤 가리고 있던
까만 머리카락에 정말 장미 가시에 찔려 죽어야 할
시인이 있다면
누나가 아닐까 생각해보고는 했다.
빨간 잎들이 저 높은 데서 여분의 마찰음을 우수수
쏟아내던 날,
투명한 것이 아래로 낙하하여
허공 사이로 비린 열매 퍼덕임이 쓰라리던 오후,
누나는 혼자 가을숲으로 걸어들어가
가장 높은 갈메나무 가지에 목을 맸다.
나중에 사람들이 풀 수 없을 정도로
그 가냘픈 목에 꽉 매듭을 묶었다.
그해 가을 내내 누나는 거기 매달려 있었다.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는 잔잔한 얼굴에
노란 잎이 달라붙는 순간도 있었다.
나는 혼자 가을숲으로 들어가
누나의 혀 앞에서 릴케의 시집을 펼쳐 보여주었다.
하얗게 웃으며 누나는
이마를 활짝 열어
얼굴 위 지나간 화상자국을 보여주었다.
누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
가을숲이 조용히 숨을 삼키고 있었다.
가을 내내 누나와 나 사이에서는
그런 편지들이 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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