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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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싣딤나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526회 작성일 19-10-19 12:58본문
주방 구석에 직각을 꼭 밀착 시키고
먹고 남은 걱정들을 저장하는 냉장고를 보아도
타일들이 직선과 직각을 맞대고 궁리해서
똥처럼 바닥으로 주저앉는 본능들을
무의식의 바다로 빼돌리는 화장실 구석에서
사는 더러움을 안고 쳇바퀴를 돌며
전생의 업보들을 세탁하는 세탁기를 보아도
창이라고 열어보면 온 세상 시름이 다 비치는
컴퓨터와 텔레비전을 보아도
발바닥은 용케도 사각의 설자리를 얻고도
아직 피울 바람과 달아오를 뜨거움이 남은
둥근 머리를 어느 구석에도 맞추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선풍기와 불가마를 보아도
구석을 이루는 직각과 웅크림을 이루는
구체 사이에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있어
빵빵하게 바람을 넣고 억지로 밀어 넣으면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울음으로 튕겨 나와
그 반동으로 흔들리는 어깨를 보아도
딱 맞는 면도
두 팔에 안기듯 두 면에 푹 싸일
잘 어울리는 구석도 없습니다.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이라도 베는
종잇장처럼 작고 얇은 모서리도
구르다 멈추는 모나미 볼펜 같은
비좁은 둔각 한 칸도 가지지 못한
반듯한 직각이 바람을 넣은 비닐봉지
모서리처럼 부풀어 오르는 순간에도
누구랑 부딪힐까봐 들숨을 들여 마시는
둥근, 둥근 것들,
모서리가 삼 백 육십 개인 모를 가둔
평면에서 굴러 나와
삼백 육십개의 모가 사방, 십팔방
삼십육방 삼천육백 방이 되어
그 많은 모를 맞출 자리가 없어
다만 몇 개의 모서리만 맞으면
비슷한 면을 의지해서 사는 세상에서는
차이고 튕기고, 굴러다니는
모난, 모가 보이지도 않도록
격렬하게 모난,
그래서
부딪히고 깨지고 멍드는
온통 모투성이 이 지구도
바깥에서 보면 둥근, 둥근 것입니다.
댓글목록
고나plm님의 댓글
고나plm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의미가 심장해,
여러번 읽어보고 갑니다
제목에서부터 심장했기 때문입니다
잘 쓴 시,
잘 음미하고 갑니다
싣딤나무님의 댓글
싣딤나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사합니다.
언제 말 한번 붙여 보고 싶었던
물이 증류수로 변해가는 단계의 시인님!
요즘 시가 올라오지 않아 궁금했더랬습니다.
저 역시 몹시 바빴지만요.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