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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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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8회 작성일 20-05-2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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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장유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내 눈이 싱그러이 즐거웁다
억새풀, 논두렁, 물로 가득찬 논들,
밤이면 그 논물 위로 비치는 달의 얼굴,
붓으로 그린 듯한 산등성이,
홍시처럼 물든 저녁 노을,
그리고 여름을 기다리던 소나무가
제 옆에 서 있던 참나무에게 어기대며
솔방울을 툭 던지면, 난생 처음
나는 공기에게도 무게라는 것이 있음을 배운다
조금 걸어가다가 배롱나무의 매끈한 등을 오르내리는
개미떼를 보며 나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들을 예까지 데려오는 거라 생각하게 된다
그 너머 일제 때의 짧은 구닥다리 터널 옆에선
노숙한 바람이 이파리들을 재료 삼아
나무와 나무 사이에 계단을 만들고 있다
공장에서 한 이백 보 떨어진 경식이네 저녁 화단에선
손에 쥔 호스가 파르르 몸을 뒤틀며 축복처럼
영산홍 철쭉 병꽃에다가 물을 뿌리는 중이다
겨울 타이가 지대 자작나무 혈관 속에 숨겨둔
광고에 나오는 상쾌한 맛, 자일리톨 껌이
동네 구멍가게 자판대에 진열되어 있다
길 옆 개울가 갈대 속에선 염낭거미의 새끼들이
어미의 체액을 주둥이 속으로 빨아들이고,
가끔 순록의 창자와 쓸개를 들어낸 자리에
이파리와 꽃들이 주검인 양 눕어 있기도 했다던
자작나무의 껍데기에 할퀸 자국이 선명하다
그 줄기를 타고 아슬한 꽃대 끝에
한 송이 히비스커스가 시처럼 맺혀 있다
공장을 나와 길을 가는 내 눈은 이토록 즐거운데,
내 손은 먼지 떨어질 날 없다고
그러나 괜찮다고,
나는 생각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거리,
내 가족이 기다리는 집까지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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