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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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28회 작성일 20-06-19 07:26본문
내가 만일 지금 당장 죽어야 한다면
시베리아의 황량한 벌판에 가 무릎 꿇고 싶다.
러시아 혁명과 함께 자살해 버린,
시인 마야콥스키가 내 머리 위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겨줄 거다.
하얀 늑대처럼 엎어져 죽는다 해도,
내 뇌수가 뿌려질 곳이 설원(雪原)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하얀 백지 위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같은 것이 내 마지막 詩가 되리니.
휘갈겨쓴 도개교(跳開橋)같은
성서(聖書)조차 얼어 접히지 않을 그곳에서야
나는 비로소 시인이 될 수 있으리라.
그것이 나의 황홀이다.
나의 맨발은 껍질 벗겨진 자작나무숲으로부터 왔다.
내가 다시 눈 뜰 일은 없을 것이다.
차가운 손 잡아끌어도,
흘러넘치는 새하얀 젖
레나江으로 짓이겨진 여인 라라여!
너는 굶주린 빨간 깃발로 빨간 두건을 쓰고 황막한 절망을 향해 맨 먼저 걸어갔었다.
발랄라이카를 들고,
부풀어 터지려는 시체들과 함께
한 몸으로.
너의 파랗게 변한 맨발을 쓰다듬으며 내가 운다.
너는 저 광야에 무리지어 숨쉬는 수레바퀴들
자작나무숲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다.
너의 입술에 번져나가는 예리한 성에를 내가 바라보며 운다.
너는 누구를 무엇을 위해
네 순결을 바쳤나?
그리고 펜이 긁히는 군화(軍靴) 소리. 지친 나귀들이 스스로로부터 무엇인가를
이끌어내려 애쓰는 힘겨운 소리. 거기였다. 우리가 서로를 탐했던 것도.
자꾸 일어서는 금발의
머리카락과 얼굴에 달라붙는 얼음조각들
서로 떨어내며.
폭주하여 달려가는
채찍질 소리 안에서,
얼어붙은 노트 위에
유리조각 긁히는 소음으로 시를 쓰며.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레나江 속에
혁명의 꿈틀리는 모순으로 뜨겁게 뜨겁게
우리 함께 몸을 던졌다.
무섭게 달리는 말발굽 아래 너의 아이들은 짓이겨졌었다.
나는 너와 함께 허겁지겁
네 아이들의 잔해를 집어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미 반쯤은 얼음이 되어 버린,
이미 얼굴 반쪽쯤은 레나江 오물(омуль)에 주어 버리고
날 노려보는 라라여, 넌 날 영원히 지켜줄 거다.
몸부림치는
네 한쪽 유방 위 새겨진
문신의 거룩한 빛깔
내가 만일 지금 당장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날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들 속에서가 아닐 것이다.
조심스런 빌딩들과 떠가는 흰 구름들, 연록빛 바람, 날 위해 울어줄 사람들이 있는
집과 벽 속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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