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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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403회 작성일 20-07-07 00:28본문
盧天命에게
자개장처럼 까만 풍경 속
예리하게 음각(陰刻)된 바람이
그슬린 은빛 슬쩍 내비치며 불어갔지.
투명한 角을 세운 수면 위에
새하얀 손길의 빈 집이
잠시 머무는 일도 있었지.
봄 새순처럼 부풀어오른
부드러운 뿔.
황홀한 바람.
사슴 한 마리
몇 겹의 장지문(壯紙門) 거치며 피오르고 지는 동안,
모든 빛깔과 소리와 형체를
하나하나 놓아가고 있었던 것이야.
수면 아래 가라앉은 것은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겹겹이 닫혀 있던 멍울을
활짝 터뜨려
달빛 속으로 기어오르는 꽃도 있었네.
빈집 안에서는 흰 바람벽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사슴과
희미하게 일렁이는 호롱불
지창(紙窓)을 흔드는
복사꽃향이 감돌았네.
복사꽃과 먼 바다.
화분(花粉) 조용히 날리우는
태곳적 숲.
붉게 칠한 신령(神靈)한 기둥 위에
어룽지는 파도.
길.
또 다른 길.
흰 사슴 한 마리
아득히 높고 외로운 것 속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다네.
댓글목록
봄빛가득한님의 댓글
봄빛가득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사슴을 사랑한 시인 노천명..
어쩜 그녀는사슴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자화상을 보면
5척 1촌 5푼 키에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 체로 가까이하기 어려워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서투른'의 뜻)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고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삼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고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간다. 대처럼 꺾어는 질지언정
구리처럼 휘어지며 꾸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노천명 <자화상> 1938
그녀의 내성적인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릴적부터 친구도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시인의 삶과 어쩌면 가장 가깝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물속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사슴의 모습에서 자신의 고독을 철저하게 읽어 내는 시인 노천명과 코렐리 시인님이 오늘 아침 오버랩 되는군요.
편안한 하루 되시길요. 시인님!
* 올 해는 나에게 베로니카 묘역 참배의 해로 정해야 되겠군요.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한 번은 다녀와야 될 것 같은...
코렐리님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천명의 시 "길"이라는 것을 보고 써 보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시에 대해 쓴 것이 아니라, 이 시를 쓰는 노천명을 상상하면서 써 보았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나오는 고가(古家)가 보였다.
거기
벌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흰 나리꽃이 향을 토하는 저녁
손길이 흰 사람들은
꽃술을 따문 병풍의
사슴을 이야기했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가자면
지금도
전설처럼
고가엔 불빛이 보이련만
숱한 이야기들이 생각날까봐
몸을 소스라침은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이장희님의 댓글
이장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참 시가 좋네요.
좋은 표현들이 잘 어우러져 있는 게 보기좋습니다.
이런 좋은 시는 많이 알려져야 하는데...
주머니 속에 넣고 한번씩 보고 싶네요.ㅎㅎ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늘 건필하소서, 코렐리 시인님.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마음에 드셨다니 기쁘네요.
이장희 시인님 시 잘 읽고 있습니다. 절창들이더군여.
좋은 하루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