À Jacqueline du Pré,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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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302회 작성일 20-08-13 00:02본문
À Jacqueline du Pré, 2020
당신에게 말하고픈 것이 있습니다. 다음은 세 통의 편지들입니다.
1. 초여름
연록빛 스카프가 흘러내리는 아침이니, 바람도 싱싱한 초여름을 살짝 흔드는 데 안성마춤일 것 같습니다. 차갑지 않은 찰필로 부드럽게 끝을 말아올리며 당신 머리카락이 매운 쑥잎을 굴려오고 있네요. 귀 기울이지 않아도 덜 영근 언어들이 심지어는 꽃 피우고 열매를 맺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호흡에 풍부한 음영을 부여하고 싶어집니다. 연록빛이 짙은 청록빛으로 전이되어가는 이 시점의 미묘한 변화를 하나의 언어로 아울러 그대 이마에 감아주고 싶어집니다.
2. 페드라
어제가 오늘에게 시를 씁니다. 오늘이 쓴 시는 또 어제에게 가 닿습니다. 나는 어제의 시를 받아 오늘의 시에게 주고, 오늘의 시를 받아 어제의 시에게 건네줍니다. 벽이 없는 도시에 간 적 있습니다. 하늘 없는 구름 아래를 걸어갔던 적 있습니다. 눈이 내린 적은 없으나 육각형 예리한 모서리의 눈 결정이 잿빛 허공 중에 흩어졌습니다. 나는 삶도 죽음도 가져본 적 없습니다. 내가 앉아있던 의자는 앉기에도 불편하고 서있기에도 불편합니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것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붙잡아보기는 커녕 함께 표류하여왔습니다. 시를 통해 나는 내게 운명지워진 것들을 한데 모읍니다. 물결이 그것들을 멀리로 떠나보내는데 말입니다. 아들 히폴리토스를 사랑했던 어머니 페드라처럼, 시를 쓴다는 것은 내게 근친상간입니다. 당신에게만 처음 하는 말입니다.
3. 하코네의 겨울 호수에서
새하얀 밤. 하코네 료칸에서 바라보던
산 정상에서 기어내려온 몽롱한 운무가
유리창을 똑 똑 두들기던 밤. 검은 호수로
걸어들어간 마이코의
가냘픈 샤미센 소리. 엷게 칠해진
수탉의 볏이 까딱까딱
방향성 없이 산에
기대고. 숨 멎도록 절정의
하현달에 겹쳐
달 반대쪽이 부끄러워하던 밤. 타오르는 구름 흐트리던
얼어붙은 주렴(珠簾), 한 꺼풀 안에
싱싱하게 펄떡이는 은어 한 마리
내 망막 안으로 해엄쳐
들어오는. 몰아쳐가던 파도가 살갗
바깥으로 뛰쳐나올까 봐
깃털 옴츠렸나. 투명한 소름이 숲에 가까와지는
설원에 집 한 채, 홀로 방 안으로
들어가면 까칠까칠한
침엽수들이 내 앞에서 서서히
일어서는. 거기 내리는 눈송이 열리지
않는 창이 훤히 열린,
나는 왜 여기 혼자
어느 소녀가 활짝 편
장막 위로 氷片들 기어오르는
거울을 닦고 있나. 비춰야 할 것도
없는데 거울 속
내 얼굴 대신 수많은 눈송이들
그 하나 하나 다른 표정들 입김
밀려오거나 혹은, 아득히 멀리
밀려가는. 황홀에 뼛속
까지 떨려오는 하코네의
자작나무숲
눈발에 서서히 밀려,
나 대신.
댓글목록
날건달님의 댓글
날건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호우가 멈추고 오후에는 가마솥 무더위가 한창이더군요. 퇴근 후 동료들과 산행을 하고 내려와 늦은 저녁을 나누고 방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간단히 샤워를 하려고 수도꼭지를 틀자마자 샤워기에서 물줄기 대신 쏴아아아아, 하고 자클린의 눈물 조각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네요. 그 조각들은 나의 폐 속으로 흘러 들어가 심장은 급격히 세동하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가득합니다. 빈 방에는 샤미센의 세 가닥 비단실을 타고 내려온 눈꽃 송이가 휘날리고 방안의 풍경들은 자작나무 숲으로 전이되어버렸습니다. 밑동 잘린 나무를 안고 이츠키가 알몸으로 날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는 그녀의 알몸이 비친 거울을 빙편으로 말없이 닦아내기만 하였습니다. 오늘 밤, 시인님의 시어를 가슴에 품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 그녀를 추모합니다. 고맙습니다. 코렐리 시인님!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자클린 뒤프레가 연주한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들으면서, 자클린 뒤프레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제의 시를 받아적어 내일의 시에게 보내고 내일의 시를 받어적어 어제의 시에게 보내는 사람이니, 이미 죽어 과거 속에 있는 그 여인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겠죠. 편지를 보내기는 했는데, 그녀가 좋아할 지는 모르겠네요. 시간을 두고 다듬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날건달님은 제 내면을 어떻게 그렇게 잘 읽어내시는지 참 신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