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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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6건 조회 646회 작성일 20-09-03 20:09본문
비 그치다
언젠가 산정호수에 가서 보았던 달빛.
오늘 밤하늘에 걸린 달빛은 무엇이 다를까 생각하다가
내 가슴 속 시퍼런 물결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그때 보았던 냉이꽃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거미줄이 새파랗다. 후박나무가 깨끗한 숨을 내쉰다. 나는 길게 뻗은 가지들을 헤집고
더 깊이 들어가 달빛을 찾아보기로 한다. 그 여인은 맑게 훌러가는 물 속에
여름을 남겼다. 그 여인은 물 고인 자리마다 숨막히는
황홀을 남겼다. 달빛 안에서 후두둑거리는 소리
들려온다. 빗줄기가 떡갈나무 껍질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소리 들려온다. 폐선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그대는 폐선의 삐그덕거리는 계단을 올라가 본 적 있는가? 그대는 반쯤 열린
어둠 속으로 폐선을 놓아보낸 적 있는가? 그대는 검은 뻘에 발목까지 빠지며
하구로 걸어가 본 적 있는가? 이 비 그치면
그대는 운무 피오르는 가는 잎맥과 잎맥 사이의 그 길을
어찌 호곡하려는가? 어제부터 오는 이 빗줄기들 속을
조용히 지나가는 달빛은 아무려나 흔들리지 않는
손길을 잎들 위에 던진다. 잎을 툭 건드리는 그 고통 하나 하나
마치 빗줄기처럼. 허나
빗줄기들도 보이지는 않고 소리만 들려오는 것들이 아니던가?
나는 투명한 것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본다.
나는 그대에게 가장 은밀하고 명징한
맥박이고 싶었다. 달빛 기울어지는 물가에는 항상
연보랏빛 표정이 찰랑거리듯
나는 그대를 그렇게 지나가고 싶었다. 나는 아주 작은 가지 하나도
내 무게로 인해 휘어지게하고 싶지 않았다.
댓글목록
너덜길님의 댓글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비, 바람 그치고, 시는 이렇게 아름다운데,
제가 거니는 숲길의 메타세콰이어, 벚나무,
삼나무, 그리고 이름모를 꽃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더군요.
비록 내 무게로 인해 쓰러진 것은 아니나,
언제나 현실은 시보다 시적이지요.
항상 유려하게 글을 푸시는 코렐리님,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그렇군요. 시가 무작정 비현실적인 것도 좋은 것은 아닐 듯합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수긍할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저는 현실적 비극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잘 모르는 것은 쓸 자신이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요.
개인적 비극, 초현실적 비극의 테두리 안에 머물 수밖에 없네요. 개인적 비극 -> 초현실적 비극 -> 극복으로 가는 것은
제 생존방식과 관련된 것이라 저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피플멘66님의 댓글
피플멘66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은밀하고 명징한 시를
오랜만에 접하게 되네요
시인님
늘 건강 하시기를요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사합니다.
늘 좋게 읽어주시는 피플멘66시인님 같은 분이 계셔서 힘이 납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분이세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붉은선님의 댓글
붉은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끝 대목에서 명징하게 드러나는 삶의 철학이 느껴집니다 시인님의 ~~~
실타래를 푸는 듯 합니다 좋은시 잘 감상 했습니다
편안한 하루 되셨기를 .......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삶의 철학이라기보다 그냥 갈구하는 것이겠죠. 요즘 born of fire 라는 이슬람영화를 보았는데
어떻게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냥 감탄만 하게 되더군요.
붉은선님 시야말로 향기가 감도는 훌륭한 시였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