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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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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364회 작성일 19-09-26 12:31

본문

빵 봉지



물론 당신은 나를 잊었을 테지만
나는 나의 잊혀진 삶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

빵이 안에 있을 땐
빵빵한 자세를 유지하다가
부스러기가 될 쯤엔 허물허물 쭈그러들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버려지는 게 나의 삶이지요

뜯기기 전엔 오직 나 혼자만 맛보던 빵이었지요
빵의 보호자였으나
빵이 있었기에 보호받았던 역설의 삶이지요

한땐 빵보다 컸지만
이젠 이리저리 찢겨 본래의 얼굴이 사라진 삶
이라구요

빵은 당신의 침물에 허물어지고 이빨에 짓이겨
웜홀 같은 뱃속으로 사라진지 오래,
나는 빵을 빼앗긴 죄로 휴지통에 버려졌어요

서러운 마음을 근근이 가누며
휴지통 바닥에 착 달라붙어 있는데, 당신은
그도 못 미더워 냄새 나는 발로 한 번 더 꾹 눌러
확인사살을 하고 말았지요

어느 날 먼 친척뻘인 분리수거용 비닐 봉지에 담겨
유배지로 끌려갔지요 그러나
지금껏 나를 기억하는 이는 없습니다

분리수거통 땟국물 줄줄 흐르는
아파트 모서리에 웅크린 고양이 한 마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나를 보곤 한참을 따라오다,
따라오다 석양이 지는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서러움을 잠시 지우고
멈춰 선 고양이의 눈에 어린
별들과 꽃들과 어릴 적 친구들의 얼굴이며
한때 서로의 살갗을 비비던 빵의 얼굴을,
밤이 깊도록 다 새길 듯하였습니다

[이 게시물은 창작시운영자님에 의해 2019-10-01 13:29:32 창작시의 향기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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