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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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349회 작성일 20-08-03 00:01본문
어제 부다페스트 바치거리에 나갔다가
포도 위에 놓여있는 발
하나를 주워왔습니다.
발목부터 깨끗하게 잘려
하얀 살결과 부끄럽게 고개 내민 뼈가
아름다왔습니다.
그래서 품 속에 그 발을 안고 와서
창가에 놓았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 그 발이
당신에게 속했던 것임을 알았습니다.
부끄럽지만
나는 당신 발목의 복숭아뼈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하루종일이라도
당신 발목의 복숭아뼈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순결한 백지 위에 나른한 봉우리로 어느덧 보랏빛의 버섯같은 것으로
황금 가루가 그 속에서 배어나오기도 하는
내가 핥고 싶은
당신의 표류물이었습니다.
포연(砲煙)에 떠밀려 그것은 내게까지 다다랐지요.
그러나 가끔 황홀에서 깨어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당신이 복숭아가 아니라
복숭아 안에서 그것의 완전함을 이루어가는
응집된 고통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요.
당신은 고통을 싫어하지만
나는 당신의 복숭아뼈를 사랑합니다.
당신 발목의 복숭아뼈를 만져봅니다. 고통은 힘입니다. 고통은 생의 의지입니다. 고통은
당신의 부재(不在)를 아름답게 합니다. 하지만 시를 쓰다가
나는 과도로 손을 베인 적 있습니다.
나는 과도로 복숭아 껍질을 깎아낸 적도 있고
과도를 휘두르기만 하고
복숭아 껍질은 내버려둔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복숭아는 더 완전해졌습니다만
당신은 잘려진 발목으로 실로 많은
이야기들을 숨겨야했을 겁니다.
어쨌든 당신의 발목은 내 창틀에서 가장 화사합니다.
가끔 달콤한 꿈을 끈적끈적한 즙으로 흘리기는 하지만,
차가운 물에
당신의 복숭아뼈를 살살 씻어주는 것도 내 행복입니다.
당신의 하얀 발목을 씻어 창틀에 놓아두면
가고 오는 싱그런 바람이 그것을 뽀송뽀송하게 말려줍니다.
곁에서 펄럭이며 불타오르는
빨래도 함께 마릅니다.
어젯밤 도려내 빨랫줄에 널어두었던
울새의 모가지도 함께 마릅니다.
여기 없는 당신도
당신의 발목을 내게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나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당신 발목이 오늘 아침
산드라 장미처럼 빠알갛게 부풀어올랐을
리 없겠지요?
당신의 목은 저 검은 지붕들 아래
그 어떤 초라한 사내가 갖고 있을까요?
당신은 지금 여기
없지만,
당신이라면 아마 날 위해
그 하얀 발목을,
물컹거리며 주금빛으로 허물어져내리는
부정형의 베일 바깥으로 내밀어줄 겁니다.
당신의 토르소를 위해서는
호화로운 로코코양식의 액자를 닮은
직사광선이 외로운 창문을 준비하지요.
자 그럼 나는,
늦은 점심을 준비하러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
댓글목록
grail217님의 댓글
grail217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천재적입니다,
서정의 극치미를 감상합니다,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감수성을 접하게 되어 기쁩니다,
꾸준히 좋은 작품을 쓰시는 노력과 정성과 재능에 저는 부끄럽게도 자신의 무능합을 엿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과찬이십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시를 써보고 싶다 하는 마음으로 써보았습니다.